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궁

양궁

다른 표기 언어 archery , 洋弓

요약 양궁은 한국 고유의 활쏘기인 국궁과 구별하기 사용되는 용어이다. 야외에 코스와 표적을 설치하고 활솜씨를 겨루는 것은 '필드 양궁'이라고 한다. 활쏘기가 스포츠로 확립되고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1930년 이후부터였다.
북아메리카에서는 1870년대에 많은 양궁 클럽이 생겨났으며, 1879년에 최초의 양궁대회를 열었다. 1939년에는 사냥, 로빙, 필드 양궁을 촉진시키기 위해 미국 필드 양궁협회가 창설되었다.
남녀 양궁이 올림픽에 고정적으로 정식종목이 된 것은 1972년이다. 국제양궁연맹은 미터법에 따라 거리를 정했고, 1957~85년에는 FITA 더블 라운드를 채택했다. 1985년에 FITA는 양궁을 관중이 즐길 수 있는 스포츠로 개선하기 위해 그랜드 피타 라운드라고 부르는 새로운 라운드를 채택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역사
  3. 영국의 초기 양궁단체
  4. 북아메리카
  5. 국제 양궁대회
  6. 활과 화살의 발달
  7. 장비
  8. 양궁경기
  9. 한국의 양궁

개요

여기서는 양궁(이 말은 한국 고유의 활쏘기인 국궁과 구별하기 위한 용어임) 종목 가운데 과녁을 맞히는 표적 쏘기에 대해서만 설명하고자 한다. 사냥 장면을 상정하여 야외에 코스와 표적을 설치하고 활솜씨를 겨루는 것은 '필드 양궁'이라고 한다(군사 무기로 쓰이는 활과 화살에 대해서는 '활과 화살' 항목 참조, → 쇠뇌).

활은 선사시대부터 오스트레일리아를 제외한 세계 전역에서 주요한 전쟁 및 사냥 무기였다.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에서는 군인만이 아니라 일반인도 오락으로 활쏘기를 즐겼으며, 그리스에서는 오디세우스가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을 물리치기 위해 활쏘기 시합을 벌인 사례도 있다. 그러나 활쏘기가 스포츠로 확립된 것은 활이 군사 무기로서 차츰 쇠퇴하기 시작한 뒤였다.

역사

활 대신 총기가 군사 무기로 쓰이기 시작하자 일반인들도 활을 널리 사용하게 되었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는 활쏘기가 스포츠로 서서히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활쏘기가 무술에서 스포츠로 전환하는 데에도 역시 오랜 세월이 걸렸다. 백년전쟁(1357~1453) 때는 활싸움으로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둔 경우가 많았지만, 아르마다(스페인의 무적함대) 시대인 1588년에는 주에서 소집한 징집병 가운데 2/3가 총으로 무장한 반면, 활로 무장한 군인은 1/3에 불과했다. 그러나 16세기가 거의 다 끝날 때까지는 활이 무기로서의 유용성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 13세기부터 수백 년 동안 영국 군주들은 활과 화살이 신체 단련에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여, 의무적으로 활쏘기 훈련을 했다. 잔디밭에서 나무 공을 굴리는 볼링이나 골프, 축구와 같은 운동은 활쏘기 훈련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이따금 금지되었다. 대부분의 영국 군주들은 활을 잘 쏘았고, 이런 관행은 19세기의 빅토리아 여왕 때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로저 애스컴은 영국 최초의 활쏘기 전문서적인 〈궁술 : 활 쏘는 법 Toxophilus, the Schole of Shooting〉(1545)에서 헨리 8세에게 바치는 헌시를 통해 오락과 운동으로서 활쏘기를 권장했다.

