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접

북접

다른 표기 언어 北接

요약 동학 교단조직의 하나.

최제우(崔濟愚) 동상
최제우(崔濟愚) 동상

동학은 1860년(철종 11) 4월에 최제우가 창도한 종교로서, 그 교지는 시천주(侍天主) 신앙에 기초하면서 보국안민(輔國安民)과 광제창생(廣濟蒼生)을 내세운 점에서 민족종교이자 민중종교였다.

동학의 교단조직을 북접이라고 한 것은 창도 초기에 교조 최제우가 활동하던 용담의 북쪽에 최시형이 살았기 때문이다. 특히 1894년 농민전쟁기에 전라도 지역의 동학조직를 남접이라 부르고 충청도 지역의 교단조직을 북접이라 불렀다. 동학의 조직은 초기에는 각처에 접소(接所)를 두고 그 지방의 유지를 접주(接主)로 삼아 교세를 늘려갔으며, 제2대 교주인 최시형대에는 주로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포접(包接)의 교단조직이 생겼다.

동학조직은 인맥에 따라 만들어졌다.

교주 최시형이 전도한 인물 중 포교에 힘을 기울여 많은 교도를 입도시킨 사람은 접주가 되고, 그 교도가 다시 포교하여 접주가 되면 큰접주와 접주의 구분이 생긴다. 보은집회 당시 교주 최시형은 큰접주를 대접주로 임명하여 명첩과 포명(包名)을 주었는데, 대접주만큼 교도가 없는 접주는 수접주라 했다. 포명은 다양했으며, 한 군에 복수로 임명된 예가 있고, 도와 도의 경계를 넘는 충경대접주와 같은 이름도 있다. 특정 포에 소속된 교도는 군현의 경계는 물론 도를 넘나들어 구성되었다.

1884년(고종 21)에는 교육과 행정을 담당하는 6임(任) 제도를 두었는데, 교장(敎長)·교수(敎授)·도집(都執)·집강(執綱)·대정(大正)·중정(中正) 등 6부서를 두었다. 1887년 3월에 최시형은 다시 6임소(任所)를 정하고 임원에게는 '북접법헌'(北接法軒)이라고 쓴 종이에 해월장(海月章)을 찍어주고 직접 임명했다.

이때는 6임이 전반적으로 지역단위 또는 교단 하부단위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으나, 교단을 총괄하는 중앙기관으로 충주에 법소(法所)를 두었고 각 지방에 도소(都所)를 두어 도접주(都接主)가 있는 곳도 있었다. 1892년 경상도·충청도·전라도 일대에서 동학교도에 대한 침탈이 심해지자, 11월에는 전라도 삼례에서 동학교단의 서병학(徐丙鶴)과 서인주(徐仁周)를 중심으로 교조 최제우를 신원(伸寃)해달라는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했다.

다음해 2월에는 청주에 봉소도소(奉疏都所)를 정하고 상소운동을 시작하여 손병희·김연국·손천민·박인호 등이 광화문 앞에서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한 3월 10일부터 보은 장내리에서 삼남지방의 각지에서 각 포와 접을 단위로 동학조직을 동원하여 대규모의 시위집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보은집회는 정부의 효유(曉諭)에 따라 20여 일 만에 해산되고 말았다.

1894년 농민전쟁이 일어나자 북접 교단은 처음부터 '무위이화'(無爲以化)라는 종교적 입장을 가지고 이를 반대했으며, 북접 내에서 남접을 치려는 싸움을 계획할 정도로 동학교단 내에서 심한 대립과 갈등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농민군의 2차봉기에서는 남접과 함께 협조하여 연합전선을 만들어 반침략 민족운동의 대열에 나서게 되었다. 이렇게 연합전선이 형성된 이유는 처음부터 최제우의 신원도 허락받지 못하고 동학이 불법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정이나 관군 쪽에서도 동학교도와 난민, 북접과 남접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 비도(匪徒)로 지목하여 탄압을 했으므로 종전 타협적 노선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또한 척왜양(斥倭洋)이란 구호는 보은집회에서도 나타났듯이 동학교문이 가진 배외사상의 표현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1894년 농민전쟁에서 북접 교단의 역할은 동학이라는 종교적 입장을 가지고 뒤늦게 참여한 데 불과했으며 실패한 후에도 동학교단을 중심으로 동학을 재편성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1896년 1월에 최시형을 정점으로 한 손병희·손천민·김연국 등 상부 지도부를 만들었으며, 1898년 6월 최시형이 처형된 후 동학은 손병희를 중심으로 지도부가 재구성되었다. 1905년 12월에는 손병희가 천도교(天道敎)로 이름을 바꾸고 이용구(李容九) 계열의 일진회(日進會)와 구별하고자 교단의 종교적 입장을 강화했다.→ 남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