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블레이크

윌리엄 블레이크

다른 표기 언어 William Blake
요약 테이블
출생 1757년 11월 28일, 런던
사망 1827년 8월 12일, 런던
국적 영국

요약 삽화의 발전에 기여한 18~19세기 영국의 시인, 화가, 판화가로 주요 작품은 <무덤 속 예수 위에 떠 있는 천사들>과 <고대의 날들>. 10살 때부터 미술학교에 다니면서 르네상스 시대 대가들의 그림을 판화로 새기면서 독학했다. 왕립 아카데미에서 판화로 삽화를 그려 생활비를 벌었고, 독자적인 수채화 기법을 개발했는데, 이는 이후 그의 독창적인 삽화 시집을 제작하는 중요한 기술의 원형이 되었다. 그의 시집은 오랫동안 동료 미술가들과 시인들에게서만 인정을 받았는데, 예이츠와 엘리엇이 블레이크의 평론을 쓰면서 비로소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가 만든 삽화 시집은 후일 문학적 가치로나 판화의 예술성에서나 진귀한 예술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목차

접기
  1. 블레이크의 초기생애
  2. 순수와 경험의 노래
  3. 블레이크의 초기 이야기체 시
  4. 블레이크의 램버스 시기
  5. 블레이크의 주요 서사시
  6. 블레이크의 말년
  7. 블레이크의 회화
  8. 블레이크의 평가

블레이크의 초기생애

양말제조업자인 아버지의 다섯 자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런던에서 자랐으며, 근처 교외의 페컴라이에서 나무에 있는 천사들을 보았고, 들판에서 선지자 에스겔을 보았다는 등 어렸을 때 체험한 환상을 훗날 시로 표현했다. 화가가 되고 싶어 10세 때인 1767년 스트랜드가에 있는 헨리 파스의 미술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독서를 많이 했으며 르네상스 시대 대가들의 그림을 판화에 새기면서 독학했다. 1772년 판화가 제임스 배사이어 밑에서 일하면서 판화의 기교를 철저히 배웠다.

배사이어는 그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보내 그곳의 조각을 그리게 함으로써 고딕 미술에 대한 관심을 일깨워주었다. 1779년 견습기간이 끝나자 판화부 학생으로 왕립 아카데미에 들어갔다. 당시 교장이던 조슈아 레이놀즈 경을 몹시 싫어한 데다 자신의 재능을 허비하고 있다고 느낀 까닭에 그곳 생활은 순탄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립 아카데미에 다니는 동안 출판되는 책에 판화로 삽화를 그려 생계비를 벌었고, 독자적인 수채화법을 개발하기도 했다. 이무렵 조각가 존 플랙스먼과 화가 토머스 스토서드를 비롯해 뛰어난 젊은 예술가들을 사귀었으며 화가 헨리 푸젤리와도 친분이 있었다. 1782년 8월 18일 가난하고 무식한 소녀 캐서린 보처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그에게 완벽한 동반자가 되어주었다. 플랙스먼의 소개로 앤소니 S.매슈 목사부부를 알게 된 뒤로 한동안 이들이 여는 문학모임에서 관심의 초점이 되기도 했다.

플랙스먼과 매슈는 블레이크의 시집 〈W. B.의 습작시집 Poetical Sketches. By W. B.〉(1783)의 인쇄비를 대주었다. 12~20세 때 쓴 시들로 이루어진 이 시집은 주목할 만한 첫 시집으로서, 그중 몇편은 17세기 이후 영국 시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신선함, 때묻지 않은 상상력, 강렬한 서정성을 담고 있다.

블레이크는 매슈 부부의 집을 점점 찾지 않다가 마침내는 아예 발을 끊었다.

그뒤 그는 1780년대 급진적인 서적판매업자인 자신의 고용주 조지프 존슨의 집에서 모이던 진보적인 사상가들의 무리에 끼게 되었다. 1787년에 〈달에 있는 섬 An Island in the Moon〉이라는 환상적인 산문의 일부를 썼는데, 여기서 그 사상가들을 풍자했다. 아버지가 죽은 뒤 1784년 런던에 인쇄소를 차리고 남동생 로버트를 조수 겸 제자로 삼아 함께 살았다. 로버트는 1787년초 병이 나 2월에 죽었다.

