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품제도

골품제도

다른 표기 언어 骨品制度

요약 신라의 신분제도. 골품제도는 혈통의 높고 낮음에 따라 관직진출·혼인·복색을 비롯한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여러 가지 범위와 한계를 규정한 신분제였다. 신라 국가형성기 이래 정치체제 및 사회발전과정과 병행하여 정비된 골품제는 삼국통일 이후에도 존속하다가 고려의 성립으로 소멸했다.골품제는 왕족을 대상으로 한 골제와 그밖의 사람을 대상으로 한 두품제로 구분된다. 모두 8개의 신분층으로 구성되었는데, 골족은 성골과 진골로 구분되었으며, 두품층은 6~1두품까지 6개의 신분층이 존재했다. 그러나 3~1두품까지의 두품층은 곧 소멸되어 평민과 동일한 처지가 되었다. 성골은 골족 중에서도 직접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신라 최고의 신분이었다. 성골은 28대 진덕왕을 끝으로 소멸되었으며, 29대 태종무열왕부터는 진골이 왕위를 계승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형성과정
  3. 구조
  4. 골품제와 사회생활
  5. 골품제와 관등
  6. 골품제의 해체

개요

이는 골품, 즉 혈통의 높고 낮음에 따라 관직진출·혼인·복색(服色)을 비롯한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여러 가지 범위와 한계를 규정한 신분제였다.

특히 세습성이 강하고 신분간의 배타성이 심하여, 일찍부터 인도의 카스트 제도 및 일본의 씨성(氏姓) 제도와 비교되어 주목받아왔다. 여기에는 같은 삼국시대에 존재한 고구려·백제의 신분제 및 이후 고려·조선시대의 신분제와 비교해서 신라의 특징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신라 국가형성기 이래 정치체제 및 사회발전과정과 병행하여 정비된 골품제는 신라에 의해 삼국이 통일된 이후에도 장기간 존속하다가 고려의 성립으로 소멸하였다.

형성과정

골품제는 단순히 법제상의 장치일 뿐만 아니라 신라사회의 성격을 대변하고 사회조직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따라서 그 형성과정은 곧 신라사회의 형성과정과 맥락이 같다. 골품제는 왕족을 대상으로 한 골제(骨制)와 여타의 사람을 대상으로 한 두품제(頭品制)로 구분된다. 신라의 박(朴)·석(昔)·김(金) 3성씨 집단은 경주에 정착하여 사로국(斯盧國)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이들 성씨 집단은 상호간에 혼인을 통해 자신들의 지배체제를 유지하고 배타적인 신분적 특권을 누렸다.

이들에 의해 형성된 혼인집단을 골족(骨族)이라 하고, 이에 따라 지배신분층을 중심으로 편성된 신분질서가 골제이다.

이같은 골족들의 신분적 우월감은 관념에 그치지 않고, 형질적으로도 피지배민과 달랐다고까지 함으로써 자신들의 지배체제를 합리화시켰다. 특히 내물왕(奈勿王) 이후 김씨 집단의 왕위세습이 확립됨에 따라 김씨 중심의 왕골(王骨)이 형성되었다.

이렇게 골제가 성립되어가는 한편 신라는 주변의 음즙벌국(音汁伐國)·실직국(悉直國)·압독국(押督國)·소 문국(召文國)·감문국·골벌국(骨伐國) 등 여러 소국들을 복속시켜나갔다. 이들은 신라에 정복된 뒤 신라로부터 직·간접적인 지배를 받거나, 원래 거주지로부터 집단적으로 이주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피정복지의 지배층 일부를 신라의 왕경(王京)인 경주에 이주시키고, 그들을 중앙의 지배체제 속에 편입시켰다. 이때 피정복세력의 강약에 따라 그 지배층에 대한 대우와 포섭방법도 각기 달랐는데, 이들을 골제 아래에 차별적으로 편제한 것이 바로 두품제이다.

피정복세력 중에는 금관가야 왕족과 같이 직접 진골에 포섭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두품제에 편제되었다.

