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말러

구스타프 말러

다른 표기 언어 Mahler Gustav
요약 테이블
출생 1860. 7. 7,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칼리슈테
사망 1911. 5. 18, 오스트리아 빈
국적 오스트리아

요약 유대계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지휘자. 대표 작품은 <교향곡 8번>과 <대지의 노래> 등이다. 17년간 지휘자로 활동하면서 최정상에 올랐고, 1897년 37세의 나이로 빈 궁정 오페라의 예술감독이 되었다. 주로 후기 낭만주의의 요소를 집약시킨 여러 교향곡을 작곡했다. 말러는 생전에 대중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사후 50년이 지나 그가 작곡가로서 20세기 급진적 기법에 끼친 지대한 영향으로 인해 재평가 받았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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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지휘자로서의 경력
  4. 초창기 작품
  5. 중기 작품들
  6. 말기 작품들
  7. 평가
말러(Mahler Gustav)
말러(Mahler Gustav)

개요

보헤미아 태생의 오스트리아 작곡가·지휘자. 구스타프 말러는 여러 낭만주의적 요소들이 집약된 10곡의 교향곡과 관현악 반주에 의한 다양한 가곡들로 유명하다. 20세기 작곡기법에 있어 중요한 선구자로 인식되었으며 아르놀트 쇤베르크,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벤저민 브리튼 등과 같은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초기생애

구스타프 말러는 지금의 체크 남서쪽 변방에 위치한 칼리슈테(독일어로는 Kalischt)라는 보헤미아 마을에서 유대교 혈통의 오스트리아인 여관 주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구스타프 말러가 태어나고 몇 달 후 그의 가족은 이흘라바(독일어로는 Iglau) 근처로 이사했으며 그곳에서 유년기와 소년기를 보냈다.

유대인 혈통을 가진 말러는 어려서부터 인종 차별에 시달렸고, 이것은 그의 성격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독일어를 쓰는 오스트리아에서 말러는 소수민족의 일원으로 체크의 토착인들과도 어울릴 수 없었고, 오스트리아인에도 속할 수 없었다. 나중에 독일에서도 구스타프 말러는 보헤미아 출신의 오스트리아인, 유대인 양쪽 모두에게 이방인이었다.

또한 구스타프 말러는 부모 사이의 갈등으로 고통받았다. 독학으로 공부한 거세고 활동적인 성격의 아버지와는 달리 어머니는 교양있는 집안 출신의 섬세한 여인이었으며 아내의 사회적 우위에 대해 열등감을 가졌던 말러의 아버지는 폭력으로 그녀를 학대했다. 그결과 말러는 아버지와는 소원했던 반면 어머니에 대해서는 강한 집착을 보였는데 이러한 점은 신체적인 면에서도 나타났다.

다리를 약간 저는 습관은 불구였던 구스타프 말러의 어머니를 모방한 데서 생긴 것이었다. 유년시절 말러는 11명이나 되는 형제, 자매들이 질병과 죽음으로 시달리는 것을 보아왔고, 유전적으로 어머니의 약한 심장까지 물려받아 50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 불안정한 초기의 성장배경은 구스타프 말러의 삶과 음악에 팽배해 있는 정신적 긴장, 회의주의, 빈정댐,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찾으려는 끊임없는 추구 등에 대한 설명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말러를 작곡과 지휘의 대가의 위치에 올려놓은 엄청난 정열과 지적인 힘, 목표에 대한 불굴의 의지를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구스타프 말러의 기질 중에 긍정적인 요소들은 의심할 것도 없이 육체적으로 대단한 정력가였던 부계혈통을 물려받은 것이었다. 선천적으로 심장에 문제가 있었음에도 말러는 무자비할 정도로 철저한 음악감독이었고 수영을 매우 즐겼으며, 끈기있는 산악인으로서 지극히 활동적인 인생을 살았다.

어려서부터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던 구스타프 말러는 4세 무렵 근처 병영에서 들리는 군악과 체크의 노동자들이 부르는 노래에 매료되어 이를 아코디언과 피아노로 연주했으며 소품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자연의 소리와 더불어 군대음악과 민속음악은 커서도 구스타프 말러의 음악적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10세 때 이흘라바에서 피아니스트로 데뷔했으며 15세에는 이미 음악적으로 성숙한 모습을 보여 빈 음악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피아노와 작곡 분야에서 상을 받고 졸업한 말러는 작곡가로 인정받기까지 불규칙적인 개인 교습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주요작품 가운데 처음의 중요한 작품인 칸타타 〈탄식의 노래 Das klagende Lied〉로 빈 음악원의 베토벤 상에 응모했으나 실패했고, 이후 보다 안정된 생활을 위해 작곡은 긴 여름휴가에 하려고 잠시 미뤄두고, 지휘자로 변신했다.

7살의 말러(Mahler Gustav)
7살의 말러(Mahler Gustav)

지휘자로서의 경력

그후 17년 동안 구스타프 말러는 지휘자로서 최정상에 올라섰다.

오스트리아에서 소극(笑劇) 지휘를 시작으로 부다페스트와 함부르크를 포함한 여러 지역을 두루 거친 다음 1897년 37세의 나이로 빈 궁정 오페라의 예술감독이 되었다. 구스타프 말러는 지휘자로서는 일반 청중들로부터 찬사를 받았지만 작곡가로서는 처음의 창작기간 동안 대중들의 몰이해에 부딪쳤으며 이러한 시련은 일생 동안 그를 따라다녔다.