동생을 극진하게 간호했던 블레이크는 로버트의 영혼이 기쁨에 차서 천장을 뚫고 날아올라가는 것을 보았다고 뒷날 말했다. 또 로버트의 혼이 자기 앞에 나타나서 인쇄업자에게 맡기지 않고도 책의 본문과 삽화를 새기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고도 말했다. 이 방법은 블레이크가 고안해낸 '채색 인쇄'로 양각 부식이라는 특수한 방법을 이용하여 본문과 그림 모두가 새겨진 활자판에서 책을 한 페이지씩 단색으로 찍어내는 것이다(철판인쇄). 이 방법은 그의 친구 조지 컴벌런드가 앞서 시도한 바 있었다.

그 다음에는 블레이크가 아내와 함께 각 페이지에 수채물감으로 채색을 하거나 물감을 섞어 인쇄를 하고, 종이표지를 씌워 제본한 뒤 2~3실링가량 받고 팔았다. 〈W.B.의 습작시집〉 뒤에 나온 대부분의 작품은 판화로 새겨 이런 식으로 출판되었기 때문에 독자 수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동적인 디자인과 불타는 듯한 색깔로 된 이 '삽화 시집'은 세계적으로 진귀한 예술품에 속한다.

블레이크가 독창적인 새 인쇄법을 처음으로 사용한 책은 1788년경에 인쇄한 〈자연종교란 없다 There is No Natural Religion〉·〈모든 종교는 하나다 All Reli- gions are One〉라는 작은 책자이다.

이 2권 속에 그뒤에 펼쳐질 사상의 원형이 모두 들어 있다. 그는 당시 정설로 받아들여지던 인간의 정신에 대한 로크의 이론과 널리 퍼져 있던 합리주의·물질주의 철학에 과감히 도전했고, '무한한 존재', 즉 신을 인식하는 수단인 상상력이 다른 '인지기관'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이 소책자가 나온 바로 뒤에 창의력이 놀랄 만큼 발휘된 첫 걸작들을 발표했다. 〈순수의 노래〉(1789)·〈셀의 서 The Book of Thel〉(1789)·〈프랑스 혁명 The French Revolution〉(1791)·〈천국과 지옥의 결혼 The Marriage of Heaven and Hell〉(1793)·〈앨비언의 딸들이 본 환상 Visions of the Daughters of Albion〉(1793)·〈순수와 경험의 노래 Songs of Innocence and Experience〉(1794) 등의 작품이다.

이 작품들을 쓴 시기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때와 우연히 일치했는데, 블레이크는 존슨의 가게에서 모이던 다른 회원들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혁명을 열렬히 지지했다. 그러나 블레이크는 이신론·무신론·물질주의를 싫어했고, 교리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깊은 신앙심을 지닌 점에서 다른 영국 혁명주의자들과 상당히 달랐다.

순수와 경험의 노래

〈순수의 노래〉는 채색 인쇄로 된 첫 걸작이다. 이 시집은 연약하고 아름다운 서정시와 섬세하고 미묘한 장정이 조화를 이루어 목가시풍을 따온 〈W.B.의 습작시집〉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순수의 노래〉에서 블레이크는 대중적인 민요와 당시 불려지던 동요를 본보기로 그것을 영어로 된 가장 순수한 서정시로 바꿔놓았다.

1794년 〈순수의 노래〉에 〈경험의 노래〉를 덧붙여 약간 손질한 개정판을 완성했는데, 부제에 스스로 밝혔듯이 이 시집은 인간의 영혼이 지닌 두 상반된 상태를 보여준다.

'두 상반된 상태'란 어린아이의 상상력이 자기 성장을 완성시키는 기능만을 할 때의 순수와, 법·도덕·억압의 세계와 맞닥뜨렸을 때의 경험을 가리킨다. 〈경험의 노래〉는 〈순수의 노래〉에 대해 일종의 반어적인 대답을 제공한다. 너그러운 신을 찬미한 〈순수의 노래〉와는 반대로 〈경험의 노래〉에서는 전제적·억압적인 신의 이미지가 나온다. 〈순수의 노래〉에서는 주된 상징이 양(羊)인 데 비해 〈경험의 노래〉에서는 호랑이이다. 호랑이는 블레이크의 서정시 가운데 최고 걸작인 다음과 같은 유명한 시의 주제이다.

