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킨리

매킨리

다른 표기 언어 William McKin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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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43. 1. 29, 미국 오하이오 나일즈
사망 1901. 9. 14, 뉴욕 버펄로
국적 미국

요약 보호관세주의를 주장하고 은화 자유주조에 반대해 전국적 명성을 얻은 고집 센 공화당원으로, 미국-스페인 전쟁(1898) 이후 미국의 식민지 획득과 관련된 세계제국주의의 대명사로 꼽힌다. 미국 남북전쟁 때(1861~65) 매킨리는 헤이스 대령(1877~81년 미국 제19대 대통령을 지냄) 밑에서 복무했다. 헤이스는 매킨리를 자기 부관으로 삼아 나중에 그가 정치가의 길을 걷도록 도와주었다. 그는 이후 하원의원과 오하이오 주지사를 지냈으며, 1897년 대통령이 되었다. 곧 스페인과 전쟁이 벌어져, 미국은 쿠바 영토와 영해에서 스페인 군대를 격파했다. 영토확장을 위한 전쟁은 아니었지만, 이전의 스페인 영토들을 어떻게 처분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그는 푸에르토리코, 필리핀, 그리고 전략적 위치에 있는 다른 섬들은 마땅히 미국의 보호령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매킨리(William McKinley)
매킨리(William McKinley)

보호관세주의를 주장하고 은화 자유주조에 반대해 전국적 명성을 얻은 고집 센 공화당원으로, 미국-스페인 전쟁(1898) 이후 미국의 식민지 획득과 관련된 세계제국주의의 대명사로 꼽힌다.

미국 남북전쟁 때(1861~65) 매킨리는 헤이스 대령(1877~81년 미국 제19대 대통령을 지냄) 밑에서 복무했다.

헤이스는 매킨리를 자기 부관으로 삼아 나중에 그가 정치가의 길을 걷도록 도와주었다. 2년 뒤 매킨리는 오하이오 주 캔턴에서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하고(1867), 군(郡) 검찰관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하원의원에 선출되어 14년간(1877~91) 의원생활을 한 뒤, 그는 미국 기업을 외국 기업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높은 관세를 주장해 매우 유명해졌다. 하원 세입위원회(Ways and Means Committee)의 위원장으로 1890년의 매킨리 관세법안을 주도적으로 발기했는데, 이 법은 많은 수입품목에 대해서 그당시로서는 사상 최고의 관세를 부과했다.

1890년 매킨리는 재선에 도전했으나 낙선했다. 그러나 공화당에서 활동하던 오하이오 주의 부유한 기업가 해나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해나의 지원에 힘입어, 매킨리는 2번씩이나 오하이오 주의 주지사로 선출되어 봉직했으며(1892~96), 그동안 해나는 1896년 공화당 대통령후보 지명전에서 그를 승리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는 높은 보호관세와 금본위제의 유지를 강조하는 정견발표를 통해 쉽게 후보로 지명되었다. 이러한 입장은 금본위제를 주장한 민주인민당 후보 윌리엄 J. 브라이언의 입장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해나는 대기업들로부터 막대한 돈을 모금해 정력적으로 선거운동을 지휘했다. 매킨리는 집앞에서 기차를 타고 캔턴으로 줄지어 몰려드는 방문객들에게 매일 연설을 했다. 공화당은 선거인단 선거에서 271 대 176으로 승리했다.

매킨리는 대통령 집무를 시작하자 곧 관세율을 인상(딩리 관세)하기 위하여 특별회기 의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쿠바 반란, 그리고 반란자들에 대한 스페인 당국의 가혹행위에 관한 소문으로 미국 전역이 들끓었기 때문에 다른 내정에는 신경을 쓰지 못했다. 매킨리는 미국의 개입을 피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미국의 전함 메인호가 아바나 항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침몰한 사건이 일어나자(1898. 2. 15) 미국의 여론은 점점 무력 개입을 요구하는 쪽으로 움직였고, 의회 지도자들은 행동을 보여주기 원하는 대중의 요구를 충족시켜주기를 희망했다.

스페인은 상당한 정도의 양보를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증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문제를 의회의 결정에 맡겼다. 그런데 의회는 그에게 쿠바의 독립을 확보하기 위해 무력개입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1898. 4. 20). 단기전으로 끝난 이 전쟁에서 미국은 쿠바 영토와 영해에서 스페인 군대를 격파했다. 7월말 스페인은 휴전을 제의했다(메인호의 침몰, 미국-스페인 전쟁).

매킨리는 영토확장을 위해서 전쟁을 한 것이 아니었지만, 이전의 스페인 영토들을 어떻게 처분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부딪혔다.

그는 푸에르토리코, 필리핀, 그리고 전략적 위치에 있는 다른 섬들은 미국과 비우호적인 관계에 있는 세력에게 넘겨주어서는 안 되며, 따라서 그 영토들은 마땅히 미국의 보호령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일부 공화당 의원들은 이러한 '제국주의'에 반대했지만, 매킨리는 단호한 입장을 가지고 평화협상에 임했다.

매킨리는 반대 없이 공화당 대통령후보로 재지명되었고, 1900년 대통령선거에서 큰 표차로 승리해 재집권했다. 전쟁이 끝난 상황이었으므로, 그는 전쟁 때문에 가려졌던 2가지 문제에 관해 역설했다. 하나는 기업연합(독점)의 통제였고 다른 하나는 외국과의 무역을 촉진하기 위한 상업적 호혜주의 원칙이었는데, 후자는 이전의 입장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는 1901년 9월 6일 버펄로에서 열린 범미국박람회에서 무정부주의자인 레온 촐고츠의 총격으로 중상을 입어 대통령직을 그만두어야 했다.

그의 뒤를 이어, 부통령으로 있던 진보공화당의 테오도르 루스벨트가 대통령직을 계승했다. 신빙성 있는 전기로는 M. K. 리치의 〈매킨리 시대 In the Days of McKinley〉(1959)를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