그리고 세력이 미약한 피정복세력은 원거주지에 남겨둔 채 촌주(村主)로 삼아 지방행정체제 내에 편제하기도 했다. 그런데 신라가 이처럼 복속된 각 지역의 지배층에게 기존의 정치적 지위를 어느 정도 인정해 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신라 왕권이 아직은 이들을 사회적으로 완전히 해체시킬 만큼 강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피정복지의 지배층은 두품제는 물론이고 관료조직에도 편제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작업은 중앙의 17관등제를 성립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그런데 신라의 관등제는 경위(京位)와 외위(外位)의 2원적 체계로 되어 있다. 즉 외위는 제1등인 악간(嶽干)이 경위 제7등인 일길찬(一吉飡)에 대응하면서 순차적으로 17등 관등에 맞추어 편성되었다.

외위는 피정복세력 중 중앙 관료조직에 포섭되지 못한 촌주 등의 지방세력가에게 수여한 관등으로 여겨진다. 이와 같은 관등체계의 정비는 경주 6부의 행정구역화와 병행하였다. 본래 신라의 왕경을 구성하고 있던 6촌(六村)에 새로이 복속된 지역의 지배층이 이주해와 함께 살게 됨에 따라, 6부에 대한 정비 내지 재편성의 필요성이 강하게 대두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자비마립간 이후 본격화되어 법흥왕대에 완성되었다.

469년(자비왕 12)에 경주의 방리(坊里) 이름을 정했고, 487년(소지왕 9) 사방에 우역(郵驛)을 설치했으며, 490년(소지왕 12) 경주에 시장을 열어 여러 곳의 물자를 유통하게 한 것 등은 그 재편성작업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었다.

이러한 신라의 관료조직 일원화와 행정구획 정리는 골제와 두품제의 결합에 의한 골품제를 완성시켰다. 법흥왕대의 복색제정과 율령반포는 바로 이같은 신분제가 법제적으로 정리되어 신라의 제반 부문을 규제하는 기본원리로 작용하게 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구조

골품제는 모두 8개의 신분층으로 구성되었다.

먼저 골족은 성골(聖骨)과 진골(眞骨)로 구분되었으며, 두품층은 6~1두품까지 6개의 신분층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3~1두품까지의 두품층은 곧 소멸되어 일반 평민과 동일한 처지가 되었다. 성골은 골족 가운데에서도 직접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신라 최고의 신분이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에 의하면 성골은 28대 진덕왕을 끝으로 소멸되었으며, 29대 태종무열왕부터는 진골이 왕위를 계승했다.

진골도 본래는 왕족으로서 각종 특권을 누리고 중앙의 요직을 독점했으며, 신라 하대 혼란기에는 자신의 무력을 바탕으로 스스로 왕위를 차지하는 등 신라의 실질적인 최고 신분층이었다. 이들 진골귀족들은 신분적 특권을 부여받음과 동시에 경제적으로도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게 되었다.

골족 내부에서 성골과 진골의 분류기준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다. 종래 일부 일본인 학자들은 성골은 실제 존재한 것이 아니라 후대인들이 자신들의 조상을 신성시하기 위해 추측하여 부른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치원이 찬술한 낭혜화상비문에 신라인 스스로 성골이 존재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성골은 실재했음이 분명하다.

성골과 진골의 분류기준에 대해서는 혼인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보기도 하고, 일정 세대의 친족집단 범위를 벗어났을 때 성골이 강등되어 진골로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현재로서는 진평왕 때에 이르러 그 전에 비해 강화된 왕권을 배경으로 하여, 왕실의 소가족이 나머지 왕실 혈족집단의 구성원과 구별하기 위해 진골보다 상위의 신분으로서 성골을 자칭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그리고 중고기 왕족 내에 적극 수용된 불교의 진종설화(眞種說話)도 왕권의 확대와 관련하여 왕실의 소가족이 다른 집단보다 우월한 의식을 갖게 하는 데 기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즉 법흥왕 이후 불교식 왕명을 채택하는 한편 왕족의 이름도 인도 불가의 이름을 따랐는데, 특히 진평왕은 스스로를 석가의 아버지인 백정왕(白淨王)이라 하고 그 부인을 석가의 어머니인 마야부인(摩耶夫人)이라 함으로써, 석가모니의 집안이 다시 전생(轉生)하여 신라의 왕족으로 태어났다는 신성족(神聖族) 의식을 강하게 갖기도 했다.

진골 아래 6개의 두품층은 크게 2개의 신분층으로 구분되었다.

