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스톤

블랙스톤

다른 표기 언어 Sir William Blackstone
요약 테이블
출생 1723. 7. 10, 런던
사망 1780. 2. 14, 옥스퍼드셔 왈링퍼드
국적 잉글랜드, 영국

요약 블랙스톤은 영국법을 체계화시키고 쉽게 풀이한 〈영국법 주해〉를 저술한 법률가이다. 이 책은 영국과 미국에서 법학교육의 기본교재로 사용되었고, 초기 미국법 발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하고, 변호사·재판관·판사로 일하면서 잘못된 체계를 바로잡고 개선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1753년부터 법학 교육과 저술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모교에서 그가 크게 관심을 가지고 있던 보통법에 대해 강의하기로 하며 최초의 영국법 강의자가 되었다. 또한 <영국법 주해>에서 영국법의 난해한 부분과 모순점을 배제하고, 모든 주제에 대해 단일한 논리를 가지도록 체계화했다. 이 책은 비유가 많고 유려한 문체로 쓰여 더 인기를 끌었으며 특히 미국 내에서 영국법에 대한 주요지식원이 되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생애
  3. 공직생활
  4. 블랙스톤에 대한 평가

개요

영국법의 원칙을 알기 쉽게 풀이한 〈영국법 주해 Commentaries on the Laws of England〉(4권, 1765~69)를 저술했으며, 이 책은 영국과 북아메리카의 대학에서 법학교육의 기본교재로 사용되었다.

1770년 기사작위를 받았다(→ ).

초기생애

블랙스톤은 중류계층 출신의 비단상인이던 찰스 블랙스톤과 윌트셔 주 칠턴폴리아트 지방의 러블리스 빅의 딸인 메리 사이에서 4번째 아들이자 유복자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도 블랙스톤이 12세 되던 해에 죽었으므로, 그는 런던의 한 외과의사이던 외삼촌 토머스 빅에게 맡겨져 교육받았다. 처음에는 차터하우스를 다녔고(1730~38), 그뒤 옥스퍼드의 펨브로크 칼리지에서 수학했는데, 거기서 그는 고전뿐 아니라 논리학과 수학도 공부했다(→ 옥스퍼드대학교). 그의 모든 저술에서는 폭넓은 문학지식과 인유적(引喩的)이고 유려한 문체가 엿보인다.

1741년 그는 런던의 4대 법학원 중의 하나인 미들템플의 학생이 되었다.

1743년 옥스퍼드대학교 올소울스 칼리지의 회원으로 뽑혔고, 1년 뒤에는 펠로가 되었으며, 1746년 법정변호사가 되었다. 블랙스톤은 변호사로서는 뚜렷한 활동을 보이지 않았지만, 대학에서 맡은 일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유능하게 처리했는데, 특히 체계를 바로잡고 개선하는 데 열성을 보였다. 1750년 블랙스톤은 민법박사학위를 받았다. 1753년 7월에 변호사를 그만두고 옥스퍼드를 중심으로 법학 교육과 저술에 전념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1749년부터 왈링퍼드 시 재판관을 지냈고 1751년 이후로는 대법관법원의 판사로 재직했다. 코먼 로(common law)에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1753년부터는 코먼 로에 대해 강의하기 시작했다.

그당시 대학에서 영국법에 관해 강의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수강자들은 그의 명쾌하고도 사람을 끄는 강의방식과 그가 제시한 주제의 간명함 등에 매료되었다. 블랙스톤은 영국법의 난해한 부분과 모순점을 무시하고, 모든 주제에 대해 단일한 논리체계를 가진 완전성과 상호의존성의 형태를 부여했다.

즉 그는 진부한 면을 없애는 대신 18세기 정신의 산물로서의 영국법을 옹호했다. 그는 1753년 6월 23일자 강의계획서 안에 다음과 같이 목표를 써놓았다. "영국법의 역사를 더듬어보고 그 지도적 법원칙과 기초원리를 설명하며, 영국법을 자연법과 다른 나라의 법들과 비교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영국법안을 만드는 것이 요구된다."

1756년 블랙스톤은 제자들을 지도하기 위한 강의개론서인 〈영국법 분석 An Analysis of the Laws of England〉을 펴냈다.

