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부의 난

정중부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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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고려 초기 문반과 무반은 단일 관계체제 안에 일원적으로 편성되어 양반체제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반이 정치권력과 병마권까지 장악하고 무인들을 천시했다. 그리하여 1170년 8월 대장군 정중부는 이의방·이고와 함께 거사를 일으키기로 모의했다. 이들은 거짓 왕지로 순검군을 모아 왕을 호종한 문관 및 대소신료·환관을 몰살했다. 또한 정중부·이의방·이고 등은 새로이 익양공을 왕으로 세웠다.
이 난으로 무인이 집권하여 군사권은 물론이고 문인의 직능이었던 정치권·행정권까지 독점했으며, 자신들에게 호의적인 문신인 문극겸·이공승·서공 등을 기용하여 국정에 관하여 자문을 구했다. 정중부의 난을 계기로 이로부터 약 1세기 동안 무인정권시대가 지속되었다. 경인년에 일어났다고 해서 '경인의 난'이라고도 한다.

경인년에 일어났다고 해서 '경인의 난'이라고도 한다.

고려 초기 문반과 무반은 모두 1~9품에 이르는 단일 관계체제 안에 일원적으로 편성되어 양반체제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문반이 정치권력을 독점하고 군대를 지휘·통수하는 병마권까지 장악했다. 이에 반해 무반은 귀족정권을 보호하는 호위병의 지위로 떨어지는 등 외면적으로 문반에 비해 경시되고 훨씬 세력이 미약했다. 또한 그러한 정치적 배경 외에 10~11세기 이래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발생되는 부가 대부분 문반귀족층에게 독점되고 있었다. 즉 문반귀족층은 고리대와 토지개간·토지탈점, 대외무역 등을 통하여 부를 축적해갔다.

이러한 사회·경제 상황으로 인해 민의 대규모 유망현상이 일어났으며, 군인들은 군인전조차 문반정권에 탈점되어 불만이 고조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의종은 문신들과 함께 유락으로 세월을 보냄에 따라 정치기강이 문란해지고 국가재정이 낭비되었으며, 백성들로부터의 착취가 가중되었고, 무인들에 대한 천대도 극에 달했다. 그리하여 1170년 8월 무인인 대장군 정중부의종이 문신들과 보현원에 가게 되었을 때 이의방·이고와 함께 거사를 일으키기로 모의했다.

왕이 보현원에 가는 도중 5문 앞에서 시신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무인으로 하여금 오병수박의 놀이를 하게 했는데, 이때 문신 한뢰가 놀이에 이기지 못하고 달아나는 대장군 이소응의 뺨을 때린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정중부는 얼마 전에 김부식(金富軾)의 아들 김돈중(金敦中)이 자신의 수염을 촛불로 태웠던 일을 생각하고는 분노하여, "이소응은 비록 무인이지만 벼슬이 3품인데 어찌 그리 욕을 보일 수 있느냐"며 한뢰를 나무랐다. 그리고 저녁 때 왕의 가마가 보현원에 가까워지자, 이고·이의방과 함께 거짓 왕지로 순검군을 모아 왕을 호종한 한뢰를 비롯한 문관 및 대소신료·환관을 몰살했다.

무인들은 다시 개경으로 군졸을 보내 "문관을 쓴 자는 서리라도 씨를 남기지 말고 모조리 죽여라"는 명을 내렸고 이에 많은 문신이 화를 입었다. 무인들의 무자비한 학살에 당황한 의종은 이고와 이의방을 응양군·용호군의 중랑장에 임명하고, 그밖의 무인들도 상장군은 수사공복야, 대장군은 상장군에 가하여 회유책을 썼다. 그러나 정중부·이의방·이고 등은 왕을 환궁시켜 군기감에 옮기더니, 마침내 거제도로 내쫓고 대신 왕제 익양공 호를 왕으로 세웠다. 그리하여 자신들은 새로 즉위한 명종에 의해 벽상공신으로 봉해지고, 정사를 좌우했다.

이 난으로 많은 문신이 살육되고 대신 무인이 집권하여 군사권은 물론이고 문인의 직능이었던 정치권·행정권까지 독점했으며, 자신들에게 호의적인 문신인 문극겸·이공승·서공 등을 기용하여 국정에 관하여 자문을 구했다. 정중부의 난을 계기로 이로부터 약 1세기 동안 무인정권시대가 지속되었다.→ 무인정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