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스퀴스

애스퀴스

다른 표기 언어 H(erbert) H(enry) Asquith, 1st Earl of Oxford and Asquith
요약 테이블
출생 1852. 9. 12, 잉글랜드 요크셔 모를리
사망 1928. 2. 15, 버크셔 서튼코트니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자유당 출신 총리(1908~16).
Viscount Asquith of Morley라고도 함.

1911년 상원의 권한을 제한하는 의회법(Parliament Act)을 입안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초 2년 동안 영국을 통치했다.

애스퀴스는 조지프 애스퀴스(1860 죽음)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소규모의 모직회사를 경영했으며 열렬한 조합교회주의자였다.

애스퀴스는 1863~70년 권위 있는 옥스퍼드대학교 베일리얼대학의 장학금을 받아 런던 시립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는 1874년 베일리얼대학에서 수여하는 최고의 학술적 영예인 모교의 명예교우가 되었다. 법조인이 되기로 결심한 그는 링컨스인 법학원에 입학하여, 1876년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 이듬해 그는 맨체스터 출신 의사의 딸인 헬렌 멜런드와 결혼하여 4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을 두었다.

그의 변호사업은 초창기에는 힘들었지만, 1883년경 이후부터는 아주 번창했다. 명민한 자유당원이었던 애스퀴스는 1886년 이스트파이프 지역대표 하원의원이 된 후 32년 동안 하원의원으로 재임했다. 그는 하원에 처음 등원했을 때부터 주목을 받았는데, 특히 아일랜드 문제에 대해서 그의 주장을 집중적으로 펼쳤다. 그는 1888년 아일랜드 정치지도자 찰스 스튜어트 파넬이 의회의 승인에 앞서 정치 살인범을 묵과한 죄로 기소당했을 때 그의 법정변호사로 활약하여 명성을 쌓았다.

1892년 글래드스톤은 애스퀴스를 내무장관에 임명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애스퀴스는 1891년 아내를 장티푸스로 잃고 어린 자녀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첫번째 아내가 죽은 지 3년이 못 되어 애스퀴스는 12세나 연하인 마고 테넌트와 결혼하여 사회와 정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녀와의 결혼은 애스퀴스와 그의 첫번째 부인이 생활했던 집에서 사교와 지적 교제를 몰아냈다.

그가 내무장관으로 재임한 3년 동안은 자유당이 전체적으로 불운한 시기였으나, 애스퀴스에게는 행정가 및 논쟁가로서의 명성을 안겨준 시기였다(영국 자유당). 1895년경 그는 자유당의 지도자적인 인물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선거에서 패배한 자유당은 그후 11년 동안 야당으로 남았다. 애스퀴스는 이 시기 동안 변호사로 많은 수입을 올렸으나, 1898년에는 그의 재산이 풍족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에게 제안된 당 지도자직을 거절하고 말았다. 애스퀴스 대신 헨리 캠벨 배너먼이 당 지도자직을 계승했다. 애스퀴스는 외교문제와 대영제국의 통치정책에 따른 여러 문제에 있어 새 지도자와 의견대립을 일으켰다. 그들의 의견충돌은 남아프리카 전쟁기간(1899~1902) 동안 노골적이고 공개적으로 드러났으며, 당시 애스퀴스는 로즈베리 경과 에드워드 그레이 경, R. B. 홀데인과 함께 영국 정부의 팽창주의를 지지하면서 제국주의 정책을 옹호하는 자유연맹을 구성했다.

그러한 분쟁은 전쟁종결 후 일시적으로 무마되었으며, 1906년의 국민투표로 자유당이 승리하자 애스퀴스는 캠벨 배너먼 내각의 재무장관으로 봉직했다.

1908년 4월초 캠벨 배너먼 총리가 사임한 지 며칠 만에 죽자 후임자로 공인되던 애스퀴스가 그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었으며, 9년간 총리직을 맡았다. 그는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를 재무장관으로 임명하고 윈스턴 처칠을 상무장관으로 임명했다.

