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종

의종

다른 표기 언어 毅宗 동의어 강과장효대왕, 剛果莊孝大王, 왕현, 王晛, 고려 제18대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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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127(인종 5)
사망 1173(명종 3)
국적 고려, 한국
종교 불교
재위 1146년∼1170년
시호 강과장효대왕(剛果莊孝大王)
능묘 희릉(禧陵)

요약 고려 제 18대 왕이자 인종의 맏아들로 이름은 현, 초명은 철, 자는 일승. 즉위 초부터 계속된 이자겸의 전횡 및 묘청의 난으로 왕실의 권위는 실추되었으며 문신세력이 크게 득세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여진족이 세운 금이 강성해짐으로써 고려의 지위가 크게 위축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려왕조를 중흥시키기 위해 불교나 음양비축설을 강조하는 등 왕실 권위 회복과 왕권 안정을 꾀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실제 정치에 구현되지 못했다. 의종대의 왕권과 문신세력의 갈등은 정치사회적 혼돈을 초래했고, 이는 무인란의 계기가 되었다.

이름은 현(晛). 초명은 철(轍), 자는 일승(日升). 인종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공예태후(恭睿太后)이다.

비는 강릉공 온(江陵公溫)의 딸 장경왕후(莊敬王后)와 참정(參政)을 지낸 최단(崔端)의 딸 장선왕후(莊宣王后)이다. 1143년(인종 21) 태자가 되었으며, 1146년 인종이 죽자 즉위했다. 즉위초부터, 계속되어온 이자겸(李資謙)의 전횡과 반란으로 왕실의 권위가 약화되어 있었고 묘청의 난으로 왕실의 권위는 더욱 실추되었으며, 개경에 기반을 둔 문신세력이 크게 득세하게 되었다. 또한 1147년 서경인(西京人) 이숙(李淑)·유혁(柳赫)·숭황(崇晃) 등의 반역사건, 1148년 개경에서 이심(李深)·지지용(智之用) 등의 왕위를 엿보는 반역음모로 항상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당시 대외적으로는 금과 남송(南宋) 사이에서 미묘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여진족이 세운 금이 더 강성해짐으로써 고려왕실의 국제적 지위도 크게 위축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왕실의 권위 회복과 왕권의 안정이라는 당면과제를 실현해보고자 노력했다. 1148년 현릉(顯陵:太祖陵)과 창릉(昌陵:世祖陵)에 참배했으며, 1154년 서경에 중흥사, 1158년에는 백주에 별궁(別宮)을 창건해 그 명칭을 친히 중흥(重興)이라 한 것 등은 이러한 노력의 표현이었다.

또한 고려왕조를 중흥시키기 위한 이론적 기반을 불교나 음양비축설(陰陽秘祝說) 등에서 구해 문신귀족들의 유교적 가치관을 배척했다. 1170년 서경에 거동해 발표한 신령(新令)에 불교·음양설·선풍(仙風)을 중요시한 것은 이러한 그의 생각을 반영해준다(→ 고려의 불교). 그러나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려는 노력은 실제 정치면에 구현되지는 못했으며, 오히려 재위중 왕권능멸의 풍조와 신변의 위협으로 시달림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부처나 여러 신들에게 의존하여 자신의 생명 안전과 장수를 비는 여러 가지 행사에 몰두하거나, 호화로운 이궁(離宮)과 정자 등을 지어 왕의 위엄을 과시했으며, 각지를 행차하며 현실에 대한 불안감을 달래기도 했다.

의종대의 왕권과 문신세력의 대립·갈등은 정치적·사회적 혼돈을 초래했고, 이는 무인란의 계기가 되었다.

1170년 의종이 보현원에 거동했을 때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이고(李高) 등 무인들이 정변을 일으켰다. 이에 의종은 왕위에서 물러나 거제현(巨濟縣)으로 옮겨지고, 그의 아우인 익양공 호(晧:뒤의 명종)가 즉위했다. 1173년(명종 3) 김보당(金甫當)이 무인정권에 대항해 거병하면서 사람을 보내어 의종을 계림(鷄林:지금의 경주)에 거처하게 했다. 그러나 김보당의 거병이 실패하자 의종은 이의민(李義旼)에게 살해되어 곤원사(坤元寺)의 북쪽 연못에 던져졌다. 능은 희릉(禧陵)이다. 시호는 장효(莊孝)이다.

폐왕성지 (廢王城址)
폐왕성지 (廢王城址)
청자기와 정자
청자기와 정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