"호랑아! 호랑아! 이글이글 불타는구나/캄캄한 밤 숲속에서/어떤 신의 손 혹은 눈이/네 무시무시한 형상을 빚어낼 수 있었는지?"

이 시 속의 호랑이는 힘·강인함·욕정·잔인함의 화신이며, "양을 만드신 그분이 너도 만들었느냐?"라는 마지막 질문 속에 인간의 비극적인 딜레마가 잘 함축되어 있다. 〈순수의 노래〉에서 도시를 행복한 시각으로 본 것과는 달리 〈경험의 노래〉에서는 당시의 런던 같은 대도시를 회의적으로 보았다. 〈경험의 노래〉에 실린 뛰어난 시 〈런던 London〉은 새롭게 나타나기 시작한 "무엇이든 손에 넣으려는 사회" 풍조를 강력히 비난했다.

이 시에서 사용된 매우 단순한 언어는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 대한 블레이크의 우려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블레이크의 초기 이야기체 시

블레이크는 서정시뿐만 아니라 이야기체 시도 실험했다. 첫 시도인 〈티리얼 Tiriel〉은 끝내 인쇄하지 않았다. 아름답고 매끈한 장정이 돋보이는 〈셀의 서〉는 꽃같이 섬세하고 투명한 점에서 〈순수의 노래〉와 닮은 목가시이다.

〈티리얼〉·〈셀의 서〉에서 14음절로 된 긴 무운(無韻) 시행을 처음으로 사용했다가 그뒤 이야기체 시에서 이것을 기본 운율로 썼다. 〈프랑스 혁명〉이라는 미완성의 시는 당대의 역사를 서사시로 써보겠다는 야심만만한 시도였다. 〈천국과 지옥의 결혼〉에는 풍자·예언·해학·시·철학이 뒤섞여 있는데, 이에 필적할 만한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다. 주로 간결하고 힘찬 산문으로 된 이 시는 제도화한 종교와 인습적인 도덕에 대해 풍자했다.

블레이크는 이 시에서 관능의 이상적인 사용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지각(知覺)의 문간을 깨끗이 치우면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즉 무한한 상태로 인간에게 나타날 것이다." 블레이크는 종래의 그리스도교 교리를 뒤집어서, 선을 이성이나 억압과 동등한 것으로 보고 악을 인간에 내재하는 정신적인 에너지의 자연스러운 표현으로 보았다. 이 책에는 유명한 밀턴 비평과, 영웅적인 힘에 대한 찬미와 창조적인 활력으로 유명한 70편의 간결한 아포리즘 〈지옥의 격언 Proverbs of Hell〉이 실려 있다.

〈천국과 지옥의 결혼〉은 혁명에 대한 믿음을 찬미한 〈자유의 노래 Song of Liberty〉로 절정에 달하며,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신성하다"는 긍정으로 끝을 맺는다. 〈앨비언의 딸들이 본 환상〉에서는 〈경험의 노래〉에 실린 시 몇 편에서 암시한 성의 자유라는 주제를 전개한다. 이 시의 주인공 우순은 성적인 희열과 재생을 통해 자신이 새로운 순결을 얻었음을 발견한다. 이 시에서 처음으로 추상적인 도덕을 대변하는 억압적인 신을 유리즌이라고 불렀다.

블레이크의 램버스 시기

로버트가 죽은 직후 블레이크와 그의 아내는 런던의 소호에 있는 집으로 이사했다. 이곳에서 혁명기간에 나온 모든 작품이 씌어졌다. 1793년에 템스 강 남쪽 램버스로 이사해 그곳에서 7년을 살았는데, 이 시기는 블레이크가 세속적인 부를 가장 많이 누린 때이면서 정신적으로는 가장 불안했던 때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쓴 시들은 소위 '예언서'라고 하는데 〈아메리카:예언서 America, A Prophecy〉(1793)·〈유럽:예언서 Europe, A Prophecy〉(1794)·〈유리즌의 서 The Book of Urizen〉(1794)·〈아하니아의 서 The Book of Ahania〉(1795)·〈로스의 노래 The Song of Los〉(1795)·〈로스의 서 The Book of Los〉(1795) 등이 있다. 이들 시에서 블레이크는 일련의 우주적 신화와 서사시를 정교하게 만들고 이를 통해 복잡하고 난해한 철학의 틀을 설명했다. 이 작품들 속에서 중요한 상징적 존재는 유리즌이다. 블레이크가 보기에 유리즌은 버림받은 불멸의 존재로서, 인간의 영혼이 타고난 힘을 제약하고 억누르는 이성과 법의 세력, 그리고 여호와를 동시에 구현한다.

