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정개혁안

폐정개혁안

다른 표기 언어 弊政改革案

요약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이 제시한 개혁안.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1월 고부지방의 농민들이 수탈에 대항하여 봉기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그후 농민군은 1894년 3월 20일 무장으로 가서 봉기한 이후 4월 23일 장성에서 중앙군의 선발부대를 물리치고, 북상하여 4월 27일(양력 5. 31) 전주성에 입성했다. 전주성에 입성한 후 정부의 요청으로 청군이 조선에 파견되고 이에 대응하여 일본군도 들어오자, 농민군은 5월 7일(양력 6. 10) 정부군과 전주에서 화약을 맺으면서 폐정개혁안을 제시했다.

이때 전봉준이 27개조의 폐정개혁안을 제시했는데, 현재 14개 조항이 전봉준판결선고서에 전해지고 있으며, 내용은 ① 전운소를 혁파할 것, ② 국결(國結)을 가하지 말 것, ③ 보부상의 작폐를 금지시킬 것, ④ 도(道) 안의 환전은 옛 감사가 이미 거두었으므로 민간에게 다시 징수하지 말 것, ⑤ 대동미를 바치기 전에는 각 포구에서 잠상(潛商)들의 쌀 매매를 금지시킬 것, ⑥ 동포전(洞布錢)은 매 호마다 봄·가을 2냥씩으로 정할 것, ⑦ 탐관오리를 파면시킬 것, ⑧ 위로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매관매직을 일삼으며 국권을 농락하는 자들은 모두 쫓아낼 것, ⑨ 관장(官長)이 된 자는 그 관할지역에 묘지를 쓸 수 없게 하며 또한 논도 사지 못하게 할 것, ⑩ 전세(田稅)는 전례에 따를 것, ⑪ 집집에 부과하는 잡역을 줄일 것, ⑫ 포구의 어염세를 혁파할 것, ⑬ 보세(洑稅) 및 궁방전을 폐지할 것, ⑭ 각 고을의 수령들이 민간 소유의 산지에 와서 늑표(勒標)하고 투장(偸葬)하지 못하게 할 것 등이다.

또한 이 당시 농민군이 양호순변사 이원회에게 원정(原情:폐정개혁안) 14개조도 요구했는데. 이는 국내 폐정개혁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① 삼정(三政)을 통편례에 의해 준행(遵行)할 것, ② 진고(賑庫)는 곧 한 도(道) 안의 백성의 피와 땀이니 혁파할 것, ③ 전보(電報)는 민간에게 폐가 많으니 혁파할 것, ④ 연육(沿陸)의 각각 신설 세전은 모두 혁파할 것, ⑤ 환미(還米) 중에 옛 감사가 거두어들인 것은 다시 거두지 못하게 할 것, ⑥ 각 읍의 탐관오리는 모두 파면시킬 것, ⑦ 각 읍에서 관용으로 필요한 물자 밖의 가마련(加磨鍊)은 모두 혁파할 것, ⑧ 각 읍의 각종 창고에 필요한 물품은 시가에 따라 사들이게 할 것, ⑨ 각 읍의 아전임채(衙典任債)는 모두 시행하지 못하게 할 것, ⑩ 각 포구의 미곡무역상은 모두 금지시킬 것, ⑪ 윤선(輪船) 상납 이후에 매 결 당 가마련 쌀이 3~4말에 이르니 곧바로 혁파할 것, ⑫ 각 읍의 진부결(陳浮結)은 영원히 장부에서 뺄 것, ⑬ 각 처의 임방명색(任房名色)은 모두 혁파할 것, ⑭ 궁방의 윤회결(輪回結)은 모두 혁파할 것 등이다.

전주화약으로 많은 농민군이 해산했으나, 정부는 농민군의 요구를 받아들이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에 농민군 지도부는 전라도 53개군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직접개혁에 착수했다. 그후 전라도 감사 김학진이 집강소를 공식적으로 인정함에 따라, 그와 농민군 사이에 폐정개혁 12조항이 합의되었다. 당시 민간서정(民間庶政)을 주도할 때 실시했다는 폐정개혁안 12개 조항은 ① 각 도인과 정부 사이에는 묵은 감정을 씻어버리고 서정(庶政)에 협력할 것, ② 탐관오리의 그 죄목을 조사하여 하나하나 엄징할 것, ③ 횡포한 부호들을 엄징할 것, ④ 불량한 유림과 양반들을 징벌할 것, ⑤ 노비문서는 태워버릴 것, ⑥ 칠반천인(七班賤人)의 대우를 개선하고 백정 머리에 씌우는 평양립(平壤笠)을 벗게 할 것, ⑦ 청춘 과부의 재혼을 허락할 것, ⑧ 무명잡세는 모두 폐지할 것, ⑨ 관리채용은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 위주로 할 것, ⑩ 왜와 내통하는 자는 엄징할 것, ⑪ 공사채를 막론하고 지난 것은 모두 무효로 할 것, ⑫ 토지는 평균으로 분작하게 할 것 등이다.

이 내용은 사회적 측면에서 신분제의 전면적 폐기를 제기했다는 점에서 혁명성을 지니고 있었다. 경제적 측면에서 봉건체제의 기초인 지주전호제의 전면적 폐기까지를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토지의 평균분작을 주장하여 궁극적으로는 농민적 토지소유를 지향하고 있었다.

또한 여기에는 소생산자인 농민이 외국상인의 상권 침해를 저지시키려는 점으로 보아 반침략의 방향도 보인다. 집강소 활동시기에 농민군의 개혁사업이 봉건적 사회체제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지만, 그 밑바탕에는 봉건체제 전반에 걸쳐 변혁의지와 외국 자본주의의 침략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식이 있었다.→ 동학농민혁명, 전주화약, 집강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