6~4두품은 중앙의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상급 신분층이었으며, 3~1두품은 관직에 나가지 못하는 하급 신분층으로서 일반 백성과 같은 의미로 변화되었다. 이중에서 6두품은 '득난'(得難)으로 불릴 정도로 얻기가 어려운 귀성(貴姓)이었다. 이들은 사로국이 주변 소국을 통합해나가면서 비교적 세력규모가 큰 지역의 지배층을 포섭하면서 부여해준 신분으로 보인다. 6두품은 진골에 비해 관직진출 및 신분상의 제약이 다소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상급 지배층에 속하였다.

또한 6두품은 종교와 학문분야에서 특히 뛰어난 활동을 전개했다. 원효(元曉)와 같은 승려는 6두품 출신 사상가의 대표적 인물이며 신라 하대 선종(禪宗) 승려 가운데도 6두품 출신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들이 종교와 사상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학문분야에서 이들의 진출은 가장 주목되는 현상이었다.

이들이 골품제의 제약 밑에서 진골출신들과 겨루면서 관직에 나가는 주된 길은 학문을 통한 방법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국학(國學)이나 독서3품과(讀書三品科)와 같은 제도적 장치를 통해 학문적 소양을 쌓기도 하고,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는 경우도 늘어났다. 5두품과 4두품도 상위의 신분층을 형성했으나 현재 남아 있는 기록으로는 이들의 구체적인 활동상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국가기관의 잡다한 실무는 상당부분 이들에 의해 처리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회가 변화하고 일반 평민의 지위가 상승됨에 따라 4두품도 평민과 비슷한 처지가 되었다.

이와 같이 골품제도는 본래 8등급으로 구분되었으나 성골이 소멸하고 3두품 이하와 평민들과의 구분이 없어진 결과 진골·6두품·5두품·4두품·백성 등 5개 신분층으로 정리되었다. 그러나 각 신분층 내부에서 상하이동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자신의 능력에 따라 신분을 상승시키는 것은 법제적으로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범죄 등에 연루되어 신분이 강등되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즉 진골의 가문에서 강등되어 6두품으로 전락하는 사례가 '족강일등'(族降一等)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신분이 다른 사람들간의 혼인에 의해 출생한 자식은 부모가 갖고 있는 신분 중 하위의 신분으로 귀속되어 신분이 하락되었다.

골품제도에 편입된 사람들은 왕경에 사는 사람들로 제한되었다.

따라서 지방민은 골품제의 직접적인 규제를 받지 못하고, 왕경인에 대비되어 간접적인 지배를 받았다. 이들은 경위를 받지 못하고 외위를 지급받았으며, 각종 생활에 대한 규제도 지방민에 대해서 일원적으로 규정한 것은 없었다. 이같이 골품제도가 왕경인에 한정된 신분제로 기능함에 따라 왕경인은 지방민에 대한 차별적 인식을 갖게 되었다. 또한 왕경에 거주하고 있기는 했지만 노비와 같은 천인(賤人)은 골품제도에 포함되지 않았다. 따라서 골품제는 국가통치력이 미치는 전지역과 그 안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후대의 신분제에 비해 불완전한 점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1)이벌찬                      
      (2)이찬                    
      (3)집찬                    
      (4)파진찬                  
      (5)대아찬                  
    (6)아찬              
    (7)일길찬              
    (8)사찬            
    (9)금벌찬            
  (10)대나마              
  (11)나마            
(12)대사            
(13)사지          
(14)길사                  
(15)대오                    
(16)소오                    
(17)조위                    
4두품 5두품 6두품 진골 관등 대사 사지 도독 사신 주조 태수 장사·
사대사
소수 현령
골품 중앙관직 지방관직
골품과 관등·관직의 관계

골품제와 사회생활

골품제는 일반인의 사회생활 전반에 신분에 따른 차등적인 규제를 가했다.