그는 1758년 10월 코먼 로 분야에서 최초의 교수직 보유자(바이너좌 코먼 로 교수)로 뽑혔다. 그의 강의안들은 1765~69년 4권의 책으로 간행된 〈영국법 주해〉의 기본이 되었다.

공직생활

블랙스톤은 몇 년 동안 옥스퍼드에서의 학문생활과 런던에서의 공직생활을 병행했다.

1759년 대법관법원의 판사직을 사임하고, 1761년 미들템플의 강사 겸 감독자인 법학원평의원이 되었다. 1761년 3월 윌트셔 주 힌던의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자신의 직분에 큰 흥미를 느끼지는 못했다. 블랙스톤은 그해 5월 브렌트퍼드 지방 보스턴가(家)의 제임스 클리더로의 딸인 사라와 결혼하여 왈링퍼드의 프라이어리 저택을 사들였다. 같은 해 7월 뉴인홀(New Inn Hall)의 학장으로 임명되었고, 1763년에는 법무차관이 되었다. 그는 뉴인홀을 코먼 로 전문 칼리지로 전환시키려는 자신의 계획이 거부당하자 학교생활을 그만두기로 결심하고, 1766년 뉴인홀의 교수직과 학장직을 사임했다.

그는 1761~68년 힌던의 하원의원으로, 1768~70년 웨스트베리의 하원의원으로 총 9년간 하원에 속해 있었다. 그는 열성파 정치가는 아니었으며, 자신을 '논쟁하고 있는 당의 격분 가운데 있는 중용인(中庸人)'이라고 묘사했다. 그는 정치인으로서 특별히 주목할 만한 업적을 세우지는 못했으며, 주로 법적 문제나 헌정상의 문제에 대해 언급했다. 그 일례로 1769년의 미들섹스 선거에서 정치개혁가인 존 윌크스를 하원에서 제명하는 일에 지지를 보내 여론의 눈길을 끌었다.

그는 이 논쟁에 관해 표명한 의견과 〈영국법 주해〉에서 발표한 법원리가 일관성이 없다는 이유로 공격을 받기도 했다. 1770년 블랙스톤은 법무차관직을 사임했으나 민사법원 판사직은 수락했다. 판사로 재직하는 10년 동안 법령을 훌륭히 집행했으나 특별한 명예를 얻지는 못했다.

1770년대말경에 건강이 나빠져서 1780년 2월에 죽었고, 그의 뜻에 따라 성베드로 교회에 묻혔다.

블랙스톤에 대한 평가

블랙스톤은 훌륭한 법관이었지만 주석자로서 더 유능한 인물이었다.

그가 저술한 〈영국법 주해〉는 18세기 중엽의 영국법 상황에 대한 체계적이고 명료하며 유려한 서술이다. 이 책은 발간 즉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으며, 영국과 미국의 대학에서는 법학 기본서로 사용되었다. 블랙스톤은 결코 과학적인 법률가는 아니었다. 그는 법의 기초개념에 대하여 단지 모호하게만 파악하고 있었으며, 영국법을 지배권력이 국민에게 강제하는 행위규범이라고 단정지었다. 그는 국내법의 효력이 이른바 자연법 또는 신법(神法)과의 일치로부터 파생된다는 학설을 내세워 "인법(人法)은 자연법이나 신법에 반하면 어떤 효력도 갖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물도 사람처럼 권리를 갖는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그의 인권(人權)과 물권(物權)의 기본적 구별 방법은 로마 법상의 전문용어에서 비롯된 오해에서 기인한다. 또한 사법상의 불법행위(사적 권리침해)와 형법상 범죄의 구별에서도 그 구분원리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정확하고 엄밀하게 정의된 용어보다는 모호한 문학적 표현을 사용하는 경향이 있어 때로 용납될 수 없는 모순에 빠지기도 했다. '형평'(equity)과 같은 매우 중요한 주제에 대해 논의할 때조차도 그는 단어의 법적 의미와 상식적 의미상의 차이를 구별하지 않았고, 그의 책에서 형평법이 적은 부분밖에 차지하지 못함을 볼 때 형평법이 영국법상에서 차지하는 진정한 지위에 대해 거의 깨닫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혹평에도 불구하고 〈영국법 주해〉의 완전성, 학문적이지는 않지만 편리한 체계, 명료한 설명 등은 인정받을 만하다. 블랙스톤이 가지는 법률가로서의 결함은 법의 하위원리들을 설명할 때보다 기초적인 원리를 다룰 때나 법의 기본적 분류시에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블랙스톤은 법률주석뿐만 아니라 다른 일에도 참여했다. 특히 그는 사회체제 문제에 관하여 그 역사적 기초와 가장 특징적인 영국적 제도에 대한 근거를 찾아내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한 종류의 직무수행에 있어서는 철학적이고 공정한 사고가 전혀 엿보이지 않으며, 일반적으로 현존하는 정치적·사회적 질서에 대한 그럴 듯한 방어자로 자신을 내보였다.

