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버

베버

다른 표기 언어 Carl Maria von Weber 동의어 카를 마리아 폰 베버, 카를 마리아 프리드리히 에른스트 폰 베버, Carl Maria Friedrich Ernest von Weber
요약 테이블
출생 1786. 11. 18, 홀슈타인 오이틴
사망 1826. 6. 5, 런던
국적 독일

요약 고전음악에서 낭만음악으로 넘어가던 시대에 활동했으며, 오페라 〈마탄의 사수〉(1821)·〈오이뤼안테〉(1823)·〈오베론〉(1826) 등이 유명하다. 음악 및 연극에 종사하는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가 음악적 재능을 보이자 모차르트와 같은 신동으로 키울 야망을 가졌던 아버지 덕분에 요제프 하이든의 동생인 미하엘 하이든 등 여러 선생에게서 배웠다. 독일 여러 곳을 떠돌다가 뮌헨에서 낭만주의적 경향의 작품들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결혼 후, 드레스덴에서 살면서 유명한 <무도회의 권유> 등을 작곡했다. 〈마탄의 사수〉의 작곡에 착수한 것도 드레스덴에서였다. 이 오페라는 1821년 베를린에서 초연되자마자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마탄의 사수〉는 독일 낭만 오페라의 전통을 확립하고 베버를 민족적 영웅으로 만들어준 작품이었다. 그는 런던에서 <오베론>을 초연한 후 죽었다.

카를 마리아 폰 베버(Carl Maria von Weber)
카를 마리아 폰 베버(Carl Maria von Weber)

오페라 〈마탄의 사수 Der Freischütz〉(1821)·〈오이뤼안테 Euryanthe〉(1823)·〈오베론 Oberon〉(1826) 등이 유명하다.

음악 및 연극에 종사하는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프란츠 안톤은 음악가이자 조그만 유랑극단의 경영자로, 자신의 가문이 독일에서 귀족을 나타내는 호칭인 '폰'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기를 원하여 이 호칭을 붙이기 시작했다. 또한 어머니 게노베파는 가수였고, 양친의 형제자매들과 사촌들도 대부분 음악과 연극에 종사했다. 베버는 병약한 아이로, 태어날 때부터 좌골에 이상이 있었고 이때문에 평생 다리를 절어야 했다. 그가 음악적 재능을 보이자 자식들을 모차르트와 같은 신동으로 키울 야망을 가졌던 아버지는 자신이 운영하는 극단이 방문하는 고장들마다 그를 가르칠 선생들을 붙여주었으며, 선생 가운데는 요제프 하이든의 동생인 미하엘 하이든도 있었다.

미하엘 하이든 밑에서 그는 최초로 〈6개의 작은 푸가 Sechs Fughetten〉 작품번호 1(1798)을 작곡하고 출판까지 했다. 아버지의 극단이 뮌헨에 잠시 정착하자 베버는 그곳에서 석판인쇄법을 개발한 알로스 제네펠더에게서 석판인쇄 기술을 배웠다. 프라이부르크로 옮겨가자 베버의 가족은 어린 작곡가 베버의 작품을 보급하기 위해 석판인쇄 계획을 세웠으나 이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그렇지만 베버는 최초의 오페라 〈숲속의 아가씨 Das Waldmädchen〉(부분적으로 보전)를 작곡했고, 이 작품은 1800년에 프라이부르크에서 무대에 올렸으나 실패했다. 그는 잘츠부르크로 돌아와 최초의 완성된 오페라 〈페터 슈몰과 그 이웃사람들 Peter Schmoll und seine Nachbarn〉을 작곡했는데, 이 작품도 1803년의 아우크스부르크 공연에서 실패에 그쳤다.

베버는 당시 영향력을 떨치던 음악 선생 게오르그 요제프 포글러에게서 음악수업을 재개했고, 1804년에 그를 통해 브레슬스라우(지금의 폴란드 브로츨라프)의 오페라 극장 감독이 되었다. 그는 젊은 감독으로서 개혁을 해나가는 데 미숙했을 뿐 아니라 독극물을 삼키는 바람에 성대를 상하는 사고를 당해 결국 이 자리를 사임해야 했다. 뷔르템부르크의 오이겐 공작이 음악감독으로 임명하여 가까스로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된 그는 오이겐 공작의 개인 오케스트라를 위해 교향곡 2곡을 작곡했다.

