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당

김보당

다른 표기 언어 金甫當
요약 테이블
출생 미상
사망 1173년(명종 3)
국적 고려, 한국

요약 무인정권을 전복시키고 구귀족정치로 환원하려는 복고적인 정치적 반란을 일으켰다.
무신정권이 성립한 직후인 1171년(명종 1) 우간의가 되었다. 같은 해 9월 의종 때 정치를 문란하게 했던 재상 최윤의, 간의 이원응, 중승 오중정, 이준의, 문극겸 등을 탄핵했다. 그러나 이준의가 순검군을 시켜 간관을 욕보이고, 명종은 오히려 간관을 가두는 등의 행동을 하자 명종에 대한 불신과 집권무인에 대한 불만이 커져가게 되었다. 1173년(명종 3) 간의대부로 동북면병마사로 나가자 병마녹사 이경직, 장순석 등과 모의하여,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정중부·이의방 등을 물리치고, 쫓겨난 의종을 다시 세우고자 동계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정중부가 보낸 이의민·박존위에게 2개월도 못되어 진압되고 말았다. 1170년 무인난 당시에 살아남았던 많은 문신이 이때에 죽임을 당했다. 이를 김보당의 난(또는 계사의 난)이라 한다. 이후 무인들은 스스로 정부의 요직을 독점하고 정권을 잡아 무인정권의 확립을 보게 되었다.

무인정권을 전복시키고 구귀족정치로 환원하려는 복고적인 정치적 반란을 일으켰다. 본관은 영광. 무신정권이 성립한 직후인 1171년(명종 1) 우간의(右諫議)가 되었다. 같은 해 9월 좌간의 김신윤(金莘尹),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이소응(李紹應), 좌사간 이응초(李應招), 우정언(右正言) 최당(崔讜) 등과 더불어 의종 때 정치를 문란하게 했던 재상 최윤의(崔允儀), 간의 이원응(李元膺), 중승(中丞) 오중정(吳中正), 이준의(李俊儀), 문극겸 등을 탄핵했다.

그러나 이준의가 순검군을 시켜 간관을 욕보이고, 명종은 오히려 간관을 가두는 등의 행동을 하자 명종에 대한 불신과 집권무인에 대한 불만이 커져가게 되었다.

1173년(명종 3) 간의대부로 동북면병마사로 나가자 병마녹사(兵馬錄事) 이경직(李敬直), 장순석(張純錫) 등과 모의하여,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 등을 물리치고, 쫓겨난 의종(毅宗)을 다시 세우고자 동계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그리하여 장순석·유인준(柳寅俊)을 남로병마사로, 내시 배윤재(裵允材)를 서해도병마사로 삼아 동시에 군사를 일으켰다. 여기에 동북면지병마사 한언국(韓彦國)도 합세했다. 장순석 등은 거제에 유배되어 있던 의종을 받들고 경주로 나와 웅거했다. 그러나 정중부가 보낸 이의민(李義旼)·박존위(朴存威)에게 2개월도 못되어 진압되고 말았다.

9월에 지병마사 한언국이 붙들려 죽고, 병마사 김보당과 녹사 이경직은 개경에 보내져 이의방 등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장순석과 의종도 경주에서 죽임을 당했다. 김보당은 체포되어 문초를 받던 중에 문신으로서 이 모의에 가담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1170년 무인난 당시에 살아남았던 많은 문신이 이때에 죽임을 당했다.

이를 김보당의 난(또는 계사의 난)이라 한다. 이후 무인들은 스스로 정부의 요직을 독점하고 정권을 잡아 무인정권의 확립을 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