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당

자유당

다른 표기 언어 自由黨

요약 1951년 12월에 이승만 대통령 주도로 자신의 집권연장을 위해 창당된 보수정당이다.
정부수립 초기 정당무용론을 주장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 내에서 자신의 지지기반이 약화되자 정국타개를 위해 자유당 창당을 도모했다. 창당과업은 당시 주중국 대사로 있던 이범석에게 맡겨졌으며, 창당에는 원내의 공화민정회, 원외의 국민회, 대한청년단, 대한노동조합총연합회, 대한부인회, 농민조합총연맹 등 핵심적 사회단체가 참여했다. 이승만을 당수로, 이범석을 부당수로 하여 직선제 개헌안 지지를 표명한 원외 자유당 세력은 이범석의 조선민족청년단과 5개 사회단체를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개헌안을 통과시킨 후 이승만은 함태영을 부통령후보로 지명하고 이범석 계를 축출한 후 이기붕을 2인자로 지도체계를 개편했다. 이후 자유당은 사사오입개헌파동 등을 일으키며 이승만의 집권연장을 기도하다가 4.19혁명으로 붕괴되었다.

정부수립 초기 정당무용론을 주장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 내에서 자신의 지지기반이 약화되자 정국타개를 위한 자유당의 창당을 서둘렀다. 즉 야당인 민주국민당(한국민주당의 후신) 주도의 국회에서 직선제로의 개헌이 통과될 가능성이 없었으므로 원외에서 광범위한 관제 민의운동을 일으켜 국회에 압력을 가하는 방법을 채택, 원외 자유당을 지지기반으로 삼은 것이다.

이승만(李承晩)
이승만(李承晩)

창당과업은 당시 주(駐)중국 대사로 있던 이범석에게 맡겨졌으며, 창당준비 당시의 자유당은 원내의 공화민정회 외에도 원외의 국민회·대한청년단·대한노동조합총연합회·대한부인회·농민조합총연맹 등 핵심적 사회단체를 망라했다.

이범석
이범석

1951년 11월 이승만의 재집권을 위한 대통령직선제와 상하 양원제를 골자로 한 개헌안이 국회에 제출되자 찬반양론의 대립 속에 원내파와 원외파로 분열, 하나의 이름으로 2개 정당이 만들어지는 기형적인 형태로 자유당은 창당되었다. 이승만을 당수로, 이범석을 부당수로 하여 직선제 개헌안 지지를 표명한 원외 자유당 세력은 이범석의 조선민족청년단(약칭 족청)과 5개 사회단체를 중심으로 결성되어 이후 자유당의 주류가 되었다.

1952년 이른바 부산정치파동을 통해 원내 자유당은 합동파(삼우장파)와 잔류파로 분리되는 등의 이합집산과정을 통해 결국 원외 자유당에 통합되어 단일 자유당이 출현되었다. 그러나 독자적인 원외 기반을 구축하고 개헌안을 통과시킨 이승만은 대통령선거의 승리를 확신하고 당내 제2인자인 이범석의 족청계를 외면하고 정부통령선거 전에 함태영을 부통령후보로 지명했다.

이러한 족청계에 대한 이승만의 태도는 이범석의 부통령후보 탈락과 함께 당내 결속에 동요를 가져왔고, 자유당의 지도체계는 이기붕을 2인자로 하는 체제로 개편됨과 동시에 이승만에 의한 권위주의적 정당체계로 변모했다. 같은 해 5월 20일 제3대 민의원선거에서 자유당은 114석을 확보하고, 친여적인 무소속의원들을 포섭함으로써 개헌정족수를 상회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국회는 자유당의 전횡에 따라 진행되었다.

이후 초대 대통령에 대한 중임제한을 폐지하고 국무위원불신임권을 삭제한 사사오입개헌파동 등을 일으키며 이승만의 집권연장을 기도하다가 1960년 3·15부정선거로 폭발된 4·19혁명으로 붕괴되었다. 그러나 자유당 출신의 인사들은 5·16군사정변 이후 혁명 주도세력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민주공화국에 대거 입당하여 정계에 재진출하기도 했다.→ 이승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