공복(公服)에 있어서 진골은 자색(紫色), 6두품은 비색(緋色), 5두품은 청색, 4두품은 황색으로 구분되었다. 그리고 겉옷 및 속옷에 사용되는 옷감의 종류, 관(冠)의 재질, 요대 및 신발의 재질, 사용하는 포(布)의 종류 등 복색에 관계되는 모든 사항을 규제했다. 또한 거기(車騎)에 사용되는 재질 및 장식품의 종류, 그리고 일상생활의 용기까지도 골품에 따라 다르게 규정하였다. 옥사(屋舍)의 실(室)의 길이와 넓이도 진골은 24척을 넘지 못하고, 6두품은 21척, 5두품은 18척, 4두품은 15척을 넘지 못하게 했으며, 가옥 내 마구간도 신분에 따라 크기를 달리하는 등 일상생활의 모든 면이 골품제에 의해 통제되었다.

골품제와 관등

관직의 관계·골품 제도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신분에 따라 올라갈 수 있는 관등의 상한선을 규정한 점이다.

관등은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기준으로서 신라에는 17등급의 관등제가 있었다. 이는 6세기초 법흥왕대에 완성되었는데, 관등명칭에 찬(飡)이나 사(舍:마루)·지(知)와 같이 이전의 수장적(首長的) 의미를 간직한 것이 많은 점으로 보아 본래 여러 종류였던 지배자의 명칭이 하나의 관등체제에 편제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관등제는 골품제와 표리관계를 이루며 존재했다.

제1관등인 이벌찬(伊伐飡)에서 제5관등인 대아찬(大阿飡)까지는 오직 진골만이 차지할 수 있었고, 다른 신분층은 대아찬 이상의 관등에 올라갈 수가 없었다. 6두품은 제6관등인 아찬(阿飡)까지만 오를 수 있었고, 5두품은 제10관등인 대나마(大奈麻)까지만 승진할 수 있었으며, 4두품은 제12관등인 대사(大舍)까지만 차지할 수 있었다. 골품제에는 신분에 따라 올라갈 수 있는 관등의 상한선은 정해져 있었지만, 그 하한선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따라서 하급 관등도 상당 부분 진골귀족이나 6두품들에 의해 독점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골품에 따라 차지할 수 있는 관등에 상한선을 둠에 따라 자신들의 신분적 한계를 벗어나기가 힘든 하급신분층의 불만이 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소시키기 위해 마련된 것이 이른바 중위(重位)이다(→ 중위). 즉 6두품은 제6관등인 아찬까지만 승진할 수 있고 대아찬 이상의 관등을 차지할 수 없게 됨에 따라, 아찬의 관등에 중아찬(重阿飡)에서 사중아찬(四重阿飡)까지 특진의 길을 열어 놓았다.

그리고 5두품이 오를 수 있는 상한 관등인 대나마에 중나마(重奈麻)로부터 9중나마(九重奈麻)까지의 중위를 두었다. 이처럼 신분에 따라 제한된 관등을 넘지 않고도 승진을 계속할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된 이유는, 신라사회가 골품제의 제한에 따른 폐쇄성을 보완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위는 골품제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해결한 것이 아니라 골품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임시방편으로 변통한 것에 불과했다.

신분에 따른 관등 승진의 규제는 관직을 취득하는 데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집사부(執事部)의 장관직인 시중(侍中)이나, 다른 주요 중앙관서의 장관인 영(令)은 대아찬 이상만이 될 수 있었으므로 자연히 진골귀족만이 취임할 수 있었다. 집사부의 차관직인 시랑(侍郞)이나 내성(內省)의 차관직인 경(卿)은 나마 이상 아찬까지, 그밖에 병부(兵部)를 비롯한 다른 관부의 차관직은 급벌찬(級伐飡) 또는 사찬(沙飡) 이상 아찬까지의 관등이면 취임할 수 있었다.

따라서 법적으로는 진골과 6두품은 물론이고 일부의 5두품도 차관직을 차지할 수 있었지만, 실제로 5두품이 차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4두품도 관등상 대사(大舍) 이하의 관직을 차지할 수 있었으나, 실제로는 실무적인 행정업무를 처리하는 사지(舍知)나 사(史)와 같은 관직을 취득하는 데 그쳤다.

6정(六停)을 비롯한 주요 군대지휘관의 경우에도 최고지휘관인 장군(將軍)은 급벌찬 이상이면 될 수 있었으나, 진골에 한한다는 별도의 규정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분에 따른 관직진출의 규제가 매우 심했음을 알 수 있다.

