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세트

다른 표기 언어 Seth

요약 고대 이집트의 신.
Setesh, Setekh, Set라고도 함.

세트
세트

상(上)이집트 제11주(州)의 수호신이다.

세트 숭배의 중심지는 원래 왕조시대 이전 적색 왕관 왕국의 수도(BC 3400경)였던 눕트(그리스어로는 옴보스)였다. 이 지역은 현재 상이집트의 나일 강 서안에 위치한 투크 근처에 해당한다. 세트는 히에라콘폴리스의 파라오들에 의해서(아마도 이집트의 통일과 함께) 제거되었다. 그들의 수호신은 매의 신이자 세트의 적이었던 호루스였다. 아마도 이러한 역사적 사건이 호루스와 세트 사이의 투쟁에 관한 신화의 원천이 되었을 것이다.

세트는 재칼의 몸에 사시(斜視), 뾰족한 귀, 털이 난(이후에는 갈퀴 모양의) 손톱, 길게 휘어지고 뾰죽한 주둥이를 가진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여러 동물들(개미핥기, 영양, 당나귀, 낙타, 아프리카산 여우 페네크, 그레이하운드, 재칼, 아프리카산 쥐 제르보아, 긴주둥이쥐, 오카피, 아프리카산 영양 오릭스, 돼지 또는 멧돼지, 맥 등)이 그의 형태의 부분을 이루고 있는데, 고대 이집트인조차도 정확한 모습을 그려내지 못했던 것으로 보아 아마도 신화적 합성물일 것이다. 원래 세트는 하늘의 신, 사막의 왕, 태풍·무질서·전쟁의 주인이었고, 일반적으로 믿을 수 없는 사기꾼으로 본성이 사악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다루기 위험한 존재였다.

세트 숭배의 변화과정은 이집트의 정치적 운명의 변화뿐 아니라 그에 대한 이집트인의 모순대립적 태도를 반영한다.

제2왕조 동안(BC 2775경~2650경)에 파라오 페리브센은 처음으로 자신을 세트와 동일시하여 자신의 이름을 세케미브로 바꾸었다. 그를 계승한 왕 카세케무이는 호루스와 세트 모두를 동등하게 자기의 칭호로 사용했는데, 이는 이 두 신 사이의 갈등에 대한 신화적 해결을 보여주는 것이다. 힉소스족이 침입하여 통치한 기간(BC 1630경~1523경)에는 삼각주 북동부지역에 있는 그들의 수도 아바리스에서 세트를 숭배했다.

이것은 그들이 세트를 자기들의 신인 바알(가나안의 폭풍의 신)과 동일시한 때문으로 보인다. 신왕국시대(BC 1539~1075)에 세트는 혼란의 주역으로서 이집트의 적에게 불화의 씨를 뿌린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인기가 있었다. 삼각주 북동부지역 출신이었던 라메시드 왕조의 파라오들(BC 1292~1075)은 그를 이집트의 위대한 신들의 하나로 인정했고 자기들의 이름으로 삼았다(세티 1세, 세티 2세, 세트나크트 등). 그리고 적대자인 아페피를 죽이는 레의 보호자로서 세트의 상(像)을 뱃머리에 올려놓았다.

신화들에서 세트는 오시리스의 동생으로 나오는데, 거기에서도 그의 성격은 골칫덩어리로 묘사된다.

그는 어머니 누트의 자궁을 뚫고 나왔으며 여동생이자 아내인 네프티스에게는 충실하지 못한 남편이었고 자기 형을 속여 상자에 가두어서 바다에 던져 죽이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러한 행동이 호루스(고왕국시대 후기에는 그를 오시리스의 아들로 보았음)를 분노하게 했다. 오시리스가 죽은 후 그의 여동생이자 아내인 이시스가 기적적으로 낳게 된 호루스는 세트와 결투를 벌여 아버지의 왕위를 되찾으려고 시도했다. 이 싸움이 라메시드판 〈호루스와 세트의 투쟁 Contendings of Horus and Seth〉의 주제를 이룬다.

이 판은 풍자에서 접근하고 있다. 그러나 플루타르코스가 훨씬 더 음침하게 묘사한 이후의 판에서는 세트가 그리스의 악마 티폰의 화신으로 등장한다.

신왕국시대가 끝난 후 이집트는 제국의 지위와 주권을 잃었고, 오시리스 숭배가 점차 강화됨에 따라 세트는 이집트의 판테온에서 추방되었으며 그의 이름과 신상도 기념물들로부터 제거되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가나안 사람들의 바알 신과 동일시되었던 세트는 이제 동양(주로 이집트를 침입했던 셈족)의 신으로 여겨졌다.

오시리스를 죽인 세트의 행위에 대한 반감은 그와 관련된 민족에 대한 반감으로 전환되어 반셈족주의(anti-Semitism)의 초기 형태로 나타났다. 더이상 호루스와 화해할 수 없게 된 세트를 이집트인들은 악마인 아페피 또는 티폰과 동일하게 취급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