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델스존

멘델스존

다른 표기 언어 Felix Mendelssohn
요약 테이블
출생 1809. 2. 3, 독일 함부르크
사망 1847. 11. 4
국적 독일

요약 대표적 낭만주의 작곡가이며 〈한여름밤의 꿈〉 서곡, 〈이탈리아 교향곡〉 바이올린 협주곡, 2개의 피아노 협주곡, 오라토리오 〈엘리아 〉 등 다수의 실내음악이 유명하다. 조부는 철학자인 모제스 멘델스존이다.
멘델스존의 작품 중 많은 곡들은 아기자기한 세공과 같이 작고 깔끔하며, 즐거운 초상화처럼 묘사적이기는 하지만 낭만주의 본래의 깊이를 결여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러나 바이올린 협주곡이나 그밖의 여러 실내 악곡들에서 볼 수 있듯이, 매력적이고 순진무구하며 신선하면서도 그 자체로 심오한 낭만적 경이감을 전달하고 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생애와 작품
  3. 결혼과 성숙기
  4. 멘델스존에 대한 평가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

개요

대표적 낭만주의 작곡가이며 〈한여름밤의 꿈 Ein Sommernachtstraum〉(1826) 서곡, 〈이탈리아 교향곡 Italian Symphony〉(1833), 바이올린 협주곡(1844), 2개의 피아노 협주곡(1831, 1837), 오라토리오 〈엘리아 Elijah〉(1846) 등 다수의 실내음악이 유명하다.

조부는 철학자인 모제스 멘델스존이다.

초기생애와 작품

펠릭스 멘델스존은 유대인 부모인 아브라함과 레아 잘로몬 사이에서 태어났고, 어머니에게서 처음 피아노를 배웠다.

멘델스존의 가문은 혈통에 대해 자부심이 있었지만, 19세기 자유사상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교로 개종함으로써 유대인 집단의 울타리에서 벗어났음을 나타내려 했다. 펠릭스 멘델스존은 남동생과 2명의 누이와 함께 어린 나이에 루터교 세례를 받았다. 바르톨디라는 이름은 원래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부유한 삼촌이 스프레 강가에 소유하고 있던 부동산 이름이자 그의 이름이었는데, 삼촌의 재산이 멘델스존 가족으로 넘어오자 가족의 이름으로 포함해서 부르게 되었다.

1811년 프랑스가 함부르크를 점령하는 동안 멘델스존 가족은 베를린으로 거처를 옮겼고, 그곳에서 멘델스존은 루트비히 베르거에게 피아노를, 작곡가이자 선생으로 그의 성장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K.F. 첼터에게 작곡을 배웠다. 그밖의 선생들도 어린 멘델스존에게 문학·풍경화 등을 가르쳤으며, 그결과 어려서부터 폭넓은 교양을 쌓을 수 있었다.

예술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쌓아 교양을 살찌웠으며 학습과 연구로 자극을 받기도 했다. 누이와 함께 파리를 여행하면서 피아노 레슨을 받았고 모차르트 음악에 익숙해졌다. 소년시절 동안 5개의 오페라,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11곡의 교향곡, 협주곡, 소나타, 푸가 등 많은 작품을 남겼고 이중 대부분은 베를린에 있는 프로이센 국립도서관에 오랫동안 필사본으로 보관되었다가 제2차 세계대전 때 분실되었다. 1818년 9세 때 베를린에서 첫 공개 연주를 했다.

1821년 바이에른에 가서 괴테를 만나 그에게 바흐·모차르트의 작품들을 연주해주었고 자신의 현악 4중주 B단조를 헌정하면서 노년의 괴테와 12세의 음악가 멘델스존 사이에 우정이 싹텄다.