영국의 초기 양궁단체

영국 양궁 클럽
영국 양궁 클럽

1537년에 헨리 8세는 '명예로운 포병대'라는 성 게오르기우스 결사대에 특허장을 주었는데, 이 단체에서는 큰 활과 쇠뇌 및 짧은 총기를 사용했고, 1603, 1633년에 런던의 핀베리필즈를 연습장으로 인가받았다. 궁사들은 핀베리필즈에 많은 과녁을 설치하고, 하나의 표적을 맞히면 다음 표적으로 넘어가는 방식으로 시합을 펼쳤다. 그들의 목표는 골프와 마찬가지로 코스를 한 바퀴 도는 동안 가장 적은 수의 화살을 쏘는 것이었다. 1628년의 설계도에는 164개의 표적이 표시되어 있고, 1737년에는 표적이 21개로 줄어들었지만 그 대신 사격장이 여러 개 마련되었다. 활이 더이상 군사 무기로 쓰이지 않게 된 뒤 핀베리 궁사 클럽은 번영을 누리기 시작해, 1761년경까지 해마다 양궁대회를 주최했다. 그후 핀베리 궁사 클럽의 회원은 차츰 줄어들었고, 1780년에 궁술협회가 창설되자 그 협회에 완전히 흡수되었다. 나중에 조지 4세가 된 영국의 황태자는 1787년에 이 협회 후원자가 되어 왕궁궁술협회를 창설했다. 그는 과녁까지의 거리를 91m·73m·55m로 확정했는데, 지금도 영국 요크 라운드(91m·73m·55m 거리에서 각각 72발·48발·24발의 화살을 쏘는 경기) 남자 선수권대회에서는 이 거리를 채택하고 있다. 그는 또한 황태자 계산법이라고 부르는 점수 계산 방법을 확립했다. 그보다 더 일찍 창설된 단체로는 1676년에 스코틀랜드 여왕의 근위대로 구성된 왕립궁수대가 있었다. 1941년에는 영국의 활쏘기를 총괄하는 기구인 전영궁술협회가 창설되었다. 영국은 19세기에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에 양궁을 수출했지만, 이것이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1930년 이후부터였다.

북아메리카

활은 인디언의 주요한 전쟁 및 사냥 무기였지만, 유럽의 식민지 개척자들이 총기를 들여오자 인디언들도 사냥과 전쟁에 총을 사용하게 되었다. 북아메리카 최초의 궁술단체인 필라델피아 궁사연합은 1828년에 창설되어 1859년까지 활동한 후 1932년에 부활했다. 초기에는 양궁에 필요한 기구를 영국에서 수입했으며 이 운동은 영국과 마찬가지로 상류층과 중산층 사이에서 인기를 얻은 오락이었다(궁사의 성별은 오랫동안 신사와 숙녀로 구분되었음). 1870년대에는 많은 양궁 클럽이 생겨났으며, 1879년에는 8개의 클럽이 연합해 미국양궁협회를 결성하고 그해에 최초의 양궁대회를 열었다. 모리스 톰슨은 〈활쏘기의 매력 The Witchery of Archery〉(1878, 재판 1879)을 출판하여, 활과 화살을 이용한 사냥과 필드 양궁대회를 되살리는 데 이바지했다. 이무렵부터 미국산 활과 화살이 영국 제품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1939년에는 사냥, 로빙, 필드 양궁을 촉진시키기 위해 미국 필드 양궁협회가 창설되었다.

국제 양궁대회

남자양궁은 1900~20년(1912 제외)에 올림픽 대회 종목으로 채택되었고, 여자양궁은 1904, 1908년에 채택되었다. 그후 이 종목은 1972년 올림픽 대회까지 중단되었다가, 1972년에 부활하여 그후 줄곧 정식 종목으로 되었다. 초기의 양궁 종목은 고정되어 있거나 움직이는 새를 쏘는 것으로 영국과 미국의 전통에서 벗어난 양궁의 또다른 측면을 보여주었다. 1900년 파리 올림픽 대회에서 우승한 양궁 선수들 가운데 영어권 국가 출신의 선수는 사냥감 쏘기 종목에서 우승한 오스트레일리아 선수 1명뿐이었다. 1904년 세인트루이스 올림픽 대회 때, 경기자들은 영국의 양궁을 미국식으로 변형한 종목에 출전한 미국 선수들뿐이었다. 1908년 런던 올림픽 대회 때 영국식 양궁 종목에서는 영국 선수가 모두 우승했지만, 대륙식이라는 비영국식 종목만은 프랑스 선수에게 우승을 양보했다. 1920년 안트웨르펜 올림픽 대회에서는 또다시 대륙식으로 종목이 바뀌었고, 우승도 유럽 대륙 선수들이 휩쓸었다. 따라서 1931년에 벨기에·프랑스·폴란드·스웨덴이 국제기구인 국제양궁연맹(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Tir à I'Arc/FITA)을 결성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영국은 1932년, 미국은 1933년, 한국은 1963년 7월 27일에 정식 회원국으로 가입했음). FITA 종목(1972년부터 올림픽 대회에 포함됨)은 미터법에 따라 거리를 정했고, 1957~85년에는 FITA 더블 라운드를 채택했다. 1985년에 FITA는 양궁을 관중이 즐길 수 있는 스포츠로 개선하기 위해 그랜드 피타 라운드라고 부르는 새로운 라운드를 채택했다(→ 피타 라운드). 1933년부터 세계 선수권대회는 제2차 세계대전 때를 제외하고 2년마다 1번씩 열렸다.

