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몬트

보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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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584경, 잉글랜드 레스터셔 그레이스듀
사망 1616. 3. 6, 런던
국적 잉글랜드, 영국

요약 영국 제임스 1세 시대의 시인·극작가(제임스 1세 시대 문학).

1606년경에서 1613(또는 1614)년에 존 플레처와 함께 희극 및 비극 작품을 썼다(플레처).

레스터셔·찬우드포리스트에 있는 그레이스듀 소(小)수도원의 민사소송부 판사인 프랜시스 보몬트의 아들로서, 1597년 옥스퍼드대학교의 브로드게이츠홀(뒤에 펨브로크 칼리지)에 입학했다.

1598년 아버지가 죽자 학위도 받지 못하고 갑자기 학교를 떠났다가 1600년 11월 런던 이너템플 법학원에 들어갔다. 그러나 법률공부에는 별로 열의가 없었고 머메이드 태번에 자주 드나들었다. 1602년 오비디우스의 전설을 더욱 관능적으로 확대한 시 〈살마시스와 헤르마프로디토스 Salmacis and Hermaphroditus〉가 나왔다.

이 시는 일반적으로 보몬트의 작품으로 인정되는데 길게 휘감기는 환상적인 에피소드와 기발한 착상이 특징이다. 23세 때 벤 존슨의 극작품 〈볼포니 Volpone〉(1607)에 '친한 친구'인 저자에 대한 예우로 시 몇 편을 써넣었다. 존 플레처도 여기에 시를 헌사했는데 이무렵 보몬트와 플레처는 퀸스 레블스 아동극단을 위한 극을 함께 쓰고 있었다. 17세기 회고록의 저자인 존 오브리가 쓴 〈짧은 생애들 Brief Lives〉에 의하면 "그들은 극장으로부터 멀지 않은 강변에서 둘 다 총각으로 함께 살았고, 함께 누웠으며…… 그들 사이에 한 아가씨를 두었고…… 그리고 같은 옷과 망토를 입었다"라고 적혀 있다.

플레처와의 공동 극작은 약 7년간 지속되었다. 1613년 보몬트는 켄트에 사는 선드리지의 어슐라 이슬리라는 상속녀와 결혼하면서 극작을 그만두었다. 1616년 런던에서 죽었으며 웨스트민스터 대사원에 묻혔다.

극작가로서 보몬트는 극에 대한 공헌이 플레처만큼 분명하지 않아서 빛을 보지 못했다. 보몬트와 플레처의 이름으로 되어 있거나 다른 공저자가 끼어 있는 54편의 극 가운데 보몬트 혼자서 쓴 것은 단 1편뿐이고, 10편이 플레처와, 다른 3편은 필립 매신저와 함께 쓴 것이다.

보몬트 혼자서 쓴 〈불타는 막자의 기사 The Knight of the Burning Pestle〉는 당시에 인기를 끌던 감상적인 연인들과 기사의 모험이 되는 대로 펼쳐지는 삽화적 형식의 극을 풍자적으로 모방한 것이다. 이 극은 등장인물 시티즌과 와이프가 당시의 극작가 토머스 데커의 작품을 풍자한 〈런던 상인 The London Merchant〉이라는 극을 보려고 극장에서 자리를 잡는 것으로 시작한다. 시티즌과 와이프는 그들의 견습공이 주역을 맡아야 된다고 주장하고 충고하며 중간에 훼방을 놓는다.

이 작품에서 보몬트는 예술에 대해 잘 모르는 중산계층을 너그럽게 풍자하고 있다. 그러나 이 극은 바로 인기를 얻지 못했다. 보몬트가 플레처와 공저한 대작 〈소녀의 비극 The Maides Tragedy〉·〈필래스터 Phylaster〉·〈A King and No King〉 등 3편이 플레처가 독자적으로 혹은 다른 작가와 같이 쓴 작품보다 더 탄탄하게 짜인 것으로 보아 보몬트는 규격을 잘 맞추는 솜씨를 가졌던 것 같다. 그는 플레처가 쓴 장면을 가끔씩 수정했고 플레처는 보몬트의 일부 작품을 편집했기 때문에 특정 작품에서 두 사람 각자의 역할을 나누기란 사실상 어려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