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석

이범석

다른 표기 언어 李範奭
요약 테이블
출생 1900. 12. 1, 서울
사망 1972
국적 한국
인남(麟男)
철기(鐵驥, 哲琦)

요약 일제강점기에 항일 무장 투쟁에 앞장서서 청산리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정부 수립 후 초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이범석은 경성고등보통학교 3학년 때인 1915년에 여운형을 만났다. 당시 독립운동에 참여할 학생을 물색하기 위하여 잠시 귀국한 여운형을 따라 상하이로 건너갔다. 그 후 중국육군강무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만주로 진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1920년에는 청산리전투에서 김좌진 장군을 도와 활약했다. 이후 소련의 혁명전쟁에 참가했으나 소련의 대일정책에 불만을 품고 북만주로 돌아와 고려혁명군 결사대를 조직했다. 미군정이 광복군을 인정하지 않자 1945년 12월 조선민족청년단을 결성하고 단장이 되었다. 정부수립 후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 내무부장관 등을 지냈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호는 철기. 1915년 경성고등보통학교(경기중학교의 전신) 3학년에 재학중 여운형을 만나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1919년 윈난[雲南]에 있는 중국육군강무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만주로 진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에서 김좌진 장군을 도와 중대장으로 참가하여 활약했다. 이후 소련으로 진출해 1922~25년 소련 합동민족군 연해주 지역 지휘관으로 소련의 혁명전쟁에 참가했으나 소련의 대일정책에 불만을 품고 다시 북만주로 돌아와 고려혁명군 결사대를 조직했다. 1933년 뤄양[洛陽] 군관학교 한국인 장교대장을, 1936년 중국 제3로군 사령관 등을 지냈다. 1941년 한국광복군 참모장과 제2지대장을 겸임했으며, 중국 주재 미사령부와 합동작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1945년 8월 27일 광복군을 거느리고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목적으로 비행기로 여의도까지 왔으나 미군의 거부로 중국으로 다시 돌아갔다가 1946년 6월 광복군 간부들과 함께 귀국했다. 미군정이 임시정부와 마찬가지로 광복군을 인정하지 않자 12월 조선민족청년단을 결성하고 단장이 되었다 1948년 정부수립 후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 1950년 주중대사, 1952년 자유당 부당수 및 내무부장관 등을 지냈다. 1952, 1956년 2번 부통령에 입후보했으나 모두 낙선했다. 1960년 초대 참의원에 당선되었고, 1963년 '국민의 당' 최고위원이 되었다. 1969년 국토통일원 고문을 지냈으며,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저서로 〈우등불〉·〈방랑의 정열〉·〈민족과 청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