양궁(archery)
양궁(archery)

활과 화살의 발달

활

1930년까지 양궁의 역사는 곧 활의 역사였다. 그러나 1개의 주목(朱木)으로 만든 전통적인 이 활은 여러 가지 단점을 갖고 있었다. 이 활은 온도와 습도의 영향을 쉽게 받았고 사용하지 않을 때는 줄을 풀어 두어야 했다. 큰 활을 사용하는 것은 예술과도 같았다. 큰 활 대신 등장한 새로운 활은 얇은 플라스틱과 유리 섬유를 여러 개 겹쳐서 만드는 복합체였고, 온도와 습도 변화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 활을 사용하면 큰 활을 사용할 때보다 평균 30~40%나 높은 점수를 얻었다. 새로운 활은 큰 활보다 화살을 더 멀리까지 쏠 수 있다. 큰 활로는 기껏해야 275m밖에 쏘지 못하지만, 새로운 활의 사정거리는 777m가 넘는다. 이 활의 효율(시위를 힘껏 당겼다가 놓는 순간 화살에 옮겨지는 에너지의 비율)은 큰 활의 2배이고, 화살의 속도는 큰 활이 45m/s인 반면 새 활은 65m/s에 이른다. 오늘날의 합성 활은 터키 활과 모양이 비슷하다. 화살도 역시 새의 깃털 대신 알루미늄 합금이나 유리 섬유관, 플라스틱으로 만들게 되었다. 화살촉은 강철로 제작되었고 활시위에는 나일론이 사용되었다.

장비

양궁
양궁

오늘날 활의 길이는 궁사의 키에 따라 달라지지만, 대체로 167㎝ 정도이다(큰 활의 길이는 원래 궁사의 키와 같았음). 화살의 길이도 역시 56~76㎝로 다양하다. 큰 활의 화살은 길이가 옷감 1야드(90㎝)와 같다고 해서 '피륙 야드'(클로스 야드) 화살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결국 영국의 표준 야드가 되었다. 활의 견인력(화살을 최대한 뒤로 끌어당기는 데 필요한 에너지의 양)은 남자는 14~23㎏, 여자는 9~18㎏으로 다양하다.

궁사들은 대개 허리에 비스듬히 매단 화살통에 화살을 넣고 다닌다. 활시위를 뒤로 잡아당길 때 사용하는 손가락을 보호하기 위해 장갑이나 손가락 보호대를 끼고, 활시위를 놓았을 때 활 쥔 팔이 시위에 스쳐 다치는 것을 막기 위해 활을 쥔 손의 팔뚝 안쪽에 팔 보호대를 낀다(활시위를 당기는 방법에 대해서는 '지중해식 궁술' 항목 참조)(→ 지중해식 궁술).

야외 활터는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평평한 잔디밭에 만드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과녁은 북쪽에 놓고, 남쪽에서 북쪽을 향해 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실내에서 열리는 경기도 있다.

과녁은 대개 밀짚으로 엮은 새끼를 단단히 꼰 다음 점수를 나타내는 동심원(영국식은 5개, FITA 방식은 10개)이 그려진 헝겊을 겉에 씌워서 만드는데, 두께는 약 10㎝, 지름은 약 120㎝이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중심에서 바깥쪽으로 갈수록 9점·7점·5점·1점으로 점수가 낮아지고, FITA 방식은 중심이 10점이고 가장 바깥쪽에 있는 동심원을 맞히면 1점이다. 과녁의 크기는 거리에 따라 달라진다. 양궁이 스포츠로 차츰 인기를 얻게 되면서 양궁에 필요한 보조 장비도 흔히 볼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는 안정 장치(활에서 불쑥 튀어나와 있는 기다란 막대), 회전비행보정기(추가 달려 있는 짧은 막대), 평형추 막대, 렌즈가 없는 활조준기(과녁을 겨냥할 때 사용하는 장치) 등 활에 부착하는 장치들도 포함된다. 이런 장치들이 허용되는 경기를 '자유형'이라 하고, 허용되지 않는 경기를 '베어보'라고 한다.

