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슈베르트

프란츠 슈베르트

다른 표기 언어 Franz (Peter) Schub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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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97. 1. 31, 빈 근처 히멜프포르트그룬트
사망 1828. 11. 19
국적 오스트리아

요약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음악을 연결한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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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슈베르트의 초기생애
  2. 슈베르트의 중기생애
  3. 슈베르트의 후기생애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

프란츠 슈베르트는 선율과 화성적 면모가 두드러진 리트(독일 가곡)와 실내악으로 유명하다. 그밖의 장르에 속하는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C장조 교향곡 〈대교향곡 The Great〉(1828), B단조 교향곡 〈미완성 교향곡 Unvollendete〉(1822), 다수의 미사곡, 피아노곡이 있다.

슈베르트의 초기생애

아버지 프란츠 테오도르 슈베르트는 교장이었고, 어머니 엘리자베트의 처녀 때 이름은 비에츠였으며 결혼 당시에는 가정부였다.

슈베르트는 생존한 자식 중 4번째로, 위로 이그나츠·카를·페르디난트 등 3형제가 있었고, 아래로 마리아 테레지아라는 여동생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정직한 인격의 소유자였고 큰 학교를 세웠다. 집안은 음악적 분위기였고, 특히 가족이 현악4중주를 연주할 때면 그가 비올라를 연주했다. 아버지와 형 이그나츠에게 기초적인 음악교육을 받았고, 이후 지역교구교회 오르간 연주자에게 오르간 연주법과 음악이론을 배웠다. 1808년 빈 궁정소년합창단의 단원이 되었고, 장학금으로 빈의 평민을 위한 기숙학교 슈타트콘비크트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빈 궁정 오르간 연주자였던 벤첼 루치츠카와 당시 최고의 명성을 날렸던 작곡가 안토니오 살리에리에게 배웠다. 슈베르트는 학생들로 구성된 관현악단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한 지 얼마 안 되어 악장을 맡게 되었고, 루치츠카가 없을 때에는 지휘를 하기도 했다. 동료 학생들과 합창활동을 했으며, 실내악과 피아노를 연마했다.

동료 학생들의 말에 따르면 슈베르트는 수줍음을 잘 탔으며 초기 작품들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를 꺼려 했다.

초기 작품에는 길이가 긴 〈피아노 2중주를 위한 판타지아 Fantasia for Piano Duet〉와 가곡 1곡, 여러 개의 관현악 서곡, 다양한 실내악, 현악4중주 3곡 등이 포함되어 있고, 아우구스트 폰 코체부에의 대본으로 만든 미완성 오페레타 〈거울 기사 Der Spiegelritter〉도 이 시기에 작곡되었다. 친구들의 격려와 관심으로 수줍음을 극복한 그는 살리에리에게 작품을 가져가 주목을 받게 되었다. 1812년에는 변성기를 맞아 학교를 떠나게 되었지만, 이후에도 3년 이상이나 살리에리에게 개인교습을 받았다.

빈에 있는 교원양성대학에 들어갔고, 1814년 가을에는 아버지가 재직하던 학교의 보조교사로 일하게 되었다. 키가 작아서 군대에 들어가지 못하고, 1818년까지 교사로 있었다.

1813~15년에 작곡한 수많은 곡들은 다양성과 내적 가치에 있어서 주목할 만하다. 이 젊은 천재작곡가의 작품들은 아직 성숙미가 결여되어 있기는 하지만, 양식적 독창성과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다. 현악4중주 5곡 외에 완전한 규모의 미사곡 3곡, 교향곡 3곡이 작곡되었고, 첫 완성작 오페라 〈악마의 별장 Des Teufels Lustschloss〉은 교원양성대학에 있는 동안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그가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인 장르는 가곡이었다. 1814년 10월 19일에 그는 처음으로 괴테의 〈파우스트 Faust〉에 나오는 〈실잣는 그레트헨 Gretchen am Spinnrade〉에 곡을 붙였다. 30번째 가곡인 이 노래를 통해 그는 단숨에 독일 리트에 신기원을 이룰 수 있었다.

