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상

윤이상

다른 표기 언어 尹伊桑
요약 테이블
출생 1917. 9. 17, 경남 산청
사망 1995. 11. 3, 독일 베를린
국적 한국/독일

요약 작곡가.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통영에서 자랐다. 1959년 발표한 <피아노를 위한 5개의 소품>과 <7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으로 세계 음악계에서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1967년의 동베를린 간첩단사건으로 인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국제적 항의와 독일정부의 도움으로 인해 석방될 수 있었다. <유동의 꿈>, <나비의 미망인>, <요정의 사랑>, <심청> 등의 오페라 외에도 다수의 교향곡·관현악곡·협주곡·실내악곡을 썼다. 그의 작품은 동양의 정신이 충만한 독특한 색채의 선율로 현대음악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그는 생전에 '현존하는 현대음악의 5대 거장'으로 손꼽혔다.

목차

접기
  1. 생애
    1. 초년기
    2. 청년기
    3. 유학 시절
    4. 동베를린 간첩단사건
    5. 서독으로의 귀화
    6. 말년
  2. 주요 작품 및 평가
윤이상(尹伊桑) 흉상
윤이상(尹伊桑) 흉상

생애

초년기

한국 태생의 작곡가. 시인 윤기현의 3대 독자로 경상남도 산청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통영에서 보냈다. 음악공부를 반대하는 아버지를 피해 17세에 일본으로 유학, 오사카[大阪] 음악원에서 첼로·음악이론·작곡 등을 배웠다.

청년기

1937년 통영으로 돌아온 그는 화양학원의 교사로 있으면서 오페라와 작곡을 독학했으며, 첫 동요집 <목동의 노래>를 발표했다. 1939년에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이케노우치 토모지로우[池內友次郞]에게서 대위법을 배웠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하자 한국으로 돌아왔다. 8·15해방 후에는 부산시립고아원의 소장이 되어 전쟁고아들을 보살피기도 했다.

1948년 통영여자고등학교에서 음악교사로 있었고 1953년 서울에 있는 여러 대학에서 강사로 있으며 작곡과 음악이론을 가르쳤다. 이즈음 가곡과 실내악 등의 작품과 평론을 활발하게 발표했다. 1956년에는 <현악4중주 1번>과 <피아노 트리오>로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는데, 이 수상을 계기로 선진 작곡기법과 음악이론을 배우기 위해 1956년 유럽으로 떠났다.

유학 시절

이후 프랑스국립고등음악원에서 P. 르벨과 T. 오벵, 서베를린음악대학에서 R. 슈바르츠 쉴링, J. 루퍼, B. 블라허에게서 음악이론과 작곡기법을 배웠다. 1959년 네덜란드 빌토벤에서 <피아노를 위한 5개의 소품>이, 다름슈타트 음악제에서 <7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이 초연되어 열광적인 호응을 얻음으로써 그의 이름이 세계 음악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60년 서독 프라이부르크에서 중국·한국의 궁중음악에 대한 라디오 방송을 했고 1962년에는 관현악곡 <바라(婆羅)>가 베를린 라디오 방송관현악단에 의해 초연되었다. 1963년 북한을 방문했고 1965년 서독 하노버에서 <오 연꽃 속의 진주여!>를 초연했다.

동베를린 간첩단사건

그러나 1967년, 1963년 예술적 영감을 얻기 위해 방북했던 일이 중앙정보부에 포착되었고, 한국 중앙정보부는 그를 임의동행 형식으로 체포해 서울로 송환했다(→동베를린 간첩단사건). 이후 유럽으로 건너간 다른 유학생들과 함께 간첩으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1968, 1969년의 2번에 걸쳐 10년이 감형되었다가 동료음악가·교수들의 국제적 항의와 독일정부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감옥에서도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1967)을 작곡하고 그밖에 <율>·<영상> 등을 작곡했다.

서독으로의 귀화

1969년 2월 대통령 특사로 석방된 그는 서독으로 건너가 하노버음악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으며, 2년 뒤인 1971년부터가족들과 함께 서독에 귀화했다. 1971년 뮌헨 올림픽의 문화행사로 위촉받아 작곡한 오페라 <심청>은 그에게 세계적인 작곡가라는 명성을 안겨주었다. 1977년에는 모교인 서베를린예술대학에 정교수로 임명되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의 소식을 접한 그는 이듬해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관현악 작품 <광주여 영원히>를 발표했다.

말년

1988년에는 일본 도쿄에서 민족합동음악축전을 제의했는데, 2년 뒤 1990년 10월 북한을 방문해 분단 이후 최초로 범민족통일음악회를 주도해 남북한 문화교류의 첫장을 열었다. 늘 고국을 그리워했던 그는 복권이 이루어진 1994년 9월, 서울·광주·부산에서 개최된 '윤이상음악제'와 '한국창작오페라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고국을 방문하려 했으나 정부와의 갈등으로 끝내 귀국하지 못했다. 1995년 11월 지병인 당뇨병, 기관지천식, 신부전증이 악화되어 결국 그리던 고향땅을 밟지 못한 채 베를린에서 숨을 거두었다.

주요 작품 및 평가

작품으로는 네편의 오페라 <유동의 꿈>(1965), <나비의 미망인>(1967), <요정의 사랑>(1969), <심청>(1971)와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1958), 플루트를 위한 5개의 <연습곡>(1974) 등의 독주,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1981)과 <교향곡 제1~4번>(1982~85), 성악곡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1986) 등 다수의 협주곡과 실내악곡이 있다. 그의 음악세계는 동양적 직관과 서양적 분석, 한국의 전통음악과 서양음악의 기법이 변증법적 긴장관계로 만나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유럽의 평론가들로부터 '20세기의 중요한 작곡가 56인', '유럽에 현존하는 5대 작곡가', 독일 자아브뤼겐 방송이 선정한 '20세기 100년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작곡가 30인'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힌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