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강소

집강소

다른 표기 언어 執綱所

요약 1894년 6월 폐정개혁의 실시를 약속받은 농민군은 해산하였으나 정부는 폐정개혁을 외면하였다. 농민군은 스스로 폐정개혁을 시행하기 위해 산발적으로 집강소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전라도 전역에 집강소가 설치되면서 동학교도가 각 고을의 집강이 되어 지방의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였으며 호위군을 두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집강소가 농민군의 자치적 행정기관으로 확립됨에 따라 농민군은 지역적 차원이지만 자신의 힘으로 자신들의 사회적·경제적 생활질서를 변화시켜나갔다. 이는 농민군의 비약적 성장이자 조선사회의 역사적 전진이라고 할 수 있다.

목차

접기
  1. 설치배경 및 발전
  2. 조직
  3. 폐정의 개혁

설치배경 및 발전

1894년 6월 10일(음력 5. 7) 정부로부터 폐정개혁의 실시를 약속받은 전주화약이 성립되자 농민군은 해산하여 각자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무장은 풀지 않고 순변사(巡邊使) 이원회(李元會)와 전라감사 김학진(金鶴鎭)에게 원정서(原情書)를 보내 폐정개혁의 조속한 실시를 촉구했다.

관군은 농민군이 해산한 며칠 후에 강화병 200명을 남겨두고 대부분 전주에서 철수하여 서울로 돌아갔다. 전라도 지역은 정부의 무장력이 상실되고 사실상 농민군이 장악한 상태였으나 정부에서는 계속 폐정개혁을 외면하고 있었다. 6월 중순경부터 농민군은 스스로 폐정개혁을 시행하기 위해 산발적으로 집강소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6월 하순에는 전라도 지방에 집강소(大都所·都所·大義所·行軍義所 등)가 설치되어 본격적으로 집강소 시기가 시작되었다. 초기의 집강소는 분산적으로 운영되면서 관리·양반·부민의 약탈 등 억울함을 해소하는 기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7월 17일경 전봉준(全琫準)과 김개남(金開南)이 남원에서 농민군 대회를 열어, 각 고을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농민군 중에서 집강을 두어 수령의 일을 행하도록 명령을 내리면서, 집강소는 억울한 일을 해소하는 형태에서 새로운 질서 수립을 위한 행정기관의 성격으로 강화되어갔다. 이러한 성격의 집강소는 나주(羅州)를 제외한 전라도의 모든 지역 52개 고을에 설치되었고, 농민군의 의식·이념도 집강소의 경험이 축적되어감에 따라 점차 성장했다.

조직

집강소가 설치되면서 동학교도가 각 고을의 집강이 되어 지방의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게 되었다.

집강소에는 집행기관으로 서기(書記)·성찰(省察)·집사(執事)·동몽(童夢) 등의 직책이 있었는데, 이들은 집강의 지휘를 받으면서 조세징수 등 행정관련 사무를 처리했다. 의결기관으로는 매 읍에 의사원(議事員) 약간을 두고 이를 통해 정책과 의사결정을 하고 있었다. 한편 집강소에는 농민군의 무력으로 호위군을 두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이 시기에 전라도 농민군은 크게 3개 지역으로 갈라져 있었는데, 전봉준은 수천 명의 동학교도를 거느리고 금구·원평을 중심으로 전라우도를, 김개남은 남원을 근거지로 하여 전라좌도를, 손화중(孫和中)은 광주(光州) 일대를 관할했다.

수령은 형식상의 지위였고, 서리는 동학에 가입해야만 위치를 지킬 수 있었다.

폐정의 개혁

농민군이 집강소를 설치한 것은 폐정을 자신들의 힘으로 개혁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제시한 폐정개혁 요구에는 봉건적인 신분제도의 철폐를 비롯한 정치·경제 제도의 개혁 등 반봉건적인 요구와, 일본세력의 배격, 미곡의 밀무역금지 등 반침략적 요구가 결합되어 있었다. 농민군은 집강소를 설치한 후 탐관오리와 탐학한 부호들을 색출해 징계하고, 양인과 천민의 신분해방을 위해 투쟁했다. 또한 삼정을 개혁하고 고리채를 무효화했으며, 지주의 소작료를 압수하는 등 지주제도 개혁을 지향했다. 한편 방곡령을 실시하고 일본으로의 미곡 유출을 엄격히 금지하는 등 반외세적인 활동도 했다.

집강소 질서하에서의 농민군의 폐정개혁은 봉건제도를 근본적으로 변혁시켰던 것은 아니지만, 이를 통해 봉건적 신분제도를 전면적으로 해체시켰고 정치·경제 면에서의 봉건적 폐단도 개량·개혁할 수 있었다. 집강소가 농민군의 자치적 행정기관으로 확립됨에 따라 농민군은 지역적 차원이지만 자신의 힘으로 자신들의 사회적·경제적 생활질서를 변화시켜나갔는데, 이는 농민군의 비약적 성장이자 조선사회의 역사적 전진이라고 할 수 있다.

동학 집강소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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