이듬해에 그는 140곡 이상의 리트를 작곡했다. 그의 가곡 중에는 미완성이거나 스케치만 남아 있는 곡들이 많아서 그의 창작과정을 엿보게 해준다. 그가 작곡을 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분명히 선율이었고, 선율은 노랫말인 시(詩)에서 비롯되었으며 선율 윤곽에 의해 화성과 조바꿈의 방향이 제시되었다. 또한 그가 중시한 것은 시의 장면(자연 경관, 일상의 친숙한 모습, 신비스러운 장면 등)들에 대한 음악외적인 세부 묘사였고, 이에 따라 그는 물레로 실을 잣는 모습이나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봄의 '현란한 옷' 등과 같은 회화적 이미지를 반주를 통해 묘사했다.

이러한 특성은 1815년에 작곡된 가곡들에서 보다 분명해졌고, 이후의 가곡들도 질적으로 성숙하기는 했지만 초기의 이러한 특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1815년에는 그동안 노력에 비해 빛을 보지 못했던 오페라 작곡에 계속 몰두해 5~12월에 〈4년간의 보초병 근무 Der vierjährige Posten〉·〈페르난도 Fernando〉·〈빌라 벨라의 클라우디네 Claudine von Villa Bella〉·〈살라망카의 친구들 Die Freunde von Salamanka〉 등의 오페라를 발표했다.

당시 창작활동 이외의 외적 활동은 거의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대학시절의 친구들, 특히 요제프 폰 슈파눈은 그에게 따뜻한 우정을 베풀었다. 1814년 슈파눈은 그를 시인 요한 마이어호퍼에게 소개해주었고, 젊고 전도유망한 프란츠 폰 쇼버를 설득하여 슈베르트를 방문하도록 했다. 1815년말 쇼버는 조일렌가세에 있는 학교로 찾아갔고, 그곳에서 서류더미를 들고 교실 앞에 서 있는 슈베르트와 마주쳤다. 쇼버는 누군가의 조언을 열렬히 원하고 있던 젊은 작곡가 슈베르트에게 학교일의 속박에서 벗어나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려는 의욕을 심어주었다.

1816년 봄에 슈베르트는 라이바흐(지금의 슬로베니아 류블랴나)에 있는 한 대학의 음악감독직에 지원했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친구들은 슈베르트의 가곡이 괴테의 관심을 끌도록 노력했고, 1816년 4월에는 바이마르에 있는 괴테에게 그의 시 16편에 곡을 붙인 슈베르트의 가곡집을 보내기도 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1816년 슈베르트는 마침내 쇼버의 설득으로 휴직서를 쓰게 되었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휴직서가 수리되었고, 이후 8개월 동안 슈베르트는 쇼버와 함께 미망인이 된 친구 어머니의 집에서 살았다.

1817년초 쇼버는 바리톤 가수 요한 미하엘 포글을 집에 데려와 슈베르트에게 소개했고, 이 인연을 계기로 포글은 빈의 대저택 살롱에서 슈베르트의 가곡을 불러 사람들의 인기를 얻게 되었다.

슈베르트는 후텐브레너 형제, 작곡가 안젤름, 아마추어 음악가 요제프, 요제프 폰 가이(슈베르트는 가이와 함께 피아노 2중주를 연주했음) 등과도 우정을 나누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로운 시기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고, 1817년 가을 그는 다시 학교로 되돌아가야 했다. 그는 친구들에게 자신을 '실패한' 음악가라고 편지에 썼다.

그러나 그 이전의 2년 동안은 결실이 아주 풍부한 시기로 〈가니메트 Ganymed〉·〈방랑자 Der Wanderer〉, 괴테의 소설인 〈빌헬름 마이스터 Wilhelm Meister〉에 나오는 시에 곡을 붙인 〈하프 연주자의 노래 Harper's Songs〉 등의 가곡을 작곡했을 뿐 아니라 4번 교향곡 C단조 〈비극적 Tragic〉(1816), 오늘날에도 인기를 누리는 5번 교향곡 B♭장조(1816), 4번째 미사곡 C장조(1816) 등을 작곡했다. 1817년은 일련의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하기 시작한 해로 이중 6곡은 쇼버의 집에서 작곡되었고, 그중 대표적인 작품은 7번 E♭장조, 11번 B장조이다.

1818년 여름 적성에 맞지 않았던 교사직을 그만두었다.

