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시계

물시계

다른 표기 언어 동의어 각루, 刻漏, 경루, 更漏

요약 누각·누호·각루·경루라고도 한다. 물시계는 낮이나 맑은 날에만 사용할 수 있는 해시계보다 유용하기 때문에 삼국시대 이후 국가의 공적 시계로 이용되었다. 서양에서도 고대부터 물시계가 이용되었다.
조선시대인 1398년 5월 종로에 종루가 세워지고 경루가 설치되었다. 세종 때인 1424년 5월 경복궁에 청동제의 누각을 주조했으며, 이밖에도 자격루·행루·옥루·의기 등의 물시계를 제작했다. 자격루는 1434년 장영실에 의해 자동시보장치를 갖춘 물시계가 처음 만들어졌다. 의기는 농가사시의 광경을 새겨 농사 진행 상황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한 것이었다. 행루는 휴대용 물시계로 파수호와 수수호 1개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밖에 장영실은 1438년 1월 세종을 위해 물을 이용해 자동으로 움직이는 천상시계인 옥루를 완성했다.

누각(漏刻)·누호(漏壺)·각루(刻漏)·경루(更漏)라고도 한다.

자격루(국보 제229호)
자격루(국보 제229호)

가장 오래된 우리의 기록은 〈삼국사기〉 권38 직관지(職官志)에 나타나 있다. 718년(신라 성덕왕 17)에 물시계를 담당하는 관청인 누각전(漏刻典)을 처음으로 설치하고 박사(博士) 6명과 사(史) 1명을 두었다고 한다.

누각은 한대(漢代) 이후 중국에서 내려온 대표적인 물시계로 그 구조는 누호·누전(漏箭)·전주(箭舟)로 나누어진다.

물을 넣은 항아리[漏壺]의 한쪽 끝에 구멍을 뚫어 물이 흘러나오게 하고, 그것을 받는 그릇에 시각을 새겨 넣은 잣대[漏箭]를 꽂은 배[箭舟]를 띄워 그 잣대가 떠오르는 것으로써 시각을 알 수 있게 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누호는 설수형(泄水型)과 수수형(受水型)이 있다. 설수형은 바빌로니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된 형태로 누호로부터 흘러나간 물의 양으로 시간을 측정한다.

수수형은 누호에 흘러들어온 물의 양으로 시간을 측정하는 방법으로 중국에서 많이 사용된 방법이다. 이런 물시계는 낮이나 맑은 날만 사용할 수 있는 해시계보다 유용하기 때문에 삼국시대 이후 국가의 공적 시계로 이용되었다. 남아 있는 기록과는 달리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인 성덕왕 때에 이르러 물시계를 처음 만들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671년에 이미 백제 학자들의 지도 아래 일본에서 누각이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 백제에서 이미 6세기경 이전에 누각이 제작되었고 이것을 일본에 전파했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 백제인들의 지도하에 만들었다는 누각은 물이 담기고 흘러내리는 누호가 3개이고 물을 받아 잣대를 띄우는 항아리가 1개인, 모두 4개의 물항아리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7세기 전반에 당나라의 여재(呂才)가 만들어 보편화시킨 누각의 형식과 비슷하다. 고려시대의 누각은 사료가 없어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계호정(契壺正)이나 장루(掌漏)와 같은 관직이 누각을 전담한 관리였고, 서운관(書雲觀)·태복감(太卜監)·사천대(司天臺) 등이 천문·역수(曆數)·측후(測候)·각루 등의 일을 관장했다는 사실로 볼 때 누각이 공적 시계로 사용되었다고 추측된다.

조선왕조가 건립되어 서울로 천도한 후 새로운 표준시계 설치가 필요했다.

이에 1398년(태조 7) 5월 종로에 종루가 세워지고 새로운 경루가 설치되었다. 조선조에 의해 제작된 최초의 누각인 경루는 고려말에 사용되었던 것과 같은 형식인, 부루(浮漏)와 같은 수수형 물시계로 추정된다. 이 물시계를 이용해서 시각을 측정해 서운관의 관원인 사진(司辰)이 종루에 걸어놓은 큰 종을 쳐서 경점(更點)을 알렸다. 파루당종법(罷漏撞鍾法)은 초경(初更)에 28수(宿)에 따라 28회 종을 쳤는데 이를 인정(人定)이라 하며, 성문을 닫았다.

또 5경(五更)에는 33천(天)을 의미해 33회 울렸는데, 이것을 파루라 하며 성문을 열었다. 1424년(세종 6) 5월에는 경복궁에 청동제의 누각을 중국의 체제를 참고해 주조했다. 세종 때는 이밖에도 자격루(自擊漏)·행루(行漏)·옥루(玉漏)·의기 등의 물시계를 제작했다.

자격루로서는 1434년(세종 16) 장영실(蔣英實)에 의해 자동시보장치를 갖춘 물시계가 처음 만들어졌다. 의기는 농가사시(農家四時)의 광경을 새겨 농사진행 상황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한 것이었다. 행루는 휴대용 물시계로 파수호와 수수호 1개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437년 6월에 여러 개를 만들어 함길도와 평안도의 도절제사영(都節制使營)과 변경의 각 군에 보내졌다.

그밖에 장영실은 세종을 위해 물을 이용해 자동으로 움직이는 천상시계인 옥루를 만들어 바쳤다. 그것은 1438년 1월에 완성되어 경복궁 천추전(千秋殿) 서쪽에 흠경각(欽敬閣)을 지어 설치했다. 그 구조는 김돈(金墩)의 흠경각기(欽敬閣記)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옥루는 명종초 경복궁에 불이나 없어진 것을 1554년(명종 9) 다시 만들었다고 한다.

한편 서양에서도 고대부터 물시계가 이용되었다. 북아메리카 인디언과 몇몇 아프리카 종족은 작은 배나 부유용기에 구멍을 뚫어 이것이 가라앉을 때까지 들어온 물의 양을 통해 시간을 측정했다. 다른 형태로는 물이 가득 찬 용기에 구멍을 뚫어 물이 흘러나오게 한 다음 용기 안에 매겨진 눈금을 읽어 남아 있는 물의 높이를 측정해 시간을 잰다.

후자는 고대 바빌로니아의 칼데아인이 발명했을 것이다. 이집트의 물시계는 BC 14세기경부터 사용되었다. 초기의 물시계는 물이 새어나옴에 따라 압력이 낮아져서 물 흐름이 느려짐을 고려하지 않고 눈금을 매겼다. 로마인들은 물이 저수지에서 원통으로 떨어지도록 하고 부유체를 이용해 원통 벽에 있는 눈금을 읽을 수 있게 물시계를 만들었다. 물시계는 연설자의 연설시간을 재는 등 여러 가지 목적으로 쓰였으며, 16세기 후반 갈릴레오는 그의 실험에서 물체의 낙하시간을 측정하기 위해 수은 시계를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