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

전봉준

다른 표기 언어 全琫準 동의어 명숙, 明淑, 영준, 永準, 해몽, 海夢
요약 테이블
출생 1856. 1. 10(음 1855. 12. 3)
사망 1895. 4. 24(음 1895. 3. 30)
국적 조선, 한국
본관 천안(天安)

요약 봉건제도를 타파하려 했던 동학의 지도자. 별명은 '녹두장군'. 전라도의 잔반 출신으로 1890년 동학에 입교하여 1892년 고부지방의 접주로 임명되었으며 동학농민혁명 제1차 농민전쟁 당시 폐정개혁안을 제시하였다. 제2차 농민전쟁에서는 친일적인 개화파정권을 타도하고 전국 차원에서 폐정을 개혁하고자 했다. 그의 변혁 의지는 일본군 의해 좌절당했지만 조선의 봉건제도가 종말에 이르렀음을 실증했고, 민중을 반침략, 반봉건의 방향으로 각성시킴으로써, 이후의 사회변혁운동과 민족해방운동에 원동력이 되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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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출신 및 배경
  2. 금구취당과 고부민란
  3. 제1차 농민전쟁
  4. 집강소의 개혁정치
  5. 제2차 농민전쟁
전봉준 장군 동상
전봉준 장군 동상

조선 말기의 혁명가. 전봉준은 농민대중의 밑으로부터의 힘을 결집하여 봉건제도를 타파하고, 동시에 한국에 침투해 들어오는 일본의 자본주의적 진출을 저지함으로써, 국가의 근대화를 이룩하려 했다. 비록 그의 변혁 의지는 일본의 군사력 앞에서 좌절당하고 말았지만 그가 영도한 동학농민혁명(갑오농민전쟁)은 조선의 봉건제도가 종말에 이르렀음을 실증했고, 민중을 반침략·반봉건의 방향으로 각성시킴으로써, 이후의 사회변혁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진전에 원동력이 되었다.

본관은 천안. 자는 명숙, 호는 해몽. 왜소한 체구 때문에 녹두라 불렸고, 훗날 녹두장군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출신 및 배경

전라도 고창군 당촌리에서 전창혁(全彰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고부군 향교의 장의를 지낸 바 있는 향반이었던 점으로 보아서 몰락양반, 즉 잔반 출신으로 보인다.

정읍 전봉준 유적
정읍 전봉준 유적

아버지도 의협심이 강하여 군수의 학정에 항거, 민소(民訴)를 제기했다가 구속되어 심한 매질을 당한 끝에 장독으로 죽었다고 한다. 5세 때에 한문 공부를 시작하여 13세 때에는 〈백구시 白驅詩〉라는 한시를 짓기도 했다. 그의 20, 30대에 조선사회는 극히 어수선했다. 개항을 계기로 하여 외세는 물밀듯이 밀려들어왔고, 봉건 말기의 위기적 상황은 날이 갈수록 가중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전봉준 역시 나라의 장래에 대해 고민했으며, 그러한 고민의 과정에서 1888년(고종 25) 무렵 손화중(孫和中)과 접촉했다.

1890년 무렵에는 "그의 용무지지로서 동학 교문이 있음을 발견하고", 서장옥(徐璋玉)의 막료인 황하일(黃河一)의 소개로 동학에 입교했다. 뒷날 그는 제2차 재판에서 "동학은 수심하여 충효로써 근본을 삼고 보국안민하려는 것이었다. 동학은 수심경천의 도(道)였다. 때문에 나는 동학을 극히 좋아했다"고 하여 동학에 입교하게 된 동기를 밝혔다.

1892년 무렵에 교주 최시형(崔時亨)에 의하여 고부지방의 접주로 임명되었다. 1893년 2월 무렵 서울로 올라가 대원군을 방문하여 "나의 뜻은 나라와 인민을 위하여 한번 죽고자 하는 바"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로부터 세간에는 전봉준과 대원군 사이에 무슨 밀약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

금구취당과 고부민란

서울에서 내려온 전봉준은 동지를 규합했다. 그 결과 1893년 3월 무렵 전라도 금구현 수류면 원평리에서 한 무리의 동학 농민세력을 형성·영도하게 되었다. 〈동도문변 東徒問辨〉에 의하면 그 세력은 1만여 명으로 무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전봉준(全琫準)
전봉준(全琫準)

이들은 민란의 주체로서, 농민의 입장에서 동학 사상을 일단 수용하여 실천적인 사회사상으로 승화시킨 농민 반대세력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들은 1893년 3월 11일부터 시작되었던 동학의 보은취회에 참가하여 그 집회를 반봉건·반침략의 정치운동으로 기울게 하려고, 3월말경에 보은으로 향했으나, 보은취회가 4월 3일 해산됨에 따라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전봉준은 1893년 11월초 고부 고을 농민 40여 명과 함께 군수인 조병갑(趙秉甲)에게 나아가 그의 학정을 시정할 것을 등소했으나, 전봉준은 일시 구속되고 등소는 거부되었다. 전봉준은 1893년 11월 하순에 최경선(崔景善)·김도삼(金道三) 등 20여 명과 함께 사발통문을 작성하고, 고부성의 점령, 조병갑의 처형, 탐관오리의 처단, 전주성의 점령, 서울로의 진격 등을 내용으로 하는 봉기를 계획했다. 그러나 때마침 조병갑이 익산군수로 이동 발령되어 이 계획은 보류되었다.