이 두 작품은 매력적이고 창의력이 넘치는 작품이었지만, 기존의 형식을 사용하는 등 베버의 후기 양식에 나타나는 것처럼 문학·시·회화 등을 통해 얻은 음악적 영감을 자유로운 형식으로 작곡한 본격 낭만주의 작품들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후 그는 뷔르템부르크의 프리드리히 1세의 궁정에서 비서관으로 일했다. 이곳에서 그는 너무 방탕한 생활을 하고 빚도 많이 지게 되어 한동안 감금생활을 한 뒤에 추방당했다. 이 시기(1807~10)에 작곡한 주요 작품으로는 낭만적인 오페라 〈질바나 Silvana〉(1810, 프랑크푸르트), 수편의 가곡, 피아노 소품 등이 있다.

베버와 그의 아버지는 만하임으로 도망갔고, 베버 자신의 말대로 '제2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는 한 영향력있는 예술가 모임의 구성원들과 사귀었고, 이곳에서 재능있는 피아노니스트, 기타 연주자로서뿐 아니라 낭만주의 운동에 대한 이론으로도 두각을 나타냈다. 다름슈타트로 옮겨간 그는 포글러를 다시 만났을 뿐만 아니라 독일의 오페라 작곡가 자코모 마이어베어를 만났다. 이 시기에 작곡한 곡으로 피아노를 위한 〈그랜드 협주곡 Grand Concerto〉 1번 C장조 작품번호 11과 유쾌한 1막 오페라 〈아부 하산 Abu Hassan〉(1811, 뮌헨) 등이 있다.

다름슈타트에서 자리를 얻지 못해 실의에 빠진 베버는 뮌헨으로 여행을 갔고, 그곳에서 클라리넷의 거장 하인리히 베르만과 사귀어 〈콘체르티노 Concertino〉 작품번호 26 외에도 현란하고 창의력 넘치는 클라리넷 협주곡 2곡을 작곡했다.

베버는 하인리히 베르만과 같이 순회공연을 다니면서 그를 위해 총 6곡의 작품을 작곡했다. 클라리넷은 호른과 함께 베버가 가장 좋아하는 악기였고, 이것은 새로운 음향과 악기 조합을 추구하던 그의 성향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음악사에서 위대한 관현악의 대가로 남게 되었다.

그는 기교적인 피아니스트이기도 했고, 그의 음악에는 그의 연주에 대한 당대 사람들의 기술대로 피아노의 현란함과 우수, 과시적 표현이 반영되어 있다. 1809~18년 베버는 또한 상당수의 음악평과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특히 그의 음악평은 엄격하다 못해 인색한 것으로 유명함). 작곡과 평론 등 그의 모든 활동은 형식보다는 느낌, 머리보다는 가슴을 강조한 낭만주의의 이상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한동안 베를린에 머물면서 선동적인 합창들과 노래들로 당시의 애국적 열기를 포착한 뒤 1813년에는 프라하 오페라단의 지휘자로 임명되었고, 비로소 그는 자신의 이론들을 실제 작품에 완전히 실현시킬 수 있었다. 그가 연주곡으로 선택한 작품들을 보면 그가 얼마만큼 낭만주의의 이상을 열심히 좇았는가를 알 수 있다. 그는 연주가를 택할 때도 기교적인 연주자보다는 합주의 균형을 더 중시했으며, 연주회에 곡목 소개 팜플렛을 배포하여 청중들이 미리 연주에 대해 어느 정도 예비지식을 갖도록 했다. 그러나 그는 시끄러운 연애 스캔들로 인해 또다시 수난을 맞았다.