그해 봄에는 6번 교향곡 C장조 외에 변변한 작품 하나 쓰지 못했지만, 그러는 동안 그의 이름은 조금씩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작품이 발표된 최초의 공개연주회가 1818년 3월 1일 빈에서 〈이탈리아 서곡 Italian Overture〉 C장조를 연주한 것이 그의 작품이 발표된 최초의 공개연주회였다. 6월에 그는 에스테르하치 백작인 요한의 두 딸에게 음악을 가르치기 위해 헝가리 젤리츠에 있는 가족 여름휴양지에 갔다.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는 당시 아주 의욕에 가득 차 있었던 것 같고, 창작 의욕도 새롭게 불타올라 여름 동안 피아노 2중주 〈프랑스 가곡에 의한 변주곡 E단조 Variations on a French Song in E minor〉, 소나타 B♭장조, 무용곡, 가곡, 〈독일진혼곡 Deutsche Trauermesse〉 등을 완성했다.

슈베르트의 중기생애

헝가리에서 빈으로 돌아온 슈베르트는 마이어호퍼와 방을 같이 쓰게 되었고, 겨울 동안 오페레타 〈쌍둥이 형제 Die Zwillingsbrüder〉를 작곡했다.

포글의 후원을 받기는 했지만 이 오페레타의 공연은 연기되었고, 1819년 6월에 슈베르트와 포글은 오스트리아 북부에 있는 포글의 고향 슈타이어로 여행을 떠났다. 슈베르트는 시골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고, 자신의 음악에 대한 그곳 사람들의 열렬한 반응에 감동을 받았다. 슈타이어에서는 그의 기악곡들 가운데 최초로 널리 알려진 작품들이라 할 수 있는 피아노 소나타 A장조 D. 664(D.는 O. E. 도이치에 의한 작품번호), 피아노와 현을 위한 5중주 〈송어 Die Forelle〉를 작곡했다.

송어(Die Forelle)
송어(Die Forelle)

1819년말에 친구 마이어호퍼의 시와 괴테의 시 〈프로메테우스 Prometheus〉에 곡을 붙이는 일에 몰두했다.

1820년 6월에 〈쌍둥이 형제〉가 빈에서 공연되었다. 포글이 쌍둥이 형제 역을 동시에 맡은 이 공연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이어서 연극 〈마술 하프 Die Zauberharfe〉의 부수음악이 같은 해 8월에 공연되었고, 여기에 포함된 〈로자문데 Rosamunde〉 서곡은 친근하고 아름다운 선율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그는 이제 친구와 후원자에 의한 제한된 영역을 벗어나 보다 넓은 계층의 사람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고 있었다.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존라이트너 가족이 그의 음악에 관심을 가졌고, 특히 존라이트너의 아들인 레오폴트는 슈베르트의 절친한 친구이자 후원자가 되었다. 1820년말에 슈베르트는 〈크바르테트자츠 Quartettsatz〉 C단조를 작곡했는데, 이 곡은 1820년대 중반에 등장하는 위대한 현악4중주들을 예고하는 곡이다. 1820년대말에 나온 그밖의 작품들로는 시편 23절의 가사를 가지고 만든 여성 합창을 위한 모테트와 그해 12월에 작곡을 시작한 괴테의 〈물 위의 정령의 노래 Gesang der Geister über den Wassern〉에 붙인 합창곡이 있다.

이 곡은 더블베이스 반주에 의한 남성 8중주곡(D. 714)으로, 1821년 2월에 완성되었다. 자신의 작품들을 출판하고자 한 슈베르트의 노력은 거의 결실을 거두지 못했지만, 1821년초에 몇몇 친구들이 그의 가곡 〈마왕 Erlkönig〉 출판을 위한 후원운동을 벌였다. 반응은 상당히 좋아 이 곡 외에 〈실잣는 그레트헨〉도 출판할 수 있었고 18개월 후에는 작품 12번까지 출판되기에 이르렀다.

빈에서 슈베르트의 가곡과 춤곡의 인기는 상당하여, 살롱 연주회는 거의 그의 작품 일색이 되었다.

'슈베르티아덴'이라 부른 이 모임은 부유한 상인, 시의원 등의 집에서 열렸다. 하지만 오페라 및 기타 대중연주회에서는 아직도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1821년 8월을 7번 교향곡 E단조, E장조 작곡으로 보냈고, 이 시기의 다른 여러 미완성 작품과 함께 이 작품도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했다. 오페라에서 성공을 하리라는 결심으로 그해 9~10월에 장크트푈텐 지방으로 짧은 휴가를 보내러 갔고, 이곳에서 그의 친구들은 3막 오페라 〈알폰조와 에스트렐라 Alfonso und Estrella〉가 공연될 수 있도록 전력을 기울였다.