1893년 12월 전봉준은 고부 고을 농민 60여 명과 함께 전주의 감영에 가서 감사 김문현(金文鉉)에게 고부의 폐정을 시정해달라고 등소했으나, 모두 쫓겨나고 말았다. 그런데 익산군수로 이동 발령되었던 조병갑이 1894년 1월 9일에 고부군수로 잉임(仍任)되었고, 2일 뒤인 1월 11일에 고부민란이 일어났다.

이 민란은 앞의 사발통문 서명자 20명 중 전봉준·최경선·김도삼·정익서(鄭益西) 등의 사전계획과 준비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전봉준 등이 지도한 농민들은 조병갑의 일련의 악정을 시정하고 읍내에 진을 치고 있다가 1월 17일에는 마항(馬項) 장터로, 2월 25일에는 백산으로 진을 옮겼다.

한편 조정에서는 고부민란 발생의 책임을 물어 조병갑을 체포·국문하라는 처벌을 내리고, 용안현감 박원명(朴源明)을 고부군수로, 장흥부사 이용태(李容泰)를 고부군안핵사로 임명했다. 박원명은 부임 후 회유와 설득에 주력하여 난민은 대부분 해산했는데, 3월 2일 역졸(驛卒) 800여 명을 데리고 고부에 들이닥친 이용태는 갖은 야만적인 노략질을 자행하여 난민을 완전히 해산시켰다.

고부민란은 조병갑의 가렴주구로 인해 소생산자로서의 생활을 위협받게 된 소농·빈농, 장시의 확보와 화폐경제의 발전이 흐려지자 위기를 느낀 소상품생산자들이 자발적으로 지방행정을 시정하기 위하여 봉기한 것이었다. 그러나 고부민란의 지도자인 전봉준은 더 확대된 차원에서 문제를 의식하고 있었다. 전봉준은 일신상으로는 조병갑에게서 별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백성'과 '세상'이라는 더 넓은 지평(地平) 위에서 문제를 의식하고 있었다.

제1차 농민전쟁

고부민란은 해산되었으나 이용태의 야만적 진압으로 전라도 일대의 농민들과 동학 신도들이 크게 분개하자, 전봉준은 국면 전환을 꾀했다. 전봉준은 3월 20일 손화중부대·최경선부대와 합세하여 무장에서 재봉기했다. 이것이 동학농민혁명 제1차 농민전쟁의 시작이었다.

갑오농민전쟁
갑오농민전쟁

그날 탐학 수령을 처벌함으로써 보국안민하겠다는 포고문을 전라도 일대에 배포하고 일제히 봉기할 것을 호소했다. 이에 호응하여 주로 전라도 서해안 지역의 10여 읍에서 많은 농민군이 봉기했다. 전봉준부대는 3월 23일 다시 고부를 점령했고, 25일에는 고창·흥덕·부안·정읍·태인·금구·김제 등지에서 몰려온 약 5,000여 명의 농민군과 함께 백산에서 대회를 열었다.

대회에서 농민군은 제세안민(濟世安民)·축멸왜이(逐滅倭夷)·진멸권귀(盡滅權貴) 등의 4대명의(四大名義)를 발표하고, 대장 전봉준, 총관령 손화중·김개남(金開南), 총참모 김덕명(金德明)·오시영(吳時泳), 영솔장 최경선의 진용을 짰다. 그러나 농민군 전체가 단일한 지휘체계에 의하여 움직여진 것은 아니었다. 몇 개의 지역 농민군으로 나누어지고, 다시 개별 농민군부대로 나누어져서 각 부대장의 지휘에 따라 행동했다. 따라서 전봉준도 형식상으로는 농민군 전체의 총대장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개별 농민군부대의 지도자였다.

3월 26일부터 개별 농민군부대는 전라도 각 지역을 점령하기 위한 전쟁에 돌입했다. 그 목적은 탐학한 수령을 징벌하고 각 고을의 폐정을 시정하는 것이었다. 전봉준부대는 4월 7일 고부의 황토현에서 전라감영군을 격파했고, 4월 23일 장성의 월평촌에서 홍계훈(洪啓薰)이 이끄는 경군을 격파했다. 이어 정읍을 거쳐 4월 27일에는 전주에 입성했다.

