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란

무인란

다른 표기 언어 武人亂

요약 고려시대 무인들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고자 일으킨 정변.

고려시대에는 이러한 시도가 몇 차례 있었다.

먼저 1014년(현종 5) 11월 상장군 최질·김훈 등이 정변을 일으키고 일시적으로 정권을 장악한 일이 있었다(김훈·최질의 난). 당시 문신인 장연우·황보유의 등이 관리의 녹봉이 부족하다고 하여 개경군인의 토지(永業田)를 빼앗아 녹봉에 충당하려고 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켰다. 정권을 잡은 이들은 국왕을 부추겨 장연우·황보유의를 제명시키고 귀양보냈으며, 6품 이상의 무인들은 모두 문관의 직책을 겸하게 했다.

또한 관리의 비행을 감찰하고 풍속을 교정하는 어사대(御史臺)를 폐지하고 금오대(金吾臺)를 두었으며, 국가재정과 회계를 담당한 삼사(三司)를 없애고 도정서(都正署)를 두는 등 관제개편도 했다. 그러나 이듬해 3월 국왕이 서경에 행차하면서 정변의 주모자들을 서경에 오게 하여 잔치를 베풀고 그 틈을 타서 모두 제거함으로써 무인들의 집권은 5개월에 그쳤다.

김훈 최질의 난이 있은 지 약 150년이 지난 1170년(의종 24)에 정중부·이의방·이고 등이 다시 정변을 일으키고 문신들을 대량학살하고 정권을 잡았다(정중부의 난). 이 사건을 경인년(庚寅年)에 일어났다고 해서 '경인의 난'이라 하며, '정중부의 난'이라고도 한다.

이 정변이 발생한 지 3년 후인 1173년(명종 3)에 동북면병마사 김보당에 의해 반무인란(反武人亂)의 성격을 띤 거병이 있었는데, 이때 무인들은 경인의 난에 이어서 다시 문신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했다(김보당의 난). 이는 계사년(癸巳年)에 일어났다고 해서 '계사의 난'이라 하며, 김보당이 주모자라 해서 '김보당의 난'이라고도 한다.

고려 중기에 무인정권이 들어서게 한 무인정변은 위의 두 사건으로, 당시에는 이들 두 사건을 경계의 난이라 부르기도 했다.

무인란 발생의 원인은 정치적으로는 고려 전기 이래로 문신우위의 정치에 대한 무인들의 반발 때문에 일어났다. 무인들은 대거란·대여진 전쟁 등을 수행하면서 전공(戰功)을 쌓는 등 자신들의 지위를 꾸준하게 성장시켜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신위주의 폐쇄적인 정치체제 속에서 무인들의 지위향상은 한계가 있었으므로 이에 불만을 품은 무인들이 난을 일으켰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인 원인이고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다음과 같은 사회·경제적인 배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10~11세기 이래 생산력의 발전으로 나타난 사회적 부가 대부분 당시 귀족층에게 독점되었다. 귀족층은 대외무역 등을 통하여 부를 더욱 확대시켜나갔으며, 고리대·토지개간·탈점 등을 통하여 민(民)의 토지를 침탈함으로써 재생산기반을 위협했다. 이에 따라 12세기초 지배층의 침탈에 대한 저항형태의 하나로서 민의 대규모 유망현상이 있었다.

한편 하급 군인들은 군인전조차 제대로 지급받지 못해 군역자체가 고역이었고, 이들의 불만은 크게 고조되었다. 또한 이무렵 지배층 상호간의 갈등으로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등이 발생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에서 무인들이 정변을 일으키고 정권을 잡았다.

먼저 1170년 경인의 난이 전개된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170년 8월 30일 의종이 개경 근교의 보현원(普賢院)에 행차했을 때 정중부 등이 정변을 일으켜 당시 왕의 측근 문관과 환관들을 대부분 살육했다. 이들은 9월 1일 개경에 돌아와서 국왕을 폐위시켜 거제현에 유배했고 태자는 진도현에 유배했다.

그리고 국왕의 동생인 익양공(翼陽公:뒤에 명종)을 왕위에 오르게 했다. 또한 당시 정변의 주역인 정중부·이의방·이고 등은 국가의 중요직을 독점했으며 공신에 책봉되었다. 특히 정중부는 그의 고향 해주와 서해도의 여러 군·현을 승격시켰으며, 이의방은 외향(外鄕)인 김위(金渭)를 현령관(縣令官)으로 승격시켰다. 또한 문신 가운데 그들에게 호의적인 문극겸(文克謙)·이공승(李公升)·서공(徐恭) 등을 기용하여 그들로부터 국정에 관해 자문을 구했다.

계사의 난은 1173년 8월 김보당이 정중부 등을 토벌하고 의종을 다시 옹립하려는 과정에서 발생되었다.

김보당 세력은 서해도와 동북면 등지에서 거병했으며, 거제도에 유배된 의종을 경주로 옮겼다. 그러나 이들은 9월에 진압되었고, 10월에는 의종이 중앙에서 파견된 이의민에 의해 피살되었다. 김보당은 죽음을 당하기 전 문신 중에는 이번 거사에 참여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고 무고했다. 이에 따라 집권자인 무인들은 경인의 난 때 화를 면했던 문신들을 대부분 살육하고 자기들의 집권체제를 굳혀갔다.

이상과 같이 당시 무인란은 무인이 문신을 대량으로 살륙하면서 자신들의 정치권력을 보다 확고하게 하는 과정으로 전개되었다.

1170년과 1173년의 2번에 걸친 정변은 문신 우위의 정치구조를 무너뜨리고 무인들이 정치권력을 독점하는 형태의 정치구조를 정착시켰다. 이러한 정치구조는 정중부·이의민·경대승·최충헌 등으로 이어지는 실력자의 잦은 교체에도 불구하고 약 100여 년 간 지속되었다. 특히 최충헌이 집권한 이후 우(瑀:怡)-항(沆)-의(竩)의 4대 동안의 약 60여 년은 전형적인 무인정권시대였다.→ 무인정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