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스 1세

아바스 1세

다른 표기 언어 'Abbas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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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571. 1. 27
사망 1629. 1. 19
국적 페르시아

요약 페르시아의 샤(1588~1629 재위).
별칭은 ⁽Abbās the Great.

오스만과 우즈베크 군대를 페르시아에서 몰아내고 상비군을 만듦으로써 사파위 왕조를 강화했다.

또한 이스파한을 페르시아의 수도로 삼았고 상업과 예술을 육성했다. 그결과 페르시아 예술은 아바스 1세가 재위했던 시기에 아주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

술탄 모하마드 샤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사파위 왕조의 운명에서 결정적 순간인 1588년 10월 왕위에 올랐다. 반(半)소경인 아버지의 허약한 통치력 때문에 투르크멘 부족의 아미르(족장)들은 왕의 권력을 침탈했다. 이들은 왕년에 사파위 왕가를 권좌에 올려놓은 장본인들이었고 여전히 사파위 군대의 중추를 이루고 있었다.

더구나 이들 투르크멘 부족들(사파위 왕조에 지지하는 표시로 두른 붉은 터번 때문에 키질바시[kizilbash:붉은 머리]라고 불렸음) 내부의 파벌 싸움은 페르시아의 국력을 극도로 쇠진하게 만들어 오랜 적대국들인 서쪽의 오스만 투르크족과 동쪽의 우즈베크족들이 페르시아 영토 깊숙이 침략을 감행했다. 그결과 샤 아바스는 2가지 임무에 직면하게 되었다.

하나는 군주의 권위를 회복하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오스만과 우즈베크의 군대를 페르시아 영토에서 쫓아내는 일이었다. 2개의 국경에서 동시에 전쟁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1589~90년에 오스만과 평화조약을 체결했고 그결과 자유로이 우즈베크를 공격할 수 있었다. 이 조약에 따라 페르시아의 서부와 북서쪽의 넓은 지역이 오스만에 양도되었다.

한숨 돌릴 여유가 마련되었지만 아바스는 10년 동안 우즈베크에 대한 본격적인 공격에 착수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이란은 우즈베크와 인도의 무굴 제국에게 더욱 많은 영토를 빼앗겼다.

본격적인 공격이 지연된 것은 아바스가 상비군을 만들려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필요할 때마다 부족 기병대에서 군사를 징발해왔던 사파위의 왕들에게는 새로운 착상이었다. 기존의 부족 기병대는 키질바시의 족장들이 통치하는 각 주의 세입으로 운영되어왔기 때문에 상비군의 창설은 곧바로 예산문제를 야기했다.

아바스는 이 많은 주들을 샤의 직접 통제 아래 둠으로써 이 문제를 짧은 시간 내에 해결했다. 이들 새로운 '왕 직할 주'의 세금은 왕실의 금고로 들어갔다. 이 정책은 불가피하게 키질바시 군대의 감축을 가져왔고 이것은 나라의 군사력을 심각하게 약화시켰다. 새로운 상비군은 조지아인·아르메니아인·체르케스인(아바스 할아버지의 치세 동안 포로로 끌려온 사람들) 및 그들의 후손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이슬람교로 개종한 뒤 군대나 국가의 행정부 또는 왕실에서 일하도록 훈련받았다.

샤 아바스는 이른바 이들 굴람(ghulāms:노예들)이 샤에게 바치는 충성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그가 믿지 못하는 키질바시의 영향력을 상쇄하는 데 이용했다. 굴람들은 곧 고급관리로 부상하여 왕 직할 주의 지방장관으로 임명되었다. 드디어 아바스는 숙적에 대한 공격을 시작할 수 있었다. 1598년 그는 우즈베크에 큰 패배를 안겨주고 호라산의 통치권을 다시 획득했다. 1602년부터 계속된 오스만과의 싸움에서 계속 승리를 거두어 빼앗겼던 영토를 회복했다.