1821년대의 멘델스존
1821년대의 멘델스존

1825년 파리에서 루이지 케루비니가 그의 뛰어난 재능을 높이 샀고, 다음해 〈한여름밤의 꿈〉 서곡으로 작곡가로서 완전한 입지를 마련했다(→ 〈한여름밤의 꿈〉) . 이 작품의 분위기 효과와 신선한 서정적 선율은 그의 독창성을 드러내주었고, 생동감있는 관현악 편성은 림스키코르사코프의 관현악법을 예견하고 있었다.

지휘자로서도 적극적인 활동을 한 그는 1829년 3월 11일 베를린 징아카데미(Singakademie)에서 바흐가 죽은 뒤 처음으로 〈마태 수난곡 St. Matthew Passion〉을 초연 지휘해서 19~20세기 바흐 부흥운동의 계기를 마련했다. 그 사이 스위스를 방문하여 베버를 만났으며 1821년 베를린에서 공연된 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 Der Freischütz〉에 자극을 받아 민족적 성향의 작곡에 고무되었다.

이 시기의 최고 작품은 현악 8중주(1825)로, 완벽한 기교와 거의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가벼운 터치가 돋보일 뿐만 아니라 이 작품에서 발전시킨 경쾌한 스케르초 악장은 〈한여름밤의 꿈〉 부수음악에서도 나타났다. 1829년 봄 런던 필하모닉 소사이어티와 교향곡 C단조를 지휘하기 위해 처음으로 영국 여행을 떠났고, 여름에는 스코틀랜드로 갔다. 스코틀랜드에서 그는 여러 차례 시적인 느낌들을 편지에 담아 그곳에는 "흥겨운 민요 가락이 있고", "귀는 사랑스럽고 향기로운 시골길로, 마음은 원주민의 맨종아리로 향해 있다"고 적었다.

애보츠퍼드에서 월터 스콧 경과의 만남은 그에게 귀중한 체험이었고, 문학적·회화적·음악적 요소들은 멘델스존의 상상 속에서 종종 뒤섞여 나타났다. 헤브리디스에서 쓴 편지에서 그는 스코틀랜드 연안에 파도가 부서지는 모습을 묘사하는 글귀를 적었고, 여기에 더해 〈헤브리디스 서곡 Hebrides Overture〉의 첫 몇 마디를 악보로 간략히 옮겨적었다. 1830~32년 사이에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스위스 등을 여행했고, 1832년 런던으로 돌아와 〈헤브리디스 서곡〉을 지휘했으며 그곳에서 1830년 베네치아에서 완성한 〈무언가 Lieder ohne Worte〉의 첫 권을 출판했다.

매력적이고 우아한 작품들로 그는 점차 19세기의 가장 인기있는 작곡가가 되어갔다. 영국에서 명성이 높았으며, 짧은 생애 동안 영국을 적어도 10번 이상 방문했다. 영국에서 그의 음악은 빅토리아적이라고 평가되었고, 실제로 빅토리아 여왕은 작곡가 중 멘델스존을 가장 좋아하게 되었다.

1843년 버킹엄 궁전에서 영국 여왕과 여왕의 부군을 만났다.

그가 이 만남에 대해 다소 냉소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는 이들에게 충분히 매력을 느꼈으면서도 한편으로 영국 여왕의 권위가 주는 장려함과 허위의식의 이중적 측면을 동시에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스코틀랜드 교향곡 Scottish Symphony〉은 빅토리아 여왕에게 헌정한 곡이다. 멘델스존이 영국 청중들의 사랑을 받은 데에는 또다른 요인이 있었다. 이 곡은 멘델스존이 죽은 뒤인 1858년 영국 공주의 결혼식 때 〈한여름밤의 꿈〉에 포함된 〈결혼행진곡 Wedding March〉이 연주된 것을 계기로 이 곡은 결혼식장에서 즐겨 연주되었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황제 Emperor〉와 G장조 협주곡을 런던에서 초연했는데, 암보로 연주한 최초의 연주자 중 한 사람으로 그의 기억력은 천재적이었다. 그는 또한 오르간 작품들로도 유명했다. 이후 1846년 버밍엄에서 연주된 오라토리오 〈엘리아〉의 인기로 영국에서 헨델에 버금갈 정도로 영향력있는 작곡가가 되었다. 그러나 죽은 뒤 반발 작용이 일어나기도 했다. 후대의 영국 작곡가들은 바그너·드뷔시·스트라빈스키 등에 심취하면서 멘델스존의 인기에 반기를 들었으며, 그의 일부 작품들의 감상적 성격을 비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멘델스존이 처음에는 연주를 통해, 나중에는 작곡을 통해 영국의 음악을 동면상태에서 일깨워주었다는 사실이다. 첫 영국 방문 뒤에 이어진 긴 여행에서 그는 여러 가지 새로운 경험을 했고, 이 여행의 생생한 경험들은 그의 긴 편지들에 담겨 있다. 그는 괴테의 권유로 읽게 된 로렌스 스턴의 〈감상적 여행 Sentimental Journey〉에 감동을 받아 생동감있게 자신의 감상을 기록했다.

