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화중

손화중

다른 표기 언어 孫化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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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61(철종 12), 전북 정읍
사망 1895(고종 32)
국적 조선, 한국

요약 종교인, 동학 지도자. 1880년대 동학에 입도한 뒤 무장에 포교소를 설치하고 포교에 힘썼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전라도 곳곳에 집강소를 세우고 나주와 장성을 중심으로 무장 항쟁에 뛰어들었다. 관군·일본군·민보군의 연합세력에 의해 농민군이 각처에서 패하며 대세가 기울어지자 1894년 12월 농민군을 해산하고 피신했다가 이봉우의 고발로 체포된 뒤 서울로 압송되었다. 1895년 3월 전봉준·김덕명·최경선·성두환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동학의 지도자. 본관은 밀양. 이름은 정식(正植). 자는 화중(化中, 華中), 호는 초산(楚山). 아버지는 호열(浩烈)이고, 어머니는 평강채씨(平康蔡氏)이다.

1880년대 십승지지를 찾아 지리산 청학동에 들어갔다가 동학에 입도한 뒤 고향에 돌아와 포교에 힘썼다. 관헌의 기찰을 피하여 부안·정읍 등지로 거처를 옮기다가 무장에 포교소를 설치했다. 무장에 근거를 둔 손화중포(包)는 세력이 매우 커서 주변 고을까지 이름이 알려졌으며, 선운사 도솔암의 마애불상의 배꼽에서 신라 검단대사(黔丹大師)의 비결을 꺼냈다는 소문으로 더욱 명성이 높아졌다.

고부민란 후 안핵사 이용태가 고부민을 동학교도라는 혐의를 씌워 탄압하자 전봉준이 무장으로 와 처음으로 기포해 고부관아를 점거했는데, 이때 손화중포와 금구 원평의 김덕명포가 가세함으로써 더욱 세력이 커졌다.

전라도 각 군현의 동학접주에게 통문을 보내서 고부 백산에 농민군을 집결시키도록 한 다음 농민전쟁이 본격적으로 확대되어간 1894년 3월 제1차 농민전쟁에서 그는 김개남과 함께 총관령(總管領)을 맡았으며, 전주화약에 이어 전라도 각 군현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농민군이 폐정개혁을 수행해 나갈 때에는 나주·장성을 중심으로 서남부 일대를 통솔했다. 제2차 농민전쟁 때에는 일본군이 남해안 쪽으로 상륙해 올 것에 대비해 북상 농민군에 합류하지 않고 최경선과 같이 나주와 광주 지역을 지켰다.

남접·북접 연합농민군이 공주 공방전에서 패배한 뒤, 그는 나주를 포위하고 수차례 점거를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관군·일본군·민보군 연합세력에 의해 농민군이 각처에서 패배당해 대세가 기울어진 것을 안 그는 1894년 12월 1일 농민군을 해산하고 고창군 부안면 안형리로 피신했다. 1895년 1월 6일 재실지기 이봉우의 고발로 관군에 체포된 뒤 서울로 압송되었다. 1895년 3월 29일 전봉준·김덕명·최경선·성두환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동학농민혁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