진골

진골

다른 표기 언어 眞骨

요약 골품제는 성골·진골의 골제와 1~6두품의 두품제로 구분되는데, 진골은 중앙의 모든 관직에 취임할 수 있었다. 대부분 왕족 출신인 진골이 각 중앙관서의 장관직을 독점한 데 반하여, 6두품은 제6관등인 아찬까지만 오를 수 있었고 관직도 시랑이나 경과 같은 차관직밖에 차지할 수 없었다. 복색·그릇·수레·가옥 등 모든 면에 있어서 진골은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 경제적으로도 녹읍과 전장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대규모의 목장과 노비 등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라 하대에 들어와 진골의 수가 늘어나면서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을 위해 민폐를 일으키고, 게다가 진골집단간의 왕위쟁탈전이 격화되면서 신라사회는 큰 혼란에 빠졌다. 그리하여 결국 전국적인 농민반란이 일어나 후삼국으로 분열되었다.

골품제는 성골·진골의 골제(骨制)와 1~6두품의 두품제(頭品制)로 구분되는데, 진골은 두품보다 높은 신분으로 중앙의 모든 관직에 취임할 수 있었다.

진골은 대부분 왕족출신이었고, 일부는 인접국의 지배층으로 있다가 신라에 투항하여 진골신분에 편입되기도 했다. 성골과 진골의 차이는 확실하지 않지만, 본래 같은 왕족의 범주에 속해 있다가 진흥왕의 장자인 태자 동륜(銅輪) 계열의 후손들이 왕위를 차지하면서 불교의 전륜성왕(轉輪聖王) 설화를 끌어들여 자신들의 혈통을 다른 왕족과 구별하고 신성시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진덕여왕을 마지막으로 성골이 없어지자, 이후부터는 태종무열왕계의 진골출신이 왕위에 올랐다.

진골이 신분상 모든 관등에 올라갈 수 있었고 각 중앙관서의 장관직을 독점한 데 반하여, 6두품은 제6관등인 아찬까지만 오를 수 있었고 관직도 시랑이나 경(卿)과 같은 차관직밖에 차지할 수 없었다. 복색·그릇·수레·가옥 등 모든 면에 있어서 진골은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 경제적으로도 녹읍과 전장(田莊)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대규모의 목장과 노비 등을 소유하고 있었다. 또한 정치·군사뿐만 아니라 학문·사상 분야에서도 뛰어난 인물들을 배출했다.

그러나 신라 하대에 들어와 진골의 수가 늘어나면서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을 위해 민폐를 일으켰고 게다가 진골집단간의 왕위쟁탈전이 격화되면서 신라사회는 큰 혼란에 빠졌다. 그리하여 결국 전국적인 농민반란이 일어나 후삼국으로 분열되었다.→ 골품제도, 성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