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골

성골

다른 표기 언어 聖骨

요약 신라시대 골품제에서 왕족만이 속한 가장 높은 신분으로 제28대 진덕여왕을 끝으로 소멸했다.
〈삼국사기〉에서는 시조 혁거세로부터 진덕여왕에 이르기까지의 28명의 왕을 성골이라고 하고 〈삼국유사〉에는 제23대 법흥왕부터 제28대 진덕여왕까지의 시기를 중고라 하고 성골이 왕위를 계승했다고 기록되었다.
최근에는 진평왕이 자신의 왕실을 인도 석가왕실을 그대로 모방하고 스스로의 골품을 불교적으로 성화시키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하여 왕실에서 자신들을 다른 여러 귀족들과 다른 신성한 골족이라고 하여 성골이라고 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신라시대에는 지배층의 신분제도로서 골품제가 존재했는데, 성골은 그 골품 가운데 왕족만이 속한 가장 높은 신분이었다. 그러나 성골은 제28대 진덕여왕을 끝으로 소멸했고 그뒤에는 진골 신분이 왕위를 계승했다. 성골에 관한 기록이 문헌에 따라 약간 다르게 나타나 있어 그 기원이 어느 때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진한 12국의 하나인 사로국에서 출발한 신라는 주변지역을 정복·병합하면서 그 지배층을 수도인 경주에 옮겨 살게 했고, 그들을 포함한 왕경인(王京人)을 하나의 기준·원리에 의해 편제한 신분제도로서 골품제를 마련했기 때문에, 성골의 기원을 골품제가 형성되었던 6세기 초반 이전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런 점에서 시조 혁거세로부터 진덕여왕에 이르기까지의 28명의 왕을 성골이라고 한 〈삼국사기〉 기록보다는 제23대 법흥왕부터 제28대 진덕여왕까지의 시기를 중고(中古)라 하고 성골이 왕위를 계승했다고 한 〈삼국유사〉 기록이 보다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성골 신분의 실체에 대해서는 문헌기록이 매우 소략한 관계로 자세히 알 수 없다. 종전에는 성골이 부모 양쪽 모두가 순수한 왕종(王種)이었던 것에 반해 진골은 그 가운데 어느 한쪽의 한 대(代)라도 왕종이 아닌 혈통이 섞인 것을 구분한 것으로, 성골의 성(聖)은 부모 양쪽의 혈통이 신성하다는 의미에서 취한 것이라고 이해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중고기(中古期) 왕실이 불교의 진종설화(眞種說話)를 채용함으로써 성골신분이 나타났다고 이해하고 있다. 진평왕은 그 자신의 이름을 석가의 아버지 이름을 그대로 따서 백정(伯淨)이라고 하고, 왕비의 이름도 석가의 어머니 이름을 그대로 따서 마야부인이라고 했다. 진평왕의 아우 백반(伯飯)과 국반(國飯) 등의 이름도 각각 정반왕(淨飯王)의 아우 백반과 곡반(斛飯) 등에서 따온 것이었다. 이 진평왕의 왕실은 인도 카빌라국의 석가왕실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었다. 이로써 신라왕실은 불경에 나타나는 찰제리(刹帝利)의 진종설을 그대로 가져다 스스로의 골품을 불교적으로 성화(聖化)시키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왕실은 자신들을 다른 여러 귀족들과 다른 신성한 골족이라고 하여 성골이라고 했던 것으로 본다. 물론 위의 학설이 많이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성골에 관한 결정적인 자료가 발견되지 않는 한 여전히 다른 견해가 존재할 수 있다.→ 골품제도, 진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