베네치아에서는 티치아노와 조르조네의 회화 작품들에 매료되었다. 그러나 로마의 교황청 가수들에 대해서는 이들의 '음악성이 아주 떨어진다'고 생각했고, 그레고리오 성가는 '알아들을 수 없다'라고 생각했다. 그는 로마를 '끔찍한 턱수염을 한' 독일 예술가들의 '초췌한' 식민지라 묘사했다. 나중에 라이프치히에서 멘델스존은 베를리오즈와 지휘봉을 바꾸었는데, 베를리오즈는 라임나무로 만든 커다란 지휘봉을 선사한 반면, 멘델스존은 베를리오즈에게 가죽으로 살짝 덮은 날렵한 고래뼈 지휘봉을 선사했다.

이들이 교환한 지휘봉의 차이는 이 두 인물의 대조적인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1833년에 멘델스존은 런던을 또다시 방문하여 〈이탈리아 교향곡〉을 지휘했고, 같은 해에 뒤셀도르프의 음악감독이 되었다. 뒤셀도르프에서 그는 교회 예배 음악에 베토벤·케루비니의 미사곡과 바흐의 칸타타를 도입했고, 마찬가지로 같은 곳에서 첫 오라토리오 〈성 바울로 St. Paul〉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1835년 라이프치히의 유명한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되었고, 이곳에서 그는 이 악단의 연주 수준을 올려놓았을 뿐 아니라, 라이프치히를 독일 최고의 음악 도시로 만들어놓았다. 라이프치히에서는 쇼팽·슈만과도 친교를 맺었고,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의 첫 연주에서 서곡 〈바다의 고요함과 행복한 항해 Meeresstille und glückliche Fahrt〉를 지휘했다.

결혼과 성숙기

1835년 멘델스존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죽음으로 상심해 있었다.

아버지의 최대의 소망은 아들이 〈성 바울로〉를 완성하는 것이었고, 그는 이제 새로운 각오로 이 작업에 뛰어들어 이듬해 뒤셀도르프에서 이 곡을 지휘했다. 같은 해 프랑크푸르트에서는 프랑스 개신교 목사의 딸 세실 장르노를 만났다. 그녀는 16세로 멘델스존보다 10세나 어렸지만, 이 둘은 약혼에 이어 1837년 3월 28일 결혼식을 올렸다. 기록 중에서 멘델스존과 가장 가까웠던 누이 파니는 동생의 아내에 대해 "그녀는 귀엽고 순진하고 신선하며, 영리하고 좋은 성격을 가졌다.

멘델스존은 아주 행운아인 것 같다. 그녀는 그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하며, 그가 변덕을 피워도 동요하지 않고 변함없이 그를 돌봄으로써 어느새 그의 성마름을 치유해준다"라고 최상의 칭찬을 했다. 멘델스존은 누이에게 감성적으로 뿐 아니라 음악적으로도 끌렸다. 그녀는 상당한 작곡 실력을 갖추고 있었을 뿐 아니라 〈무언가〉 중 일부는 그녀가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을 정도다.