지방관직의 경우 주(州)의 장관인 도독(都督)이나 소경(小京)의 책임자인 사신(仕臣)은 급벌찬 이상이면 가능했던 점으로 보아 진골과 6두품이 이 관직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주의 차관직인 주조(州助)나 군(郡)의 장관직인 태수(太守)에 오를 수 있는 최고관등이 아찬의 중위인 중아찬인 점에서 6두품이 주조나 군태수를 전담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주의 도독이나 소경의 사신은 앞에서 살펴본 장군직과 마찬가지로 6두품을 제외하고 진골만이 취임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밖에 장사(長史)·사대사(仕大舍)·소수(少守)·현령(縣令) 등의 관직은 4두품 이상이면 취임 가능하였다. 그러나 골품제에는 관직에 취임할 수 있는 해당 관등이 일원적으로 규정되지 않고 몇 개의 관등이 복수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이 관등들이 대체로 신분의 등급에 따라 분류된 것으로 보아 신라의 관직은 관등보다는 신분등급에 의해 규제받는 요소가 보다 강했다.

그리고 김유신이 수여받은 태대각간(太大角干)과 같은 관등은 관등제의 최고인 이벌찬보다도 상위에 있었으나, 이는 특수한 예외였다.

골품제의 해체

골품제는 신라가 성장해나가는 과정에서 성립한 역사적 산물이었다. 따라서 신라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골품제도 끊임없이 변화했다. 특히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이 완성된 후 이전의 고구려·백제 영토 및 그 안에 거주하던 사람들도 새로이 신라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고구려·백제의 지배층은 본국에서 갖고 있던 관등의 고하에 따라 신라의 관등을 수여받음으로써 골품제 안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신라 6부의 공동체적 결속이 약화되고 통일전쟁을 수행해감에 따라 경위와 외위를 구분할 필요성이 약화되었다. 따라서 골품제의 직접적인 규제를 받던 왕경인에게만 수여했던 경위는 신라 중고기(中古期)말부터 지방민에게도 주어졌다. 특히 대당(對唐)전쟁을 수행하면서 백제·고구려 유민세력을 포섭하기 위해 그들에게도 경위를 수여하였다.

이리하여 674년(문무왕 14)에는 경위와 외위의 대응관계를 정하고 양자간의 공식적인 교류가 인정됨에 따라 단일 관등체제가 형성되어 외위는 점차 소멸되었다. 이로 인해 전국을 일원적으로 지배하는 체제가 이루어지고, 이 과정에서 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세력과 이전의 골품제적 특권에 의해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귀족세력간의 마찰이 끊임없이 발생하였다. 통일신라기의 사회변화와 경제적 계층분화가 심화됨에 따라 신분제도 동요되었다.

진골과 6두품 등 지배신분층은 크게 변화하지 않았으나, 일반 평민의 경제적·사회적 지위가 성장함에 따라 1~3두품의 구분은 의미를 상실하고 4두품도 평민과 비슷한 처지로 되었다.

그러나 폐쇄적 성격이 강한 골품제는 변화된 사회양상을 모두 수용하지 못하고 이전의 운영원리를 고수하여, 신분제로서의 탄력성을 상실하고 사회변동을 가로막는 장애요인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물론 통일신라기에 국학과 독서3품과를 설치하여 능력에 따른 관리등용을 시도하기는 했지만 신분제의 강한 벽에 막혀 본래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특히 신라 하대에는 지배계층의 분열과 왕위쟁탈전이 심화되면서 지배계층 스스로 골품제의 동요를 초래했다.

그리고 6두품을 중심으로 골품제의 한계에 회의를 가진 계층의 불만이 누적되고, 관직진출을 포기한 채 선종승려나 사상가로 변신한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골품제는 신라 사회를 통제하는 실질적 기능을 상실했다. 그리고 이들 비판적 지식인들의 활동은 신라말·고려초의 사회변동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여기에 신라 하대 국가통제력이 이완되고, 계속된 자연재해와 수취체계의 모순으로 농민생활이 극도로 불안정해짐에 따라 골품제의 사회경제적 기반이 붕괴위기에 처하였다. 신라 하대에 빈번히 발생한 농민반란은 골품제가 더이상 사회통제 기능을 갖지 못하였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골품제는 결국 고려의 성립으로 소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