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현

법현

다른 표기 언어 Fa-hsien , 法顯
요약 테이블
출생 미상
사망 미상
국적 중국

요약 법현은 최초로 인도를 순례한 중국의 승려로, 399년에 중국을 떠나 402년 인도에 도착하여 중국과 인도 교류의 기반을 닦았다. 그가 남긴 글들은 당시의 불교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중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자신이 가지고 온 산스크리트 불경들을 한문으로 번역했다.
20세에 이르러 비구계를 받은 그는 중국에 계율과 경전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못함을 느껴, 불교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인도에 가서 그때까지 중국에는 알려져 있지 않은 불경들을 가져오고자 했다. 그의 여행 기록인 <불국기>(<법현전> 또는 <역유천축기전>이라고도 함)는 서력 기원 초 수세기 동안의 인도 불교의 역사에 관한 귀중한 정보를 담고 있다. 법현의 묘사는 꽤 상세하여 인도 불교가 힌두교의 부흥과 이슬람교도의 침입으로 잠식당하기 전에 어떠했는가를 가히 상상할 수 있다.

속성(俗姓)은 공(龔). 399년 에 중국을 떠나 402년 인도에 도착하여 중국과 인도 교류의 기반을 닦았다.

그가 남긴 글들은 당시의 불교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중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자신이 가지고 온 산스크리트 불경들을 한문으로 번역했다. 법현은 법명(法名)이며, 4세기경 산시 성[山西省] 평양부(平陽府) 무양(武陽)에서 태어났다. 위로 형이 셋이나 있었는데 모두 어려서 죽었기 때문에 그의 부모는 화가 그에게도 미칠 것을 염려하여 3세 때 출가시켜 사미(沙彌)가 되도록 했다고 한다.

그후에도 수년간은 집에 데리고 있었으나 중병에 걸리자 걱정이 되어 절에 보냈는데, 이틀밤이 지나지 않아 생기를 되찾았다고 한다. 그후 수업을 쌓아 20세에 이르러 비구계를 받았다. 연구가 계속됨에 따라 경·율이 온전히 갖추어져 있지 못함을 느끼어, 불교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인도에 가서 그때까지 중국에는 알려져 있지 않은 불경들을 가져오고자 했다.

그의 여행 기록인 〈불국기 佛國記〉는 서력 기원초 수세기 동안의 인도 불교의 역사에 관해 다른 자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귀중한 정보를 담고 있다. 법현의 묘사는 꽤 상세하여 인도 불교가 힌두교의 부흥과 이슬람교도의 침입으로 잠식당하기 전에 어떠했는가를 가히 상상할 수 있다(팔리 율장).

법현은 우선 중앙 아시아의 길도 없는 황무지를 가로질렀는데, 그는 나중에 자신의 이 여행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사하(沙河)에는 악귀와 열풍이 심하여 이를 만나면 모두 죽고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한다. 하늘에는 날으는 새도 없고 땅에는 달리는 짐승도 없다. 아무리 사방을 둘러보아도 망망하여 가야 할 길을 찾으려 해도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고 오직 언제 이 길을 가다 죽었는지 모르는 죽은 사람의 고골(枯骨)만이 길을 가리키는 표지가 되어준다."

법현은 대상(隊商)들의 오아시스인 코탄에 도착한 후 파미르 고원을 넘을 때는 눈보라의 위협과 맞서야 했다.

게다가 산길은 지독히 좁고 가파랐다. "길은 험하고 울퉁불퉁한 산길이었으며 낭떠러지는 험준하기 짝이 없었고 오직 돌로 된 이 산은 천척 만척의 벽과 같이 서 있어 가까이 가면 어지러워서 앞으로 나아가려 해도 발 놓을 곳조차 찾을 수 없었다. 아래로는 인더스 강이 흐르고 있었다. 옛날에 어떤 사람들이 돌을 깎고 쪼아 통로를 만들고 의지할 사다리를 만들어놓았는데 그 사다리는 700계단이나 되었다."(이재창 역 〈법현전〉에서)

402년 서북 인도에 도착한 그는 우선 불교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으로 꼽히고 있는 우디아나·간다라·페샤와르·탁실라 등지를 방문했다.

그러나 그 어디보다도 법현은 불타가 살았고 가르침을 폈던 동인도에 매료되어, 불타의 탄생지 카필라바스투, 불타가 깨달음을 얻은 부다가야, 불타가 최초의 설법을 한 베나레스, 불타가 입멸(入滅)한 쿠시나가라 등을 순례했다. 법현은 도착하는 곳마다 불교가 흥성하고 있는 데 대하여 경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뒤 그는 파탈리푸트라에 상당 기간 머무르면서 그곳의 승려들과 대론(對論)을 하고 산스크리트 불경을 함께 공부했으며, 대중부(大衆部 Mahāsaṅghika)의 율장(律藏)을 필사했다.

대중부는 BC 383년경 베살리 결집(結集)에 의하여 생겨났고 뒤에 대승 불교의 발생에 큰 영향을 미친 부파 불교의 일파이다. 그는 또한 초기 불교의 일파로서 과거·현재·미래의 마음 상태의 동등한 실재성(實在性)을 가르친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Sarvāstivāda)의 율장도 얻게 되었고, 열반(涅槃 Nirvāṅa)의 영원하고 인격적이며 순수한 본성을 찬미한 불경인 유명한 〈대반열반경 Mahāparinirvāṅasūtra〉도 얻게 되었다.

나중에 중국의 열반종에서는 이 경전을 그 교의의 근간으로 삼았다. 법현은 불교에 대한 지식을 한층 깊게 하고 한문으로 아직 번역되지 않은 불경도 상당량 입수하게 되자 중국으로 귀국하고자 했다. 그는 이번에는 육로를 택하지 않고 해로를 택하여, 우선 당시 불교 연구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던 실론으로 갔다. 거기에서 그는 소승 율장의 개정본인 〈미사색부율 Mahiśasāka Vinaya〉과 설일체유부에 속하는 몇몇 경전을 추가로 구할 수 있었다.

법현은 실론에서 2년 정도 머무른 뒤 중국으로 항해에 올랐다.

그러나 바다에서의 어려움은 그가 인도로 오면서 부딪쳐야 했던 사막과 산에서 겪은 고난과 위험 못지 않았다. 그의 배는 사나운 폭풍에 밀려 자바로 추정되는 섬에 표착했으나 배를 구해 다시 중국 광둥[廣東]으로 향했다. 그러나 법현의 배는 남중국의 항구인 광둥에 도착하지 못하고 또다시 폭풍우에 떠밀려 가까스로 산둥 반도[山東半島]의 한 항구에 닿았다. 법현은 무려 200일 이상을 바다에서 보낸 셈이었다. 고국에 돌아온 법현은 자신의 학문적 과업을 다시 시작하여 자신이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 가져온 불경들을 한문으로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