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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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일제강점기에 서울에서 발행된 일간신문. 최남선(崔南善)과 진학문(秦學文)이 1922년 9월부터 펴내던 시사주간지 〈동명 東明〉을 1923년 6월 30일에 폐간한 뒤, 같은 해 7월 17일 일간지 발행허가를 얻어 1924년 3월 31일 창간했다. 민족의 단합과 협동을 최우선 목적으로 삼아 활동하며 <조선일보>, <동아일보>와 함께 3대 민간지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 이후 1926년 이상현이 판권을 받아 <중외일보>라는 이름으로 새로 창간했다.

사장 겸 주간은 최남선, 전무이사는 서상호(徐相灝), 편집국장은 진학문, 정치부장은 안재홍(安在鴻), 사회부장은 염상섭(廉想燮) 등이었다.

조간발행으로, 발행소는 경성부 명치정(明治町) 2정목(二丁目)에 있었다. 국한문혼용체를 사용했고, 크기는 대형판 4면으로 1행은 14자, 1단은 124행, 1면은 12단으로 꾸몄다.

민족의 단합과 협동을 첫번째 사명으로 삼았고, 당시 발행되던 신문들과는 달리 1면에 정치기사가 아닌 사회기사를 실었다. 또 1면 머리에 '오늘 일 내일 일'이라는 시평 칼럼을 두고 논설을 중요하게 다루었고, '엉석바지'라는 미국 만화를 특약, 6단폭의 6컷으로 연재했다. 초기의 발행부수가 2만 부에 이르러 당시 〈조선일보〉·〈동아일보〉와 함께 3대 민간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창간 2개월 후 자금사정이 어려워지자 최남선과 진학문은 이전에 〈동명〉을 발행할 때의 빚을 갚아준다는 조건으로 보천교 쪽과 계약을 맺고, 1924년 7월 9일 보천교 쪽에 경영권을 넘겨주어 편집 겸 발행인의 명의가 이성영(李成英)으로 바뀌었다. 이에 대한 사우회(社友會)의 반발과 함께 '사회의 공기이며 민중의 대변기관을 보천교에 팔아넘겼다' 하여 사회 여론이 극도로 나빠지자 7월 10일 휴간에 들어갔다. 보천교 쪽에서는 사회의 반발이 커지자 〈대동신보〉 사장인 박일근 등에게 발행권을 넘겨주려 했으나 여론에 밀려 포기하고, 일단 발행인 이성영은 그대로 두고 최남선을 비롯한 사원들이 사무를 맡아보기로 하여 9월 3일 속간호를 펴냈다. 그러나 한번 흔들리기 시작한 경영권은 안정을 찾지 못하고 1년도 안 된 사이에 사장이 몇 차례 바뀌다가, 1925년 4월 〈동아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이었던 홍명희(洪命熹)를 사장으로 맞아들이고 편집 진용을 가다듬은 뒤 혁신호를 펴냈다. 이때부터 제호의 밑바탕에 그려진 무궁화 모양을 빼고, 다른 신문과 같이 1면에 정치기사를 실었다. 그해 대홍수가 일어나자 이재민돕기 구호품을 모집하고, 학술강연회·전국농구선수권대회·자전거대회 등을 열었다. 같은 해 12월 30일 발행인은 조준호(趙俊鎬), 편집인은 한기악(韓基岳), 인쇄인은 홍성희(洪性熹)로 바꾸고, 1926년 8월 중순까지 발행했다. 사원 전원이 회사를 그만둠에 따라 신문사가 해산되었는데, 정확한 폐간날짜는 알 수 없다. 1926년 9월 18일 이상협이 〈시대일보〉의 판권을 넘겨받아 〈중외일보 中外日報〉라는 이름으로 새 신문을 창간했다.→ 중외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