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

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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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집단의 공동목적과 더불어 군사상의 방어 임무를 가지고 축조된 공간.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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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중국의 성곽
  2. 일본의 성곽
  3. 한국의 성곽

성곽은 본래 내성만을 뜻하는 성과 외성을 가리키는 곽의 합성어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성곽은 거주 주체의 일정한 공동 활동공간을 확보하고 그 구조물이 연결성을 갖는 건조물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토성
토성

중국의 성곽

중국의 성곽
중국의 성곽

중국에서 거주지역에 방어시설이 처음 만들어진 시기는 앙소문화기로 보고 있다. 산시 성[陝西省] 시안 시[西安市]의 반포 유적[半坡遺蹟]에는 씨족원들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하여 거주지역 바깥에 토벽과 해자가 조성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이를 이은 신석기 후반 용산문화기 것으로 보이는 직4각형으로 판축된 성벽이 발굴되었는데, 이무렵부터 성곽도시의 건설이 시작된 것으로 간주된다. 또 황허[黃河]의 남안에 소재한 허난 성[河南省] 정저우 유적[鄭州遺蹟]에서는 은허보다 오래된 시대에 축성된 성벽이 발견되었다. 이 정저우성은 궁전구역 외에 귀족에서 서민에 이르는 사람들의 거주구역과 각종의 기물제작소를 포함한 지역에 성벽을 축조해 이루어진다. 이 성은 도성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평지의 하천을 비롯한 자연지형을 방어 용도로 한껏 이용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은나라와 주나라 때는 각지에 성곽이 축조되었는데 모두 읍에 있었다.

특별히 전쟁용으로 축조된 것은 아니지만 외적을 방어하기 쉽게 〈시경〉에 보이는 것과 같이 높은 지대에 자리잡기도 했다. 그런데 춘추전국시대에 접어들어 철기가 실용화되고 그것이 보급·발전됨에 따라 농업을 비롯한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이같은 경제의 발전은 당연히 각국의 영토확대를 촉진시켜 읍제 국가에서 영토적 국가로 변하게 했다. 이는 말할 나위 없이 각국 사이에 군사적 경쟁을 촉진시켰는데, 이에 따라 많은 성곽들이 축조되었다. 이 성읍들은 정치군사적 기능 외에 경제적 기능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성읍의 입지는 교통과 물자의 운반에 편리한 강 근처에 축조되었다.

한나라가 들어선 후 지방행정은 군국제였는데, 성의 구조와 성격은 이전의 시대와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다만 한나라는 북방의 이민족을 방어하기 위해 진나라 때 축조된 만리장성을 수비하고 관리하는 데 각별히 힘을 기울였다. 후한시대에 접어들어 호족들도 성을 쌓게 됨에 따라 중국 고대의 성제가 붕괴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도성으로서 가장 정비된 형태는 북위의 낙양성이다.

낙양성은 시가지가 바둑판 모양으로 정연하게 구획되었고, 외성과 내성 및 궁성이라는 3개의 구조로 정비되었다. 이러한 구조의 성곽 양식은 수나라와 당나라뿐 아니라 우리나라 삼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일본의 성곽

일본에서 성곽의 기원은 고지성집락에서 찾고 있다.

야요이 시대[彌生時代]후기의 일본 열도에는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 해안, 연안지역, 그리고 긴키[近畿] 지역의 산정과 구릉에 군사적 성격이 강한 집락이 형성되었는데, 군사적 긴장관계의 산물로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성곽의 형태는 산에 축조된 고고이시[神籠石]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 축성 연대나 성격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러나 고고이시는 한반도계 주민들의 거주지와 관련을 맺고 있으며 그 토목기술의 수준과 견주어볼 때, 이와 결부짓는 것이 좋다. 그리고 백제가 멸망한 후 서일본 각지에서는 한국식 산성이 많이 축조되었는데, 그것을 지휘한 사람은 백제 출신의 장군들이었다. 즉 신라의 일본 열도 침공에 대비하여 665~70년 북규슈[九州]와 혼슈[本州]의 해안지역에 축조되었는데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일본은 중세에 접어들어 장원경제체제에 맞게 봉건영주의 거처로서의 성곽을 축조했는데, 15~17세기경에 완성되었다. 이 성은 방어기능보다도 영주의 정청으로서, 영지의 치안유지를 위한 권위의 상징으로서의 기능이 보다 중요했다. 그 대표적인 오사카 성은 호화롭고 웅장하여 영주의 위세가 잘 나타나 있다.