우즈베크인들에게 크게 승리한 뒤 아바스는 수도를 카즈빈에서 이스파한으로 옮겼다.

그의 지도로 이스파한은 곧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변모했다. 그는 이 도시에 많은 모스크와 신학대학교를 세웠고 대상 숙박소와 공중목욕탕을 설치했으며, 대로와 화려한 광장을 만들었다. 샤의 건축열은 이스파한에서 그치지 않았다. 메셰드에 있는 유명한 신전의 수리·확장사업과 카스피 해 해안저습지를 따라 겨울 별궁으로 이어지도록 그가 설계한 유명한 석제(石製) 둑길은 그가 남긴 가장 유명한 업적 중의 하나이다.

외교사절단이 유럽 여러 지역에서 이스파한으로 왔고 상인들은 무역관계를 맺기 위해 찾아왔다. 외국 수도교단들도 이스파한과 그밖의 지역에 수도회를 설립하기 위해 이스파한으로 대표를 보냈다. 모험가였던 앤소니 셜리 경과, 오스만과의 전쟁에서 활약해 샤 궁전의 관리가 되었던 로버트 셜리 경 형제 같은 사람들은 행운을 찾아 이스파한으로 왔다.

샤 아바스의 재위시기에는 상업과 외교 활동이 매우 활발했다.

페르시아 만에서는 포르투갈·네덜란드·영국 사람들이 페르시아 만과 인도양 무역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싸웠다. 아바스의 재위 동안 페르시아 예술은 절정에 달했다. 그의 후원을 받으며 카펫 직조는 주요산업으로 성장하여 아름다운 페르시아 양탄자를 부유한 유럽인들 집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 또다른 흑자수출품은 비할 데 없이 화려한 금란(金3)과 단자(緞子)를 포함한 직물이었으며, 비단의 생산과 판매는 왕실이 독점했다.

채식술(彩飾術)·제본술·제도술에서 아바스 시대의 작품들은 필적할 만한 것이 없을 정도로 출중했다. 회화는 페르시아 역사상 가장 뛰어났다.

아바스 1세에 대한 평가

샤 아바스는 백성들에게 정의와 복지를 보장해주기 위해 열의를 가지고 통치했다. 그는 관리들의 수탈과 착취를 감시하기 위해 보통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 자주 나가곤 했다. 부패한 관리들을 신속히 처벌했으며, 많은 그리스도교 단체들에게 특권을 인정해주는 종교적 관대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아바스의 성격에서 어두운 면은 아들들과 가족들 때문에 형성된 것이었다. 젊었을 때 삼촌 샤 에스마일 2세에 의해 사형당할 뻔했던 경험으로 그는 음모에 대한 병적인 공포에 시달렸다. 본래 아바스는 선조들의 관행에 따라 왕실의 왕자들을 지방 통치자로 임명했으나 왕자들을 지지하는 폭동과 음모가 잇따르자 하렘에 왕자들을 감금하고 오직 여자와 환관들만이 접근할 수 있게 했다.

암살에 대한 편집증적 공포감이 늘어가면서 아바스는 왕실에서 이러한 걱정을 일으키는 사람이면 누구든 사형에 처하거나 장님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한 아들은 사형에 처했고(이 행동에 대해 아바스는 뒤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음) 두 아들은 장님으로 만들었으며, 아버지와 형제들도 장님으로 만들거나 투옥했다. 아바스는 뒤를 이을 만한 상속자가 없이 죽었다.

아바스는 위대한 능력을 가진 군주였다. 한때는 특출한 왕으로 알려지기도 했고 붕괴일로에 있던 사파위 제국을 구해내고 부흥시킨 위대한 통치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업적도 가족에 대한 가혹한 처단과 함께 그가 수행한 개혁 자체 속에 미래의 왕조와 국가 모두가 붕괴하고야 말 씨앗이 담겨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 빛이 바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