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비 극장

애비 극장

다른 표기 언어 Abbey Theatre 동의어 아일랜드 국립극장, National Theatre of Ireland

요약 1904년 더블린에 설립된 극장.

애비 극장(Abbey Theatre)
애비 극장(Abbey Theatre)

이 극장의 모태는 1899년 W. B. 예이츠와 그레고리 부인이 설립하여 아일랜드 시극운동에 힘을 쏟은 아일랜드 문예극장이었다. 1902년 W. G. 페이와 프랭크 J. 페이가 주축이 되어 설립한 아일랜드 국립극협회가 아일랜드 문예극장을 인수함으로써 애비 극장의 기초가 확립되었다. 1903년에 아일랜드 국립극협회는 아일랜드 국립연극협회가 되어 아일랜드의 문예부흥을 주도하는 여러 뛰어난 인물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

여기서 공연되는 작품의 수준은 곧 인정을 받게 되었고, 1904년 영국 여성인 예이츠의 친구 애니 호니먼의 재정적 후원으로 더블린 시 에비가(街)의 낡은 극장이 애비 극장으로 개축되었다. 애비 극장은 그해 12월 문을 열고 예이츠, 그레고리 부인, 그리고 이 두 사람과 공동연출가의 역할을 한 J. M. 싱의 연극이 무대에 올랐다. 창립회원으로는 페이 형제, 아서 싱클레어, 세어라 올구드 등이 있었다.

1907년 1월 26일 애비 극장의 무대에 오른 J. M. 싱의 풍자극 〈서쪽 나라에서 온 멋쟁이 The Playboy of the Western World〉는 아일랜드 농민을 묘사한 부분 때문에 관객들을 크게 격분시켜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1911년 애비 극장의 극단원들은 최초로 미국 순회공연에 들어갔는데, 뉴욕 시와 필라델피아에서 연극이 개막되었을 때 이와 비슷한 항의와 소란이 있었다. 1907~09년은 애비 극장의 시련기였다.

인사이동은 극장 관리에 영향을 미쳤고, 페이 형제가 주력했던 민족주의적인 민속극이 예이츠의 예술적 연극관과 갈등을 빚게 되자 이들은 미국으로 떠나버렸다. 호니먼은 재정 지원을 철회했으며, 극장 관리는 1910년 극작가 겸 연출가인 레녹스 로빈슨이 자리를 맡을 때까지 몇 사람의 손을 거쳤으나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과 1916년에 일어난 아일랜드 혁명으로 극장은 거의 문을 닫았다. 그러나 1924년 영어권에서 최초로 국가보조를 받는 극장이 되자 호전되었다. 극작가 숀 오케이시의 등장은 극장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고, 1923~26년 애비 극장은 그의 작품 3편 〈암살자의 그림자 The Shadow of a Gunman〉·〈주노와 공작 Juno and the Paycock〉·〈쟁기와 별 The Plough and the Stars〉을 무대에 올렸다. 〈쟁기와 별〉은 1916년에 있었던 부활절 봉기를 선동적으로 극화한 것이다. 1950년대초 화재로 극장이 소실되면서 애비 극장은 근처에 있는 퀸스 극장으로 이주했다. 새로운 애비 극장은 전보다 소규모의 실험극장으로 원래 자리에 완공되었다(1966). 애비 극장은 레퍼토리를 넓혀가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아일랜드 연극을 주로 공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