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불

미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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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051
사망 1107, 중국 장쑤 성[江蘇省] 화이양[淮陽]
국적 중국, 송(宋)

요약 중국의 주요예술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1103년 철학박사, 1104년 서화학박사가 되었다. 광범위한 글, 즉 시와 미학의 역사에 대한 논문, 화론 등을 썼다. 어머니가 영종의 유모였기 때문에 궁정에서 왕족과 자유롭게 어울리면서 자란 미불은 학문적인 논의를 재빨리 이해함으로써 예민한 지성을 보여주었고, 독창적인 시에 소질을 보였다. 그림과 서예에 뛰어난 능력을 나타냈다.
황실도서관에서 책을 교정하는 관리로 벼슬길에 올랐고, 철학박사, 서화학사를 거쳐 예부원외랑의 자리에 앉았다가 마지막으로 장쑤 성 화이양의 군사령관이 되었다. 이 자리에 있을 때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미불(Mi Fei)
미불(Mi Fei)

자는 원장(元章), 호는 해악외사(海嶽外史)·양양만사(襄陽漫士). 중국의 주요예술가들 가운데 한 사람인 그는 관직에 있었지만 높은 지위에 오르지 못했고 자주 자리를 바꾸었다. 1103년 철학박사, 1104년 서화학박사(書畵學博士)가 되었다. 광범위한 글, 즉 시와 미학의 역사에 대한 논문, 화론(畵論) 등을 썼는데, 오늘날에도 상당한 양이 남아 있다.

미불은 송대(宋代:960~1279) 초기에 고위 관리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영종(英宗:1063/64~68 재위)의 유모였기 때문에 그는 궁정에서 왕족과 자유롭게 어울리면서 자라났다. 소년시절에 조숙한 재능을 보였는데, 특히 서예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 그는 미래의 관리를 양성하기 위해 마련된 정식 수업을 싫어했지만, 학문적인 논의를 재빨리 이해함으로써 예민한 지성을 보여주었다. 또한 재미있고 독창적인 시에 소질을 보였고, 그림과 서예에 뛰어난 능력을 나타냈다.

나중에 벼슬길에 올랐는데, 자리를 자주 바꾸어 경력이 다채로웠다. 처음에 황실도서관에서 책을 교정하는 관리로 벼슬길에 올랐고, 그후 수도 카이펑[開封]을 떠나 3군데나 자리를 옮겼다. 1103년 철학박사가 되었고, 안후이 성[安徽省] 우웨이[無爲]에서 잠시 군사령관으로 일했다. 1104년 수도로 돌아와 서화학박사로 일했는데, 이 기회를 이용하여 황제에게 아들 미우인이 그린 그림을 선물했다.

그후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의 자리에 앉았다가 마지막으로 장쑤 성 화이양의 군사령관이 되었는데, 이 자리에 있을 때,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장쑤 성의 단투[丹徒]에 묻혔고, 묘비에는 아들 미우인이 그를 위해 쓴 묘비명이 새겨져 있다. 미불은 결혼하여 5명의 아들과 8명의 딸을 두었는데, 아들 중에서는 첫째와 둘째만 살아 남고 나머지 3명은 어려서 죽었다.

작품

미불의 글은 광범위했다. 그의 시집인 〈산림집 山林集〉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이 소장한 서예작품들을 비판적으로 설명한 〈보장대방록 寶章待訪錄〉과 자신과 남들이 소장하고 있던 그림들, 미학의 역사에 대한 논문, 화론 등이 수록되어 있는 〈화사 畵史〉는 지금도 남아 있다. 그가 죽은 뒤에 나온 작품집인 〈보진영광집 寶晉英光集〉·〈해악명언 海嶽名言〉·〈해악제발 海嶽題跋〉 등도 전해진다.

평생에 걸친 미불의 작업은 개인주의적인 기질이 뚜렷하다. 이런 기질은 그의 까다로운 결벽증, 고대 중국왕조의 의복에 대한 취미, 색다른 돌과 벼룻돌을 좋아하여 열심히 수집한 것 등에도 분명히 드러나 있다. 그가 관리생활에서 별로 성공하지 못한 것은 이런 색다른 성격 탓이기도 했다. 그는 아무도 의심할 수 없는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었고, 주요한 두 정치 파벌의 지도자였던 시인이자 정치가인 왕안석과 소식(蘇軾)이 그의 친구였다.

가문적인 배경도 있었지만, 정2품 벼슬인 예부원외랑보다 더 높은 자리에는 한 번도 올라가보지 못했다. 그의 묘비명을 보면 이처럼 출세하지 못한 이유는 "그가 세상 앞에서 굽실거리는 것을 참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적혀 있다. 이런 꼿꼿한 자존심을 보여주는 한 가지 예는 예술품 수집가들에 대한 그의 태도이다. 그는 예술품 수집가들을 참견쟁이와 미술품 감정가의 두 부류로 나누어 참견쟁이는 무식하고 그저 자기 이름을 알리는 일에만 열심이라고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예술가로서 미불은 서예와 산수화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쉽게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난해하거나 화려한 서체를 거부하고, 과거의 위대한 중국 서예가들을 널리 끈기있게 연구했다. 그의 서예 이론서인 〈서사 書史〉와 〈해악명언〉에는 서예에 관한 가장 통찰력 있는 글들이 실려 있는데, 이 책들을 읽어보면 그는 자체적인 창조적 역량으로 가득 찬 과거의 서체를 존중하는 것이 옳다고 믿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무엇보다도 자연스러움과 자기 표현을 높이 평가했고, 부자연스럽고 달콤한 것을 기피했다.

미국 워싱턴 D. C. 프리어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솟아오르는 구름의 탑 Tower of the Rising Clouds〉을 비롯한 미불의 그림들은 과거와의 단절을 상징한다. 송대 이전 중국의 산수화는 본질적으로 선에 의존하여 대상을 묘사했다. 그러나 그는 허난 성[河南省] 호수 지역의 안개 낀 강과 언덕을 묘사하는 데 관심을 가졌고, 지나칠 만큼 묽은 물감을 이용하여 결이 뚜렷이 나타나도록 수평으로 붓을 놀리는 기법을 도입했다.

나중에 '미점법'이라고 부르게 된 이 기법은 중국에서 비가 많이 내리고 구름이 가득한 그 지역의 인상을 생생하게 표현했다. 먹물이 번져서 퍼지게 하는 이 '발묵' 기법은 그가 직접 창안한 것이다. 이 기법은 그 당시 사람들의 열광적인 관심을 끌었고, 중국 회화 역사를 통해 줄곧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중국미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