이 오페라는 1822년 2월에 완성되었지만 무대에 오르지는 못했다. 1822년 7월 아트첸브루크에서 쇼버와 다른 친구들과 함께 〈나의 꿈 Mein Traum〉이라는 자전적인 기록을 만들었는데, 이 작품에서는 음악 애호가 청년과 아버지의 말다툼을 묘사하고 있다. 1822년 가을에는 위의 오페라 이외에도 미완성 작품인 〈미완성 교향곡 B단조〉를 작곡하기 시작했고, 이 곡은 앞서의 오페라와는 달리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슈베르트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 이 곡은 1822년에 2개 악장과 스케르초 악장 일부만 작곡되었다. 같은 해 11월에는 피아노 환상곡 1곡(자신의 가곡 〈방랑자〉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미사 A♭장조를 완성했다.

1822년경 슈베르트는 성병(매독으로 추정)에 걸려 다음해에는 질병과 싸우며 칩거했지만, 이후에도 거의 끊임없이 곡을 썼다. 1823년 2월에 피아노 소나타 A단조와 빈 극장에서 성공을 거두기 위한 또 한번의 시도로 같은 해 4월에 1막짜리 오페레타 〈모반자들 Die Verschworenen〉(이후 정치검열로 인해 〈내란 Der häusliche Krieg〉으로 제목이 바뀜)을 작곡했다.

그러나 이해에 작곡된 가장 유명한 작품은 슈베르트의 서정성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연가곡집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 Die schöne Müllerin〉이다. 슈베르트는 그해 여름을 잠시 병원에서 보냈고, 입원한 상태에서 그의 가장 야심적인 오페라인 〈피에라브라스 Fierrabras〉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작품의 공연은 빈의 유명한 케른트네르토르 극장 감독에 의해 거절되었다.

1823년에 작곡한 마지막 작품은 12월 빈에서 상연된 연극 〈로자문데〉를 위한 부수음악이었다. 1824년초 몇 달 동안 슈베르트는 또다시 불행을 겪었다. 병이 악화되고 무일푼이 된 그는 좌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동안 현악4중주 A단조, 현악4중주 2번 D단조(그의 가곡 〈죽음과 소녀 Der Tod und das Mädchen〉 주제에 의한 변주곡 악장이 포함됨), 현과 목관을 위한 8중주 F장조를 비롯한 3개의 걸작 실내악곡들을 작곡했다. 1824년 3월 31일 화가 레오폴트에게 보낸 편지에는 당시 그가 얼마나 실의에 빠져 있었는가가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이 편지에서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불운하고 가장 가엾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극도의 경제적 궁핍 속에서 그해 여름에 다시 에스테르하치 가족의 음악 선생이 되었고, 5월에는 젤리츠로 갔다. 또 한번 그의 건강과 의욕은 회복되어, 몇 개의 웅대한 피아노 2중주곡과 피아노 소나타 C장조 〈그랜드 듀오 Grand Duo〉, A♭장조 주제에 의한 변주곡, 〈헝가리 디베르티스망 Divertissement à la hongroise〉 등을 작곡했다.

그의 오페라들은 계속 공연되지 않았지만, 그의 가곡과 파트송들은 이후로도 계속 빈의 대중연주회에서 연주되었다.

악보 출판이 급격하게 늘었고, 그의 경제사정도 만족스러운 것은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 개선되었다. 이 시기에 작곡한 〈호수의 여인 Lady of the Lake〉에는, 한때 인기를 누렸으나 이후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던 〈아베마리아 Ave Maria〉가 포함되어 있다. 기악 작품으로는 피아노 소나타 A단조, D장조(바드가슈타인에서 작곡) 등이 있다. 여름 휴가 동안에는 교향곡 C장조 〈대교향곡〉의 시작 부분을 스케치했다(1828 완성). 젊은 화가 모리츠 폰 슈빈트와 극작가 에두아르트 바우에른펠트가 새 친구가 되어 이 시기에 그와 함께 지낸 동료들이다.