대내정치에서 그가 직면한 주요문제는 자유당의 개혁정책에 반대를 표명하는 상원의 태도와 자유당 내의 욕구불만에 찬 급진당원들의 지속적인 항명가능성이었으며, 주요대외문제는 점차 증가되어가는 독일과의 해군력 경쟁문제였다(영국 상원). 로이드 조지는 1909년 해군력 증강과 사회복지정책을 골자로 한 그의 '급진적인 예산안'을 실현시키기 위해 정부예산을 늘리려고 애썼으나 그 예산안은 상원에서 부결되었다.

이렇게 되자 애스퀴스는 헌법투쟁을 앞장서서 전개했다. 1910년 그는 상원의 권한을 제한하는 계획안을 공표했으며, 2차례에 걸친 총선 끝에 반개혁파 귀족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한 친개혁파 귀족들을 확보하고 궁지에 몰린 조지 5세에게 그 안을 승인하도록 설득했다. 그결과 1911년 8월 의회법이 법률로 채택되었으며, 이로써 상원의 거부권이 소멸되었다.

1911~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3년 동안 애스퀴스는 총리로서 격무에 시달렸다.

대외적으로는 국제상황이 급격히 악화되었고 대내적으로는 자유당 정부의 부패와 웨일스 소재 영국성공회 교회의 폐쇄(1914), 1914년 내전으로까지 발전한 아일랜드 자치주의자와 아일랜드 통일주의자 간의 분쟁 등이 논쟁을 야기시켰다. 애스퀴스의 정책은 아일랜드의 상황을 거의 호전시킬 수 없었다. 프랑스를 점령한 독일이 대영제국에 재앙을 불러일으키리라는 것을 거의 확신했지만, 그는 독일이 벨기에를 침공하여 영국의 여론을 참전론 쪽으로 기울게 만들 때까지 영국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보류했다.

전쟁중 애스퀴스는 그의 군사전문가들을 신뢰했으며, 전반적으로 서부전선에서의 승리가 제1차 세계대전의 승리의 관건이라고 주장하는 군사전문가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1915년 5월 애스퀴스는 자유당뿐만 아니라 아일랜드 통일당까지도 포함하는 연립내각을 재조직하고, 로이드 조지를 군수물자조달장관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그의 연립내각은 정책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했다. 영국의 다르다넬레스 원정은 실패로 끝났으며, 그 해협의 서쪽지역에서는 독일의 전선 돌파작전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1915년말 애스퀴스는 프랑스 주둔 영국 총사령관으로 존 프렌치 경 대신에 더글러스 헤이그 경을 임명했고, 대영제국의 신인 참모총장으로는 윌리엄 로버트슨 경을 임명했다. 그러나 1916년은 국내와 국외, 양쪽 모두 다른 해보다 더 불행한 해였다. 더블린에서 발생한 부활절 봉기는 심각한 국내의 위기상황을 조성했으며, 솜 전투는 서부전선에서 팽팽한 교착상태를 야기시켰다.

애스퀴스는 장기전을 치른 이후에야 뒤늦게 징병제를 도입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가을이 되자 불만의 기미가 도처에서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애스퀴스는 성가신 언론보도에 휩쓸리게 되었다. 그해 12월 그는 총리직을 사임했으며, 로이드 조지가 그의 뒤를 이었다. 비록 그가 1926년까지 자유당의 정치지도자로 활약했지만, 다시는 총리로 선출되지 못했다.

애스퀴스는 그의 권한 내에서 종종 그의 후계자가 추진하는 정책에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애스퀴스는 1925년 옥스퍼드와 애스퀴스의 백작이라는 귀족작위를 받았으며, 그후 얼마 안 되어 가터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의 말년은 생애 전체를 비교해 볼 때 상대적으로 곤궁했으며, 돈벌이로 〈전쟁의 기원 The Genesis of the War〉(1923)·〈의회 50년사 Fifty Years of Parliament〉(1926)·〈회고와 반성 Memories and Reflections〉(1928) 같은 저명한 책들을 저술했다.

애스퀴스는 유능한 정치가였지만 위대한 정치가는 아니었다. 그는 독창적 재능이나 혁신적 소질을 갖추고 있지 못했으며, 국가위기시에 영국 국민을 납득시키기 위해 필요한 극적 감각도 결여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