그녀는 누이의 역할을 다하여 멘델스존의 음악 세계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뒤 몇 년 동안 작곡된 곡에는 피아노를 위한 〈진지한 변주곡 Variations sérieuses〉·〈찬미가 Lobgesang〉·〈시편 104 Psalm CXIV〉, 피아노 협주곡 2번, 수편의 실내악 곡들이 있다. 1838년에는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그는 평소에는 작품을 빨리 써서 편지쓰듯이 쉽게 곡을 끝마쳤지만, 이 곡만큼은 최고의 천재적인 서정적 표현성을 이루기 위해 6년간이나 전력을 기울였다. 이 바이올린 협주곡은 이후 20세기에 와서는 선율의 따스함과 활달함으로 사랑을 받았으며, 19세기의 향수에 젖은 감상자에게는 19세기의 우아한 음악 언어를 간직한 곡으로도 사랑을 받아왔다. 과장되고 극적인 브람스, 벨라 바르토크, 알반 베르크의 바이올린 협주곡들이 작곡된 다음에도 이 곡의 인기는 여전했다. 멘델스존의 작품 중 많은 곡들은 아기자기한 세공과 같이 작고 깔끔하며, 즐거운 초상화처럼 묘사적이기는 하지만 낭만주의 본래의 깊이를 결여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러나 바이올린 협주곡이나 그밖의 여러 실내 악곡들에서 볼 수 있듯이, 매력적이고 순진무구하며 신선하면서도 그 자체로 심오한 낭만적 경이감을 전달하고 있는 곡들도 많이 있다. 1843년 멘델스존은 라이프치히에 음악원을 세웠고, 슈만과 함께 작곡을 가르쳤다. 이어서 런던과 버밍엄을 방문했고, 점차 많은 계약을 체결했다. 그는 당시 아주 열성적으로 하루하루를 살았고, 이 정도의 일로 건강을 해칠 그가 아니었지만 1847년 5월 프랑크푸르트에서의 누이 파니 죽음은 그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주었다.

그처럼 열심히 살았고 감수성이 풍부한 멘델스존에게 있어서 가깝게 지내던 혈육의 죽음은 그의 삶 자체를 망가뜨릴 정도였다. 그는 기력을 잃었고 6개월 후 혈관 파열로 숨을 거두었다.

멘델스존에 대한 평가

오늘날 우아하고 세련된 멘델스존의 음악이 빅토리아 시대에서의 그의 위치처럼 큰 부분을 차지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그의 음악은 다재다능한 19세기 작곡가인 멘델스존을 그 시대의 중요한 예술가들과 하나로 묶는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는 〈한여름밤의 꿈〉에서 당나귀의 유쾌한 중얼거림을 바순으로 표현했고 오베론의 호른으로 환기시키는 효과를 내서 셰익스피어 '요정의 왕국'의 동반자가 되었다. 그가 〈핑갈의 동굴 Fingalshöhle〉에서 보여준 인상주의적 기법의 싹은 후대의 화가인 J.M.W. 터너의 기법을 암시하는 것이다. 바그너는 멘델스존의 강점이 관현악을 위한 독특한 음을 만드는 데 있다고 이해했으며 자신의 오페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Fligender Holländer〉에서 그 기법을 보여주었다.

20세기 프랑스의 작곡가들 역시 형식의 완성미를 보여주는 우아한 멘델스존의 음악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멘델스존의 작품에 대한 연구는 최근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의 〈엘리아〉가 그만큼 자주 공연되지는 않고 가벼운 피아노곡 중 일부는 베토벤과 슈만의 진지한 작품에 압도되어 빛을 보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림같이 생생하고 위대한 교향곡 〈스코틀랜드〉·〈이탈리아〉는 계속해서 신선한 풍경을 제시하고 있다.

멘델스존은 19세기 최초의 위대한 자연주의 작곡가이며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까지도 그 가치가 재발견되는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