슈베르트의 후기생애

1824년 살리에리가 궁정악장직에서 물러나자 부악장으로 있던 요제프 아이블러가 궁정악장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1826년에 슈베르트는 공석이 된 부악장직에 지원했지만, 영향력 있는 몇 사람의 후원에도 불구하고 실패에 그쳤다. 이후 그는 2년 뒤 죽을 때까지 거의 자포자기 속에서 살았다. 그는 안정된 직업을 가지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고, 오페라 작품들을 무대에 올리려고도 하지 않았다. 슈베르트와 같은 재능있는 사람이 자신의 뛰어난 재능을 알지 못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자신이 천재이며 그것 때문에 사교계에 발을 내딛게 되었다는 생각과 함께 그는 자신이 평범한 가문에서 태어나 평범한 어린시절을 보냈고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자의식으로 그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말수가 적었을 뿐 아니라, 매사에 주저하기도 했다. 그의 생은 거의 전적으로 작곡에 바쳐졌고, 출판업자로부터 받은 돈과 이따금의 교습비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1826년에 작곡한 가곡에는 셰익스피어의 〈들어라, 들어라! 종달새 소리를! Hark! Hark! the lark!〉·〈누가 실비아인가? Who is Silvia?〉에 곡을 붙인 가곡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곡들은 베링의 마을에 잠시 머물면서 작곡한 것이다. 이해 여름과 가을에는 마지막 현악4중주 G장조, 피아노 소나타 G장조, 피아노 트리오 B♭장조의 시작 부분 등 3곡의 훌륭한 기악곡을 작곡했고, 이듬해인 1827년에는 연가곡 〈겨울나그네 Winterreise〉의 처음 12곡을 작곡했다.

1827년 베토벤이 죽자 슈베르트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고, 이러한 사실은 슈베르트의 마지막 기악곡들에 베토벤 음악과 유사한 심오하고 지적인 성질이 발견된다는 점에서도 입증된다. 이러한 곡들 중 특히 피아노 트리오 E♭장조(1827), 피아노 소나타 C단조(1828) 등에는 베토벤의 영향이 엿보이며, 또 한편으로 슈베르트 자신의 강한 개성도 드러나 있다.

1827년 9월 잠시 그라츠로 여행을 했고, 돌아오자마자 피아노 트리오 E♭장조를 작곡했으며 〈겨울나그네〉 2부 작곡을 재개했다. 이 시기에는 또한 〈즉흥곡 Impromptus〉·〈악흥의 한때 Moments musicaux〉 등 피아노 독주곡들을 작곡하기도 했다.

슈베르트의 말년은 일련의 걸작들로 장식되었다. 1828년 초반에 그는 피아노 2중주곡들 중 최고의 걸작인 〈환상곡 F단조 Fantasy in F Minor〉를 작곡했고, 3월에 〈대교향곡〉, 칸타타 〈미리암의 승리의 노래 Miriams Siegesgesang〉을 완성했으며, 6월에는 6번째 미사곡 E♭장조를 작곡했다.

8월에는 가곡으로 돌아와 연가곡집 〈백조의 노래 Schwanengesang〉를 출판했다. 9월과 10월초에는 마지막 3개의 피아노 소나타 C단조, A장조, B♭장조와 현악5중주 C장조(마지막 고전주의 작품)를 완성함으로써 작품활동을 끝맺었다. 슈베르트의 유일한 공공 연주회는 1828년 3월 26일에 있었고, 이것은 연주의 질적·재정적인 면에서 모두 성공적이었다. 돈이 궁했던 슈베르트는 그때서야 처음으로 피아노를 살 수 있게 되었다. 8월말에 그는 형인 페르디난트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의 건강은 1823년에 발병한 병(매독)으로 점점 악화되었고,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작곡을 하여 더욱 몸을 망쳤다.

10월에는 오염된 물을 마시고 장티푸스에 걸렸다. 그는 마지막 날들을 형과 여러 친한 친구들과 함께 보냈다.

슈베르트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음악의 중간에 위치했기 때문에 그의 음악사적 위치는 다소 애매하다. 그러나 그는 최후의 위대한 고전주의 작곡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음악은 주관적 감정의 토로, 시적인 구상, 혁명적 음악어법 등 낭만주의적 특징을 갖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고전주의 악파의 형식적 구도를 틀로 삼고 있다.

그결과 20세기에 와서 슈베르트를 슈만·쇼팽·바그너의 시대보다는 하이든·베토벤·모차르트의 시대에 더 가까운 작곡가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