전주성 함락에 놀란 조정에서는 4월 28일 청(淸)나라에 차병(借兵)을 요청했고, 이에 청병 3,000여 명이 5월 5일 아산에 상륙했다. 한편 어떻게 해서라도 청과 일전을 벌여 청을 압도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던 일본은 5월 6일 약 4,000여 명의 군대를 인천에 상륙시켰다. 갑자기 조선이 국제분쟁의 무대가 되자 조정과 농민군은 화전(和戰)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교섭 끝에 5월 8일 27개 조목의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에 합의하고 휴전했다.

이 폐정개혁안은 보편적이고도 제도적인 차원에서 여러 가지 폐정을 시정하려는 것으로서, 정치권력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민씨척족정권의 퇴진과 대원군정권의 성립을 요구했고, 봉건 말기적 현상을 시정하려는 반봉건의식, 외국상인의 침투로 말미암은 폐해를 시정하려는 반외세·반침략 의식을 뚜렷하게 나타내고 있었다.

집강소의 개혁정치

농민군은 전주성에서 물러나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무장과 조직은 그대로 유지했다. 전봉준은 5월 11일~18일 순변사 이원회(李元會)와 감사 김학진(金鶴鎭)에게 원정(原情)을 제출하면서 폐정개혁의 실시를 촉구하고, 개혁이 실시되지 않으면 농민군의 무장과 조직을 풀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당시의 민씨척족정권은 그 정치적 기반이 극도로 취약해져서 폐정개혁을 단행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이에 5월 중순경부터 농민군이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여 농민들의 억울한 일을 해결하는 사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에 김학진은 농민군의 집강소를 사실상 인정하고 기존의 감사-수령의 행정질서와의 타협과 공존을 제의했다. 전봉준과 김개남은 집강소 질서의 통일과 안정을 기하기 위하여 6월 15일경에 남원에서 농민군대회를 열고, 각 고을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농민군 중에서 집강을 뽑아 수령의 일을 행하도록 하령했다. 이에 나주를 제외한 전라도의 52개 고을에 집강소가 설치되고 집강소질서가 본격적으로 펼쳐졌다.

6월말 일본이 청일전쟁을 도발하여 성환에서 청군을 격파한 후 공주로 남하할 태세를 보이자 김학진은 전봉준과 김개남에게 편지를 보내 관과 농민군이 타협하고, 함께 민족적 위기를 타개할 것을 제의했다. 이에 전봉준은 7월 6일 전라도의 군정을 자신이 맡고 집강소질서를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대타협을 성립시켰다. 집강소는 형식상 김학진의 예하로 되었지만, 사실상 집강소가 행정의 주도권을 장악했고, 집강소질서가 설분(雪憤) 위주에서 벗어나서 폐정의 제도적 개혁 위주로 바뀌었다.

그 결과 7월 하순에는 폐정개혁건 12개조가 공식적으로 성립되었다. 봉건적 신분제도는 전면적으로 철폐되었고, 봉건적 토지제도는 생산력 발전을 주안점으로 경작능력에 따른 경작 균분 제도에 의하여 크게 개혁되었으며, 반일·반침략의 자세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집강소 개혁정치는 지방자치의 차원에 제한되어 있었으며 국가적 차원에서의 권력문제에까지 확대되지는 못했다.

제2차 농민전쟁

조선의 보호국화를 추진했던 일본은 8월 17일의 평양성전투에서 청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한 뒤, 개화파정권의 요청을 받아들여 농민군 토벌에 발벗고 나섰다. 전봉준은 9월 14일 삼례에서 각지에 반일기의를 호소하고, 항일전쟁을 위한 군비를 준비하여 10월 14일 삼례를 출발, 논산에 둔거하면서 농민군을 널리 모집하여 2만여 명의 병력을 확보했다.

전봉준은 여러 차례 경군과 충청감영군 그리고 충청감사 박제순(朴齊純)에게 항일을 위한 민족연합전선을 제의했으나 모두 거부당했다. 10월 24일 공주로 진격하여 이후 11월 10일까지 약 2,500명의 정부군 및 약 200명의 일본군과 2차례에 걸쳐 처절한 공주 공방전을 전개했으나 결정적으로 패배하여 제2차 농민전쟁은 좌절로 끝나고 말았다. 제2차 농민전쟁에서 전봉준이 목적했던 것은 일본군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친일적인 개화파정권을 타도하며 나아가 '몇 사람의 명망가의 합의법'에 의한 권력기구를 수립함으로써 전국의 차원에서 폐정을 개혁하려는 것이었다.

전봉준은 12월 2일 순창군 피노리에서 체포되어 일본군에게 넘겨져 서울로 압송되었다. 1895년 2월 9일부터 3월 10일까지 법무아문권설재판소에서 5차에 걸쳐 재판을 받은 후 사형을 언도받았고, 3월 30일 손화중·최경선·김덕명·성두한과 함께 처형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