예언서는 이성(유리즌), 상상력(로스), 반항정신(오크)이라는 상반된 힘을 상징하는 개체들끼리 우주, 역사, 인간의 영혼 속에서 벌이는 일련의 장엄한 전쟁을 묘사했다. 화려한 채색 삽화가 그려진 〈아메리카:예언서〉는 짤막하지만 강한 인상을 주는 설화시로서, 미국 독립전쟁이 반항정신인 오크의 봉기라는 상상에 의한 해석을 내렸다. 〈유럽:예언서〉는 예수의 출현과 18세기 후반의 프랑스 혁명을 반항정신의 구현이라는 같은 맥락에서 보았다.

〈유리즌의 서〉는 성서 〈창세기〉의 블레이크판 또는 풍자적 모방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창조주는 선하고 의로운 여호와가 아니라 태초의 통일성에 거역함으로써 물질세계에 갇히게 된 '어두운 힘'을 나타내는 유리즌이다. 3개의 강음이 있는 짧은 무운 시행으로 씌어진 〈유리즌의 서〉 속의 시는 음울한 힘을 지니긴 했지만 웅장한 삽화에 비해 약한 인상을 준다. 이 시의 삽화가 지닌 힘과 장중함은 가장 뛰어난 삽화시집으로 꼽히는 〈예루살렘 Jerusalem〉을 예고했다. 블레이크의 신화담은 〈창세기〉에 해당되는 〈유리즌의 서〉에 이어 일종의 〈출애굽기〉인 〈아하니아의 서〉로 이어지며, 〈로스의 서〉에서도 계속된다. 〈로스의 노래〉에서는 우주적인 주제로 다시 돌아가 인류의 이야기를 자신의 시대로 끌어내린다. 이 무렵 블레이크는 정신적으로 절망상태에 빠진 듯하며 그의 시도 마지막 예언서에 이르러서는 힘을 잃었다. 묵시록과 인류를 갱생하는 힘이라고 믿었던 프랑스 혁명에 대한 신뢰는 이미 잃어버린 상태였고, '대립상태'에 근거하여 통합을 이끌어내려는 자신의 시도가 복잡한 인간 실존에 대한 해답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을 서서히 깨닫고 있었다.

블레이크의 주요 서사시

〈로스의 노래〉를 마지막으로 시의 실험 기간은 끝났다.

그뒤로 거의 10년 동안 시집을 전혀 인쇄하지 않았다. 1795년 한 서적상으로부터 에드워드 영의 〈밤의 사색 Night Thoughts〉에 삽화를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고 1797년까지 이 작업을 계속해 537편의 수채화를 그렸다. 본격적인 서사시를 써야겠다는 새로운 창조적 충동을 느낀 때는 바로 이 기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795년 〈발라 Vala〉라는 서사시의 초안을 잡고 〈4개의 조아 The Four Zoas〉로 제목을 바꾸어 9년여에 걸쳐 고쳐 썼는데 판각은 하지 않았다.

이 시는 웅장한 토르소로 남아 있지만, 시의 특성과 그 속에 담긴 사상은 지나치게 복잡한 신화체계에 가려 빛을 잃었다. 개개의 시구와 주요개념은 장엄한데도 전체적으로는 불완전하며 일관성이 없다. 그뒤에 나온 서사시 〈밀턴 Milton〉·〈예루살렘〉 등은 이 작품에서 소재를 얻었다.

1800년 블레이크 부부는 서식스의 대지주 윌리엄 헤일리의 초대를 받아, 그가 마련해준 서식스 해안의 펠팜에 있는 오두막집으로 가서 살았다.