양궁경기

정해진 거리에서 일정 수의 화살로 과녁을 쏜 다음 점수를 계산하는 경기 방식을 라운드라고 한다. 가장 중요한 라운드의 종류로는 아메리카 라운드, 헤리퍼드 라운드, 내셔널 라운드, 요크 라운드를 들 수 있다. FITA 라운드의 거리는 남자가 90m·70m·50m·30m이고, 여자는 70m·60m, 50m·30m이다. 옛날에는 남녀 모두 정해진 거리에서 라운드당 36발씩의 화살을 쏘는 것이 FITA의 표준 라운드였다. 1930년대부터는 FITA 라운드 방식이 가장 널리 쓰이게 되었다.→ 스포츠 기록 : 양궁, 올림픽 대회

한국의 양궁

양궁이 한국에 도입·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1962년경이며 FITA에 가입한 것은 1963년 7월 27일이다. 대한양궁협회가 창립된 것은 그로부터 20년 뒤인 1983년이다. 그전까지는 전래궁인 국궁의 경기단체인 대한궁도협회 안에서 나란히 발전의 터전을 닦고 있었다. 그뒤 1983년 1월 26일에 대한체육회로부터 국궁·양궁을 분리하도록 종용받아 3월 4일 대한양궁협회가 창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국제대회의 주요성적으로는 1978년 제8회 아시아 경기대회에서 처녀출전한 김진호가 1위를 차지했으며 이듬해 베를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김진호가 금 5개를 따내고 세계기록을 세웠다. 또 1981년의 국제양궁친선 골드 헬멧 경기에서 남녀 단체우승과 여자개인 1, 2, 3위를 석권하고 남자도 2, 4, 6위를 차지했다. 1982년 제1회 아시아-오세아니아 선수권대회에서는 남녀 단체와 개인 부문에서 우승했고 그해 1월 뉴델리 아시아 경기대회에서도 남녀 단체우승으로 세계정상에 다시 서게 되었다. 양궁협회가 궁도협회에서 독립한 것은 바로 이렇게 양궁이 절정기에 이른 때였다.

대한양궁협회 창립과 더불어 재정적인 면에서 원활한 지원체계가 확립되어 1983년 8월의 전미 선수권대회에서 김진호가 개인 1위를 차지했고 김미영이 2위를 하는 성과를 얻어 정상의 위치를 재확인했으나 남자는 5위에 그쳤다. 제23회 올림픽 대회에서는 국제대회에 처음 등장한 서향순이 금메달을 차지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제10회 아시아 경기대회에서는 양궁이 9개의 금메달을 획득함으로써 한국이 종합 2위를 하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제24회 서울 올림픽 대회에서 여자부 단체 1위와 개인 1·2·3위, 남자부 단체 1위와 개인 2위를 차지 했고, 베이징 아시아 경기대회에서는 금메달 4개, 은메달 1개, 동메달 2개를 획득했다.

한마디로 양궁은 1986, 1988년 대회를 통해 세계양궁계에서 선두주자로의 기반을 확고히 했으며 1992년에 있었던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회에서도 금메달 2개, 은메달 2개, 동메달 1개를 따내는 쾌거를 올렸다. 또한 1996년 제26회 애틀랜타 올림픽 대회에서는 금메달 2개, 은메달 1개, 동메달 1개를 따냈으며, 2000년 제27회 시드니 올림픽 대회에서는 금메달 3개, 은메달 1개, 동메달 1개, 2004년 제28회 아테네 올림픽 대회에서는 금메달 3개, 은메달 1개를 따내며 양궁 강국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2008년 제29회 베이징 올림픽 대회에서 단체전 금메달을 수상한 한국 여자 양궁 대표팀
2008년 제29회 베이징 올림픽 대회에서 단체전 금메달을 수상한 한국 여자 양궁 대표팀

2008년 제29회 베이징 올림픽 대회에서는 금메달 2개, 은메달 2개, 동메달 1개를 획득, 메달 집계 1위를 기록했으며, 2012년 제30회 런던 올림픽 대회에서도 금메달 3개, 동메달 1개로 1위를 지켰다. 2016년 제31회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대회에서는 금메달 4개를 모두 획득하고 동메달 1개를 추가해 1위를 수성했으며, 2021년 제32회 도쿄 올림픽 대회에서는 금메달 4개를 획득, 1위 자리를 유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