당시 〈영국법 주해〉에 가해진 비판은 책 전체가 아니라 특정 부분을 대상으로 했다. 법에 불복종하는 것은 일종의 범죄라는 블랙스톤의 견해는 특히 비판을 받았다. 그는 말년에 가장 치명적인 비판을 받았는데, 이는 사후의 평가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 비판은 철학자 제러미 벤담이 행한 것으로 벤담은 블랙스톤을 '개혁의 적'이라고 공격했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법의 역사적 해석가에 대한 교의적 법개혁자의 공격이라는 양상을 띠었다.

그러나 블랙스톤이 반드시 현상유지나 기득권의 방어자만은 아니었다. 그는 확실히 정체(政體)가 '적절하게 유지되기를' 바랐으나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영국법 주해〉의 몇몇 구절은 의회개혁에 자주 인용되어왔는데, "보다 완전한 인민의 대표"가 있어야 한다는 구절과 세력가 및 부패선거구에 대한 비난 등이 그 예이다.

그러나 블랙스톤의 〈영국법 주해〉가 기본적으로 개혁에 대한 탄원서이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이 책은 강의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설명하고 서술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블랙스톤의 당시 현행법에 대한 서술은 정확하고 포괄적이며 그것을 개혁하고자 했던 자들에게도 큰 도움이 되었다. 정체에 대한 서술은 일부 그의 비평가가 말하는 것보다 더 사실에 부합한다. 그리고 의회의 고권(高權)에 대한 기술과 고권이 함축하고 있는 것에 대한 인식은 모든 전임자들을 능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살펴보아도 〈영국법 주해〉가 통치에 관한 논문으로서보다 문학작품으로서 더욱 가치를 갖는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 주석서는 인유가 많고 우아한 문체로 씌어져 있으며, 어조나 용어가 단순명료하다. 그 문학성 때문인지 공중의 편견에 영합한 탓인지는 몰라도 영국에서 이 책은 대단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은 법에 대한 권위있는 폭로로 받아들여졌고, 로마 시민이 법률의 공포로 평소 무지했던 법에 대해 알게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영국의 식자층 역시 이 책이 나오면서 영국법의 실상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은 법학전문서라기보다는 비전문가를 위한 법학교과서라고 보는 것이 바람직하며, 영국에서 나온 이런 종류의 책으로는 처음이라는 점에서 무조건적인 존경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영국 정치체제에 관한 블랙스톤의 비판은 오늘날까지도 영국사람 대다수의 근저에 깔린 정치적 확신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블랙스톤의 명성은 19세기에 와서 조국에서보다 미국에서 더 높아졌다. 미국 독립혁명 후 〈영국법 주해〉는 아메리카 공화국 내에서 영국법에 대한 주요지식원이 되었다. 영국의 교과서 하나가 신생 미국에서는 신탁(神託)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전위의 결과가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었으나, 다행스럽게도 미국의 현행법은 지방관습을 통해 형성되었고, 국가의 입법자와 법관들은 〈영국법 주해〉의 신봉자가 아닌 실무가들이었다.

19세기말경부터 미국의 법학자들은 블랙스톤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20세기 중반에 들어와서는 그의 책을 고전으로 읽은 사람도 드물 정도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랙스톤은 미국의 법률가들이 기억하는 상징적인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