헤일리는 마음씨는 좋지만 예술감각이 없는 예술애호가로서 블레이크를 고용하여 판각을 시켰다. 그러나 헤일리는 상상력이 풍부한 그의 작품들을 업신여겨 그를 자신의 소유에 속한 세밀화가나 길들여진 시인으로 바꾸어놓으려 했다. 처음에 블레이크는 서식스 생활에 만족했으나 곧 후원자인 헤일리의 처사를 참아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오두막이 너무 습해서 아내의 건강이 나빠지자 1803년 런던으로 돌아왔다. 펠팜을 떠나기 얼마 전에 블레이크는 스코필드라는 군인을 자기 집 정원에서 내쫓으면서 매우 모욕적인 말을 했다는 이유로 그 군인에게 고소당했다. 블레이크는 치체스터의 법원에서 재판을 받았으나 혐의가 인정되지 않아 무죄판결을 받았다. 헤일리는 블레이크의 보석금을 내고 변호인도 고용했다. 이 일은 〈예루살렘〉·〈밀턴〉의 밑바닥에 깔린 신화의 일부를 이루었다. 블레이크가 〈순수의 예언 Auguries of Innocence〉을 비롯한 가장 뛰어난 후기 서정시를 쓴 것도 펠팜에 있을 때였다.

〈순수의 예언〉은 다음 첫 연이 인상적이다. "한 알의 모래에서 세상을 보고/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면,/네 손바닥 안에 무한이 있고/순간 속에 영원이 있다."

가장 아름다운 편지를 쓴 것도 펠팜에 있을 때인데, 그 대부분은 토머스 버츠에게 보낸 것이다. 공무원인 버츠는 여러 해 동안 한결같이 아낌 없는 도움을 베푸는 후원자였고, 블레이크는 이무렵에 그린 거의 모든 그림을 그에게 위탁했다.

1804~08년 블레이크는 〈밀턴〉을 인쇄했다.

이 시는 비교적 짧은 서사시로 주인공(밀턴)과 사탄 사이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예언자적인 위엄과 블레이크가 만들어낸 신화의 모호함이 나타난다. 시 속에서 밀턴이 악과 투쟁하는 것은 블레이크 자신이 후원자 윌리엄 헤일리의 오만함과 싸우는 것을 반영한다.

〈예루살렘〉은 대표적인 서사시 가운데 3번째 작품이며 가장 긴 시이다.

1804년에 시작해 〈밀턴〉을 완성한 직후 써서 인쇄했는데, 채색한 책 가운데 가장 장식이 화려해 100페이지 중 3~4페이지에만 삽화가 없다. 세부내용이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지만 시의 기본 틀은 간단하다. 시의 도입부는 영국과 인류를 상징하는 거인 앨비언이 '울로의 잠', 즉 추상적인 물질주의라는 지옥에 내동댕이쳐진 모습을 보여준다. 시의 핵심부는 장인(匠人) 또는 창조적 인간의 원형인 로스에 의해 앨비언이 잠에서 깨어나 다시 살아남을 그리고 있다.

앨비언이 모든 사람은 한 형제라는 예수의 교리를 받아들이고 예루살렘(그가 잃어버렸던 영혼) 및 신과 재결합하면서 시는 절정에 이른다.

블레이크의 말년

1803~20년경은 블레이크가 세상살이에 실패한 시기이다. 일거리를 얻기가 힘들었고, 이무렵부터는 만들어낸 판화도 창의성이 없는 것이 많았다. 1809년 자신의 작품을 대중에게 공개하려는 마지막 시도로 16점의 유화와 수채화를 전시했다.

이 전시회를 위해 〈Descriptive Catalogue〉를 정성들여 썼으나 참석한 사람은 매우 적었다. 그러나 이같은 오랜 침체기에서 벗어나, 1819년 화가 존 리넬이라는 관대한 새 후원자를 만나 새뮤얼 파머를 비롯한 젊은 화가들을 소개받았다. 말년에 블레이크는 이 화가들의 핵심인물이 되어 그와 같이 종교적 진지함을 공유한 회원들에게 스승으로 존경받았다.

〈예루살렘〉 뒤에 쓴 가장 주목할 만한 시는 〈영원한 복음 The Everlasting Gospel〉(1818?) 속에 들어 있다. 이 시집은 예수의 인물됨과 가르침을 과감하게 재해석한 미완성작이다. 그러나 블레이크는 말년에 주로 미술작업에 몰두했다. 1821년 린넬의 위탁을 받고 〈욥기〉에서 영감을 얻어 22점의 수채화 연작을 그렸다. 이 가운데 몇 점은 그의 가장 유명한 그림 축에 든다. 린넬은 단테의 〈신곡 Divine Comedy〉 삽화도 그려달라고 했는데, 이 작업은 1825년에 시작했으나 결국 끝내지 못했다. 이 책의 삽화로 그린 102점의 수채화는 화려한 색깔이 특징이다.

