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접

남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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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동학조직의 하나로서 전봉준(全琫準)·김개남(金開南)·손화중(孫和中) 등 동학농민혁명의 지도부가 이끈 조직.

남접은 동학교문의 종교적 입장에서 교조신원운동을 주도한 북접과는 달리 철저한 정치적 개혁을 지향했던 세력이다.

북접이 주도한 교조신원운동은 객관적으로 보면 반봉건투쟁이었지만, 주관적인 입장에서는 단순히 봉건체제 내에서의 반정부운동에 지나지 않았다.

보은집회는 일부 농민대중의 움직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도부의 불철저성으로 인해 이렇다 할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실패했다. 보은집회는 동학농민혁명의 직접적인 전단계가 아니라 북접파 집회, 즉 최시형 계열의 연합집회였다.

동학농민혁명의 직접적인 전단계를 이루는 집회는 별도로 남접파 집회라고 할 수 있는 금구군(金溝郡) 원평(院坪)집회(금구취당·호남취당·남접)였다. 이 집회의 지도인물은 전봉준과 서장옥(徐璋玉)이었다. 서장옥은 남접파에서 존경을 받던 인물로서, 전봉준·김개남·손화중 등은 그의 제자였다. 이들이 최시형과 분리하여 후에 남접을 창도했다. 이들은 북접이 주도한 보은집회와는 대조적으로 철저한 투쟁, 항전노선을 전개했다.

이들이 주도한 금구집회는 봉건정부와의 철저한 대결을 목표로 했으며, 이 점에서 양 집회의 성격차는 명료했다.

남접에는 동학신도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지만, 동학교문의 지향에 동조하지 않고 지도체계에서 일단 벗어난 별개의 농민적 반대세력이었다. 비록 전봉준·손화중·김개남 등 모두가 동학접주였지만, 동학신자·접주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철저하게 변혁의 입지, 농민군의 처지에서 행동했다. 남·북접의 분화·대립은 동학에 대한 인식의 차이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 구성원의 사회경제적 기반의 차이에 기인했다.

동학교문의 지도자들이 이끌었던 북접은 주로 부농층을 기반으로 했던 것에 반하여, 남접은 농촌사회의 분화과정에서 몰락한 농민·천민·노무자·영세상인 등을 포함한 빈농·몰락농민이었다.

이들은 철저한 반봉건세력이었다. 남접을 이끈 전봉준의 변혁사상에는 동학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과 재창조가 깔려 있었다(동학농민혁명). 즉 1893년 2, 3월 서울·전주·부산 등지에서의 외세배격운동, 3월 금구 원평에서의 취당(聚黨), 11월의 사발통문, 1894년 1월의 고부민란 등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이라는 정치적·사회적 원칙의 실천이었다. 남접(전봉준 집단)과 동학교문은 독립되어 있었고, 조직의 내용구성도 이질적이었다. 그러나 남접이 동학과는 전혀 관계없이 구성되었던 것은 아니었고, 상당 부분은 동학을 매개로 하여 구성되었다.

고부민란 때에도 원민(怨民)보다는 적었지만 동학신도들이 봉기에 많이 참여했다는 점으로 보아 남접은 동학신도의 모임으로서 형성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봉건사회의 국지성·분할성으로 말미암아 농민의 일상적인 연대·집결이 종교결사 이외의 방법으로는 불가능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남접 형성에 동학이 일정한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전봉준 등은 동학을 매개로 하여 유대가 이루어진 집단을 종교단체가 아닌 정치적·사회적 결사의 방향으로 유도해갔던 것이다.

그는 동학교문에서 무용지지(武用之地)를 발견했으며, 동학사상과 조직을 결당(結黨)의 수단으로 이용했다.

이와 같이 남접을 지도한 전봉준 등의 지도자들은 동학교문의 동학사상과 조직에 매개되면서 그것과는 별개의 독립된 사회변혁의 사상과 조직을 창조했다. 그러한 사상과 조직의 창조는 당시 정치적·사회경제적 조건 속에서 농민층의 계급적 이익을 실현하려는 행동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동시에 그러한 행동의 성장에 따라 차츰 높은 단계로 발전했다.→ 동학농민혁명, 북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