한국의 성곽

우리나라의 성곽에 관한 기록으로서는 〈모시 毛詩〉에 보이는 한후의 성이 가장 오래된 듯하며, 위만조선의 도성으로서 왕검성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이러한 성들은 중국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한강 이남지역 초기철기시대의 유적지에서 우리나라 성곽의 기원이 되는 고지성취락이 출현하고 있다. 즉 고지성취락인 양산패총 등에서 방어시설인 호(濠)나 목책의 유구가 확인되고 있다. 그리고 성읍국가의 표지적인 성곽형태인, 평야를 끼고 있는 구릉지대에 목책이나 토성이 축조되고 있다. 이러한 구릉지 토성은 삼한 제국의 통치거점이 되는데 서울의 몽촌토성, 대구의 달성, 경주의 반월성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몽촌토성의 목책
몽촌토성의 목책

구릉지 목책이나 토성은 당시 무기의 발달정도에 비추어볼 때 원거리 가격무기인 화살 따위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차단시켜주는 역할을 했다. 동시에 지배자의 권위를 높여주는 상징적인 기능도 했다. 그러나 무기체계의 발전과 더불어 영역국가인 삼국이 출현함에 따라 기존의 목책이나 토성은 방어력의 취약성을 보이게 되었다. 이에 우리나라 전체면적의 70%가 산지로 되어 있는 지형적인 이점을 이용하여 방어력이 높은 산성이 축조되기 시작했다.

삼국시대에 축조된 산성은 군사적 방어시설인 동시에 지방통치 거점으로 기능하기도 했다. 즉 삼국의 지방행정 조직이 산성을 매개로 한 군관구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성도 축조·정비되었는데 30년 걸려 완성된 고구려의 장안성이 그 대표적인 형태에 속한다. 장안성은 산성과 평지성의 장점을 두루 갖춘 23㎞에 달하는 성곽으로서 북성·내성·중성·외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안성의 성벽은 기초보강공법으로 견고하게 축조되었는데, 방어력을 높이기 위하여 성벽 안팎에 호를 팠다. 그리고 외성 지역에 작은 돌로 포장된 도로시설이 확인되고 있어, 계획적인 도시계획에 의하여 축조되었음을 알려준다.

그밖에 장성도 축조되었는데, 고구려의 천리장성과 신라가 발해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하여 성덕왕 때 축조한 장성, 그리고 왜의 침입에 대비한 관문성이 여기에 해당된다. 고려말과 조선시대에는 산성과는 달리 자연지세를 이용하여 축조한, 대체로 평지의 시가지를 둘러싼 읍성이 축조되었다. 읍성 안에 관청과 민가가 자리잡고 있다. 우리나라 성곽은 기존 성곽의 장점을 모두 흡수한 수원성의 축조로서 일단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성곽은 축성재료에 따라 목책·토성·토석혼축성·석성·전축성으로 나뉜다. 그리고 지형에 따라 크게 고로봉·산봉·사모봉·마안봉으로 나눌 수 있다. 또 산지를 성벽이 둘러싼 모양에 따라 테뫼식·포곡식·복합식으로 나뉜다. 성곽의 시설로는 성문·수원·여장·배수시설·창고시설·암문·옹성·치성·각루(성벽의 모서리를 지키며 성안의 전투를 지휘하는 시설물)·해자(성벽 주변의 땅을 파서 고랑을 내거나 자연하천 등의 장애물을 이용하여 성의 방어력을 증진시키는 시설) 등이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축조시기는 대체로 2월과 7~9월이 많다. 이는 혹한과 무더위를 피하고 농번기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것으로서, 일반적으로 농한기에 국가적 차원에서 축성공사가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