블레이크는 60대에 와서야 비로소 평생 원했던, 상상력을 발휘하는 작업에 대한 추종자와 조력자를 얻을 수 있었다. 그결과 말년에 기교가 가장 뛰어나고 아름다운 삽화들을 그릴 수 있었다. 죽기 직전까지도 침대에 누워 자신의 책들에 색칠을 했으며, 스트랜드가에 있는 방 안에서 70세로 숨을 거두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블레이크는 묘비도 없이 버닐필즈의 한 묘소에 묻혔다.

블레이크의 회화

시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림에서도 당대의 주류에서 완전히 벗어난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18세기 후반 영국의 조형회화라는 버젓한 예술전통에 속한다. 블레이크는 처음에 미켈란젤로와 라파엘의 작품을 공부하면서 조각술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뒤에는 제임스 배리, 존 모티머, 헨리 푸젤리 같은 당대 조형화가의 작품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 미술가들은 블레이크처럼 극적인 자세를 한 누드상을 매우 율동적인 직선으로 윤곽만 나타냈다. 특히 푸젤리의 지극히 환상적인 화법은 블레이크가 시각적인 상상력을 해방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블레이크는 자신의 내면적인 상상력을 표현하기 위해 자유로이 인물상을 변형할 수도 있게 되었다.

평생 동안 블레이크는 색보다 선을 강조해서 '딱딱한 느낌의 곧은 선'을 즐겨 썼다. 솔을 사용하거나 음영을 넣는 등 그림의 윤곽을 흐리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 싫어했다. 궁극적으로는 상상하여 창조한 미술작품이 자연을 관찰하여 얻은 것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 점은 블레이크가 기억이나 상상 속의 이미지를 놀랍도록 정확하고 생생하게 볼 수 있는 희귀한 재능, 즉 현대의 용어로 말하면 직관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이해가 된다.

블레이크가 환상적인 광경을 말할 때 그것은 너무나 생생해서 마치 실제로 그가 본 것 같았다. 블레이크가 그림이 지닌 환상과 변형의 능력을 믿은 것이나 레이놀즈와 게인즈버러가 자연의 겉모습만을 천하게 모방함으로써 영국의 물질주의적 지배자들에게 봉사한다고 여겨 그들을 싫어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블레이크의 판화·수채화·템페라에 나오는 인물들은 물결 모양의 윤곽에서 느껴지는 율동적인 생동감, 위풍당당한 단순함을 지닌 특이한 형상, 극적인 효과와 독창성을 지닌 몸짓으로 유명하다. 블레이크가 즐겨 쓴 주제는 밀턴이나 단테의 작품 및 성서에 나오는 일화였다. 또한 많은 그림에서 과감하면서도 남달리 섬세한 채색화가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가장 훌륭한 연작화는 1790~95년에 그린 12점의 대형 채색판화, 1799~1805년에 그린 성서의 삽화와, 죽기 직전에 그린 〈욥기〉의 삽화인데 그중에서도 〈욥기〉 삽화가 그가 이룬 시각예술의 업적 가운데 백미로 꼽힌다.

블레이크의 평가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블레이크는 오랫동안 동료 미술가나 시인들에게만 인정을 받았다.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는 블레이크가 밑그림을 그린 시집을 1847년 영국박물관에서 10실링에 샀다. 로제티가 이 책을 1861년 알렉산더 길크라이스트에게 빌려주어 블레이크의 첫번째 전기가 나왔으며, 1868년에는 앨저넌 찰즈 스윈번에게 빌려주어 장문의 블레이크 평론인 〈평론선 Critical Essays〉이 나왔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는 1893년 블레이크 대표선집을 준비하고 주석 다는 일을 도왔다. 1920년 T.S.엘리엇이 〈신성한 숲 The Sacred Wood〉에 블레이크 평론을 실으면서 그의 이름은 새로운 독자층에게 친숙해졌다. 그가 죽은 지 100주년이 되는 1927년 많은 기념논문과 책이 발간됨으로써 현대에 와서 명성을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