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델레예프

멘델레예프

다른 표기 언어 Dmitry Ivanovich Mendeleyev
요약 테이블
출생 1834. 2. 8(구력 1. 27), 러시아 시베리아 토볼스크
사망 1907. 2. 2(구력 1. 20), 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
국적 러시아

요약 화학원소들의 상호관계를 밝혀 화학의 기초와 근대 물리학의 상당부분을 통일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교원양성소에서 공부한 그는 1855년 우수한 성적으로 금메달을 수상, 교사자격을 얻었다. 오데사에서 화학 공부를 지속했고 1857년 대학에 입학해 1859년 국비로 하이델베르크대학교로 유학을 갔다. 1864년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 공업연구소 화학교수를 거쳐 3년 뒤 일반화학교수가 되었고, 고전적인 교과서 <화학원론>을 썼다. 혼자 공부해도 여러 가지 화학적인 관계를 알 수 있도록 주기율표를 작성했으며, 이 주기율표는 대부분의 화학이론의 뼈대가 되었다. 1891년 중화학제품에 대한 새로운 수입관세 체계를 만드는 일을 맡았고, 1893년 도량형국 국장이 되어 죽기 전까지 일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유년시절과 교육
  3. 주기율표의 작성
  4. 그밖의 업적
멘델레예프(Dmitry Ivanovich Mendeleyev)
멘델레예프(Dmitry Ivanovich Mendeleyev)

개요

원소의 주기분류법을 개발했다.

마지막으로 작성된 주기율표에 있는 빈 공간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원소들로 채워질 것이라고 예언했으며, 그 가운데 3개 원소의 성질을 예측했다(주기율).

유년시절과 교육

토볼스크에 있는 김나지움 교장의 17명의 자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해 그의 아버지는 장님이 되었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그의 어머니는 32㎞ 떨어진 곳에 유리공장을 임대해 운영했다. 학창시절 그는 수학·물리·지리 과목에는 매우 우수했지만 필수과목인 고어(古語)에는 낙제생이었다. 1847년 아버지가 죽고, 이듬해 유리공장에 불이 나 폐허가 되자 그의 어머니는 결단을 내려 2명의 어린 자녀만을 데리고(드미트리와 그의 누나) 토볼스크를 떠났으며 아들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모스크바로 갔다. 그러나 출신지에 따라 입학이 제한되었기 때문에 대학교육에서 제외된 시베리아 출신의 그는 입학허가를 받지 못하고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학들과 의학학교에도 시도해보았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어머니가 죽기 10주 전에 교원양성소에 입학했고 1855년 우수한 성적으로 금메달을 수상하면서 교사자격을 얻었다. 그뒤 건강 때문에 자청해 크리미야로 발령을 받았고, 오데사에서 화학공부를 계속했다. 화학으로 학위를 얻기 위해 1856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그는 1857년 처음으로 대학에 들어갔고, 1859년 국비로 하이델베르크대학교로 유학을 갔다.

그곳에는 유명한 화학자이자 발명가인 로베르트 분젠과 물리학자인 구스타프 키르히호프가 있었지만 그는 독자적으로 연구했다. 그당시 분자응집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고, 유명한 카를스루에 학회에 참석해(1860. 9) 프랑스의 화학자들 및 이탈리아의 화학자인 스테니슬라오 칸니차로와 사귀면서 분자량과 원자량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그들의 주장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1861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지만 뚜렷한 일자리가 없어 그는 과학 관련저술과 편집 일을 했다.

1864년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 공업연구소 화학교수를 거쳐 3년 뒤 그곳 대학의 일반화학교수가 되었다. 그의 요구를 충족시켜줄 만한 적당한 교과서가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 교과서를 쓰기 시작해 고전적인 교과서 〈화학원론 The Principles of Chemistry〉(1868~70)을 완성했다.

주기율표의 작성

그 책을 쓰는 과정에서, 그는 원소들의 성질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깊이 조사해 원소들의 분류체계를 고안했다.

다른 과학자들도 그런 분류체계를 만들려고 노력했는데, 영국의 화학자이자 물리학자 존 돌턴이 원자량 개념을 제시한 뒤 어떤 화학자들은 한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원소들 사이에 어떤 유사성이 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또다른 화학자들은 원소들의 성질의 유사성이 구조적으로도 유사하게 나타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원소들 사이의 산술적인 관계를 연구했다.

또 원자량을 연구했던 요한 되버라이너와 윌리엄 오들링과 같이 원소들 사이의 논리적인 순서를 밝히려 한 화학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알려진 모든 원소를 원자량의 증가순으로 배열해 원소들의 성질에 주기성이 있음을 나타내고 혼자 공부해도 여러 가지 화학적인 관계를 알 수 있도록 주기율표를 작성한 사람은 멘델레예프였다.

이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널리 받아들여졌다. 이 주기율표에는 빈 칸이 있었는데, 그는 그것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원소로 채워질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것들 중 3가지는 20년 내에 발견되었고 실제로 이 3가지 원소는 그가 예측한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주기율표는 대부분 화학이론의 뼈대가 되었고, 한 원소가 다른 것으로 변화되는 방사성 붕괴과정을 해석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의 교과서 역시 많은 언어로 번역되었지만, 이 주기이론은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이다. 그는 이론과 강의에만 안주하지 않았다. 그는 선천적으로 실제를 중시하는 사람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반드시 과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865년 그는 자신의 과학적 지식을 적용해 농작물의 질을 높이고 수확량을 늘렸으며, 러시아의 일반적인 농업조건을 개선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 방법을 개량했다.

그밖의 업적

1867년 러시아 대표단의 한 사람으로 파리 박람회에 가서 프랑스 화학공업을 둘러보고 온 뒤 러시아 소다 산업을 개선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후에 석유화학공업의 문제점을 연구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1876년 미국을 방문해 산업의 효율성이나 그 제품의 품질을 과학적으로 높이려고 하지 않고 단지 제품 생산량만을 늘리려는 미국 석유업자들의 태도를 비난했다. 러시아에 돌아와서도, 석유자원개발을 외국업자에게 맡기는 방식을 비판하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석유자원을 스스로의 힘으로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항공학에도 관심을 기울여 과학관측용 풍선기구를 만들기도 했으며 공기보다 무거운 물체의 비행 가능성을 주장했다. 정치적으로 그는 진보적이었고 사회개혁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제정 러시아 체제는 그의 정치적 견해를 인정하지 않아 이 체제와 부딪히는 일이 많았다.

그의 재능은 억압받지 않았으나 그는 종종 냉대를 받았다. 1880년 제국 과학 아카데미의 정회원이 될 수 있었지만 임명되지 않았고, 1890년 부조리 척결을 주장하는 학생들의 요청을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대학에서 물러나 더이상 강의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유능했기 때문에 1891년 중화학제품에 대한 새로운 수입관세 체계를 만드는 일을 맡았고, 1893년 그가 죽을 때까지 일했던 도량형국 국장이 되었다. 그는 건강의 악화와 1905년 봉기 전에 있었던 정치적 사건으로 인해 불행한 말년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초청강사 및 여러 아카데미의 명예회원으로서 많은 나라의 동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화학연구를 체계화하려는 운동의 지도자로서 인식되었다.

오늘날 그는 화학원소들의 상호관계를 밝혀 화학의 기초와 근대 물리학의 상당부분을 통일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