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정환

방정환

다른 표기 언어 方定煥 동의어 소파, 小波
요약 테이블
출생 1899. 11. 9, 서울
사망 1931. 7. 23, 서울
국적 한국
본관 온양(溫陽, 지금의 충청남도 아산시)

요약 어린이날을 만들고 어린이의 복지 향상을 위해 활동한 작가로 호는 소파. 어려서 계모 밑에서 자랐으며, 1917년 천도교 교주 손병희의 딸과 결혼하면서 손병희의 영향을 받아 인생의 전환기를 맞았다. 1920년 일본 도요대학에서 아동문학과 아동심리학을 공부했으며, 이듬해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고 소년운동을 전개했다.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선포하고, 세계명작동화집 <사랑의 선물>과 순수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했다. '어린이'라는 명칭을 만드는 일에서부터 동화창작과 번역, 구연, 강연 등 어린이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으나 과로와 고혈압으로 인해 33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 생애
  3. 주요 활동과 업적
  4. 영향과 평가
방정환
방정환

개요

한국 아동문학 초창기에 활동한 작가. 호는 소파(小波), 필명은 잔물·금파리·북극성·몽중인. 어린이를 위한 동화의 창작과 계몽 활동을 통해 아동 복지와 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잡지 <어린이>를 창간했고, '어린이날'을 제정했으며, 아동문화운동단체 색동회를 조직했다. 33세의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 아동 운동에 헌신하여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고, '소파상'이 제정되어 해마다 시상되고 있다.

초기 생애

1899년 11월 9일 한성 적선방(積善坊) 야주현(夜珠峴,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다동 근처)에서 미곡상을 하던 방경수(方慶洙)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계모 밑에서 자랐다. 5살때부터 조부에게 천자문을 배웠고, 1905년에 두살 위의 삼촌이 다니던 보성소학교 유치반에 가장 어린 학생으로 입학했다. 신식 학교여서 머리를 깎아야 했기 때문에 조부의 반대가 있었으나 가족들이 동의하여 다닐 수 있었다. 그는 1909년 매동보통학교에 입학했고, 이듬해 미동보통학교로 전학했으나 1907년부터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어렵게 학교를 졸업했다. 1913년 상업을 하기 원했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했으나 1914년 중퇴했다.

방정환이 문학가를 꿈꾸게 된 것은 10살이 되던 1908년 어느 미술가가 그에게 선물한 환등기 때문이었다. 방정환은 아이들을 모아놓고 환등기를 영사하면서 상상의 세계를 영상으로 연출하는 것과 변사 훙내를 내면서 연기를 하는 데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16년 생계를 돕기 위해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서 서기 업무를 담당했으나, 1917년 천도교의 교주였던 손병희(孫秉熙)의 딸 손용화와 결혼하여 인생의 전환기를 맞았다. 그는 손병희의 영향으로 1918년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하여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으며, 유광렬(柳光烈)·이중각(李重珏)·이복원(李馥遠) 등과 청년운동조직체인 '청년구락부'를 조직해 이듬해부터 기관지 〈신청년〉을 펴냈다. 〈청춘〉 9월호에 수필 〈관화 觀火〉를 발표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등사판 '독립선언문'을 인쇄해서 배포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주일 간 구치소에 갇혀 있었다. 1920년 일본 도요대학(東洋大學) 철학과에 입학해 아동문학과 아동심리학을 공부했다.

주요 활동과 업적

그는 〈개벽〉 도쿄(東京) 특파원으로 활동하면서 1920년 7월호에 시 〈갈마반도〉와 12월호에 소설 〈그날 밤〉을 발표했다. 이해 발표한 번역 동시 <어린이 노래: 불 켜는 이>를 발표하면서 이 글에서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그는 이 무렵부터 어린이에 대한 권익 보호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21년 5월 1일 김기전(金起田)·이정호(李定浩) 등과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해 "씩씩하고 참된 소년이 됩시다. 그리고 늘 사랑하며 도와갑시다"라는 표어 아래 본격적인 소년운동을 전개했다. 1922년에는 천도교소년회 중심으로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선포하고, 개벽사에서 세계명작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펴냈다. 1923년 3월 20일 순수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했다.

그해 5월 1일 도쿄에서 손진태(孫晉泰)·윤극영(尹克榮)·진장섭(秦長燮)·고한승(高漢承) 등과 아동문화운동단체 '색동회'를 조직했다. 색동회는 발기회록에서 "동화 및 동요를 중심으로 하고 일반 아동문제까지 할 사"라고 밝히고 있듯이 이후 전국 각지에서 동화구연대회·아동예술강습회·아동예술전람회·소년문제강연회 등을 열어 소년운동단체의 통일을 꾀했고, 1925년에는 소년운동협의회 지도위원, 1927년에는 조선소년연합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1928년 조선소년연합회가 조선소년총동맹으로 개편되고 소년운동 노선이 변화하자 일선에서 물러나 〈어린이〉·〈학생〉 등의 편집에 힘썼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익힌 이야기 솜씨로 어린이뿐 아니라 죄수들에게까지 동화구연을 했는데, 듣는 사람은 모두 감정이 고조되어 눈물을 흘릴 정도로 뛰어난 연기력을 보였다고 전한다. 매년 70회가 넘는 동화 구연과 강연 때문에 전국을 돌아다녀야 했는데, 이로 인해서 건강에 문제가 발생했다. 원래 비만인 데다가 고혈압이 있었는데, 1931년부터 과로가 겹치고 줄담배의 영향으로 지병인 고혈압이 악화되어 1931년 7월 23일 병상에서 숨을 거두었다.

영향과 평가

그의 아동문화운동은 어린이들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한 소년운동과 아동문학의 발전을 위한 문필활동으로 나누어진다. 1920년대 한국 사회전반에 나타나 있던 어린이에 대한 불합리한 의식을 계몽하는 활동을 펼치는 한편 유교적 가부장제 아래에서 희노애락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었던 어린이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감성의 해방을 추구했던 것이다. 이같은 목적을 위해 그는 〈어린이〉 등 여러 아동잡지에 창작작품은 물론 해외 아동문학작품을 번역해서 실었다. 그의 번역작품은 선량·정직·노력 등 권선징악의 교훈을 바탕으로 한 해학과 풍자를 특징으로 한다. 이것은 그의 작품이 사회교화와 어린이의 사회적 지위향상을 도모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창작동화는 비록 양적으로는 번역동화에 미치지 못하나 가난과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는 명랑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일제의 지배와 유교적 전통 아래에서 고통받는 어린이에 대한 독자의 인식을 일깨워주는 노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불우한 어린이들은 불합리한 현실을 극복해나가려는 적극적인 행동을 보여주지 못한 채 독자들의 감상에 호소함으로써 소극적인 감상주의를 드러내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번역동화와 창작동화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어린이를 지나치게 천진난만하고 순진무구한 존재로 보았는데, 이는 1920년대 한국 아동문학의 일반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1940년 5월 1일에 마해송(馬海松)·최영주(崔泳柱)가 〈소파전집〉을 펴냈고, 1957년 '새싹회'에서 그의 아동문화운동과 아동문학의 업적을 기리는 '소파상'을 제정하여 매년 시상하고 있다. 1978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고, 1980년 건국포장을 수여했다. 1998년에는 재단법인 한국방정환재단이 설립되어 그의 유업을 기리는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서울시 남산 외곽의 소파길은 그를 기리기 위해 명명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