그는 난관에 봉착했고, 그가 추진한 개혁에 대한 반대로 1816년 사임해야 했다. 다행히 그는 이미 이루어놓은 상당한 명성을 바탕으로 1817년 드레스덴 궁정 오페라단의 감독으로 임명될 수 있었고, 같은 해에 전부터(프라하 오페라 시절) 사귀던 가수 카롤리네 브란트와 결혼했다. 그렇지만 드레스덴은 당시 독일의 어느 도시보다도 낙후된 도시였으며 그곳에서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인기가 높았기 때문에, 베버가 활동하기에는 이전보다 어려움이 컸다.

결혼생활은 행복하여 정열적으로 오페라 제작에 전념할 수 있었고, 특히 오페라 제작의 모든 면들을 자신이 직접 지휘했다. 그는 작은 일까지도 놓치는 법이 없었다. 오케스트라나 가수에 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상연작품을 선정하는 일이라든가 단원모집·배역선정·무대장치·조명·제작 등을 직접 감독했다. 이러한 일들로 인해 오페라를 직접 작곡할 시간은 거의 갖지 못했으며, 더불어 상당히 진전된 결핵이 오페라 작곡을 방해했다. 오페라 작곡은 하지 못했지만 이 시기에 그는 마지막 4개의 피아노 소나타들, 가곡, 유명한 〈무도회의 권유 Invitation to the Dance〉(1819)·〈콘체르트슈튀크 Konzertstück〉 작품번호 79(1821) 등 피아노 독주 소품들을 작곡했다.

〈마탄의 사수〉의 작곡에 착수한 것도 드레스덴에서였다.

이 오페라는 1821년 베를린에서 초연되자마자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줄거리는 민담에서 가져온 것으로, 마을 사격대회에서 우승하여 사랑하는 여자(아가 테)를 차지하고 싶어하는 주인공 남자(막스)가 이러한 소원을 이루게 해줄 마법의 탄환을 얻은 대가로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 오페라가 보여주는 소박한 마을생활이라든가 거친 유머, 정감 어린 정서, 주변의 숲, 웃음 뒤에 숨은 불가사의한 공포 등은 독일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친숙한 소재들이었다.

유쾌한 사냥꾼들과 마을 처녀들에서부터 단순하지만 용감한 주인공, 이들을 지배하는 왕 등 등장인물들은 거울 속에 비친 독일인들 자신의 모습이었고, 여기에 아름다운 선율과 멋들어진 음악이 친숙함을 더했다. 〈마탄의 사수〉는 독일 낭만 오페라의 전통을 확립하고 베버를 민족적 영웅으로 만들어준 작품이었다.

그의 다음 오페라인 〈오이뤼안테〉는 더욱 야심을 갖고 작곡한 것으로, 바그너의 오페라를 예견하고 있는 견실한 작품이다(그의 피아노 음악이 쇼팽과 리스트를 예견하고 있듯이 그의 오페라들은 바그너의 오페라를 예견하고 있음). 그러나 이 작품의 대본은 형편없는 정도는 아니지만 다소 서투른 구성으로 되어 있다.

이어서 런던 코벤트 가든 오페라단이 새로운 오페라 〈오베론〉을 위촉하자, 그는 영어를 배워가면서 대본 작가 제임스 로빈슨 플랑셰와 서신 왕래를 통해 협동 작업을 했다. 그가 이 새로운 오페라를 쓰기 시작한 동기는 그가 죽은(그는 자신이 얼마 지나지 않아 죽게 될 것을 예감함) 뒤 그의 가족을 부양할 충분한 돈을 벌어놓으려는 것이었다. 〈오베론〉은 대사로 처리된 장면이 너무 많고 무대가 장식적이어서 그동안 주로 오페라 속에 연극적 장치들을 통합해 넣는 일에 주력해왔던 베버로서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이 오페라 속에는 베버의 음악 중 손꼽을 만한 정교한 음악들이 들어 있었다. 1896년 그는 초연을 위해 런던으로 향했는데, 제대로 걸을 수가 없어서 조지 스마트 경의 부축을 받아야 했고, 다시 가족에게 돌아가고 싶은 바람으로 억지로 힘을 낼 수 있었다. 〈오베론〉은 성공했고, 베버는 사람들로부터 축하를 받았지만 그의 건강은 너무나 급속도로 나빠지고 있었다.

독일로 돌아가는 여행길이 모두 준비된 상황에서 그는 방 안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