쇄국정책

쇄국정책

다른 표기 언어 鎖國政策

요약 조선시대 이전까지 외국과 활발하게 교역을 했던 우리나라는 조선시대에 들어 쇄국정책을 고수하며 중국과 일본만의 사대교린 정책을 시행했다. 근대 자본주의 국가로 성장한 영국·프랑스·미국·독일 등은 아시아 각국에 문호 개방을 강요해 왔고, 조선에도 이양선이 출몰하여 위기의식이 고조되었다. 정권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을 철저히 하여 외국과의 교역을 금하는 한편, 안으로는 천주교도들을 탄압해 1866년 병인사옥을 일으켰다. 이때 조선인 신자들뿐 아니라 프랑스인 신부도 처형함에 따라 프랑스 함대가 내침하여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1871년에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 사건으로 미국의 아시아 함대가 침략하여 신미양요가 일어났다. 대원군은 2차례의 양요에서 승리한 뒤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의 결의를 굳게 다졌다.

쇄국정책
쇄국정책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는 외국과 활발한 교역을 맺었으나 조선시대에 와서는 쇄국정책을 고수하여 중국과 일본 두 나라만의 사대교린정책을 시행했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 천주교가 유입되고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이 본격적으로 문호개방을 요구해오자 더욱 완강하게 쇄국정책을 폈다. 19세기 전반에 이미 산업혁명을 완료하고 근대자본주의 국가로 성장한 영국·프랑스·미국·독일 등 서구 열강은 상품시장과 원료공급지를 구하려 군함을 앞세우고 아시아 각국에 문호개방을 강요해왔다.

우선 영국이 1842년 아편전쟁을 일으켜 중국과 강제적인 통상관계를 맺고 이어 1860년에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베이징[北京]을 점령하여 굴욕적인 베이징 조약을 맺었다. 이즈음 조선에도 이양선(異樣船)이 자주 출몰하여 위기의식이 고조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정권을 잡은 대원군은 밖으로 쇄국정책을 더욱 철저히하여 외국과의 교역을 엄금하는 한편 안으로는 천주교도들을 외세를 끌어들이는 앞잡이로 간주하여 가혹한 탄압을 가해 1866년(고종 3) 병인사옥을 일으켰다. 이때 조선인 천주교도들뿐 아니라 프랑스인 신부 9명도 처형함에 따라 프랑스 함대가 내침함으로써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이어 1871년에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 사건으로 베이징에 있던 미국의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가 군함 5척을 끌고 침략하여 신미양요가 일어났다. 대원군은 2차례의 양요를 성공적으로 물리침으로써 외세에 대해 자신감을 갖고 전국에 "서양 오랑캐의 침입에 맞서 싸우지 않는 것은 화평하자는 것이며, 싸우지 않고 화평을 주장하는 자는 매국노이다"라는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쇄국의 결의를 더욱 굳게 다졌다. 이와 같은 쇄국정책은 당시의 세계정세 변화에 대한 대응책도 마련하지 못한 채 위기를 더욱 심화시켰다. 한편 일본은 마침 조선에서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된 틈을 타 1875년 운요 호[雲揚號] 사건을 도발하여 1876년에 강제로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를 체결했다. 이로써 쇄국정책은 종지부를 찍고 조선은 아무런 준비없이 문호를 개방, 세계자본주의 열강 앞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