구스타프 말러가 주로 오페라 극장에서 지휘 활동을 했기 때문에 완숙기의 작품 모두가 교향악적인 작품(40곡의 가곡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리트가 아니라 불완전한 교향악적 악장들인데, 사실 그 가운데 몇몇은 교향곡 작곡을 위한 부분적인 기초로 사용되기도 했음)이라는 사실은 의외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리하르트 바그너와 프란츠 리스트 악파의 영향을 받은 구스타프 말러의 음악적 목표는 개인적인 세계관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본질적으로 자전적인 것이었으며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는 오페라라는 극적 수단보다는 가곡과 교향곡이 적합했다. 즉 가곡은 개인적인 서정성을 갖추고 있고 교향곡은(바그너와 리스트의 견해에 따르면) 주관적인 표현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초창기 작품

구스타프 말러의 창작시기는 3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매 시기마다 그는 각각 3부작 교향곡을 작곡했다.

초창기의 교향곡은 음악 외적인 이야기나 생각에 근거한 표제적인 기초에 입각하여 작곡했다. 이 교향곡들의 제목은 나중에 삭제했지만 고통과 죽음, 의혹과 절망이 지배하는 세계에 살고 있는 존재에 대한 궁극적 근거의 확립과 관련된 것이었다. 마지막에 가서 구스타프 말러는 베토벤의 교향곡 6번 F장조 〈전원 Pastoral〉과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 Symphonie fantastique〉의 예를 따라 그때까지 전통적으로 지켜지던 4악장 구조를 탈피하여 한 곡의 교향곡 안에 더 많은 악장을 포함시켰다.

시간의 확장과 다양한 음색을 내기 위한 여러 관현악법의 사용과 무제한적 감정 표현의 추구에 있어서는 바그너의 음악극을, 독창과 합창의 도입은 베토벤의 교항곡 9번 d단조 〈합창 Choral〉을 따랐고, 다른 작품에 자신의 가곡(독일의 민속 선집인 〈이상한 뿔피리를 가진 아이 Des Knaben Wunderhorn〉에 실린 시에 곡을 붙인 가곡, 혹은 민속 양식으로 쓴 자작시에 붙인 가곡 등)을 도입한 것은 슈베르트의 실내악을 따른 것이었다.

이러한 방법들과 더불어 구스타프 말러는 특유의 긴장을 주는 수사학적 양식, 놀랄 만큼 생동감 넘치는 관현악 처리, 대중음악에 대한 반어적 용법을 잘 구사함으로써 전대 미문의 폭넓은 대조를 보여주는 3편의 교향곡을 완성했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구스타프 말러의 빈틈없는 창조적 재능과 교향곡 구조에 대한 확고한 통제력으로 하나로 묶인다. 순전히 관현악으로만 된 교향곡 1번 D장조(다섯 악장 가운데 한 악장은 후에 삭제됨)의 표제는 말러의 어린시절을 그린 자전적인 것이다. 생의 환희는 칼롯(Callot : 대중음악에 대한 패러디) 기법에 의한 소름끼치는 〈장송 행진곡〉이 울리는 가운데 죽음에 대한 강박으로 뒤덮여지지만 결국 열렬하고 화려한 피날레로 끝맺게 된다.

5악장으로 구성된 교향곡 2번은 죽음에 대한 망상(첫 악장의 〈장례식〉)으로 시작되어 영생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신앙고백에서 절정에 이른다(거대한 끝악장은 심판의 날을 묘사하고 18세기 독일 작가 프리드리히 클롭슈토크의 〈부활〉에 곡을 붙인 독창과 관현악을 위한 송가로 마침). 교향곡 3번 역시 독창과 합창을 포함하고 있으며 보다 규모가 큰 6악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생명이 없는 자연에서 인간의 자각과 구원적인 신의 사랑으로 연결되는 생명의 대사슬이라는 디오니소스적 세계관을 표현한다. 이들 작품에 있어 종교적 요소는 매우 중요하다.

구스타프 말러는 불안정한 초기 성장 배경으로 인한 심적 장애와 유대교 신앙에 대한 결핍으로 인해(그의 아버지는 유대인이었지만 자유사상가였음) 형이상학적 고뇌의 상태로 이끌렸으나 후에 그리스도교로 귀의함으로써 이러한 문제는 일시적으로 해결되었다. 1897년 세례를 받은 것은 빈 오페라 극장에서 직책을 쉽게 얻으려는 편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리스도교로의 귀의가 절실한 동기에 의해 이루어졌음은 분명하다. 그곳에서의 10년 동안 말러는 보다 안정된 중기 창작시대를 맞았다.

새로운 신앙과 빈 오페라 극장 음악감독이라는 안정된 직위는 충만하고 자신감 넘치는 원숙기를 가져다 주었고 알마 마리아 슈니들러와 결혼함으로써 구스타프 말러의 생활은 더욱 안정되었다. 그녀와의 사이에는 1902년과 1904년에 태어난 두 딸이 있다.

중기 작품들

구스타프 말러는 빈 오페라 극장, 그리고 한 동안 빈 필하모닉 연주회의 감독으로 있으면서 아무도 다룰 수 없는 작품 해석과 새로운 연주 기준을 확립했다.

광적인 이상주의자였던 구스타프 말러는 개인적인 사정은 완전히 무시하고 무자비할 정도로 자신과 단원들을 몰아붙였기 때문에 그의 해직을 획책하는 적들을 만들게 되었다. 또한 같은 시기에 많은 순회 연주를 가짐으로써 유럽 각지에서 지휘자로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그 무렵부터 작곡을 위해 오스트리아의 알프스에서 여름 휴가를 보냈는데 이는 오히려 끊임없는 정신적·신경적 에너지의 소모를 의미하는 것으로 말러의 허약한 체질에 견디기 힘든 이중 부담을 안겨주었다.

중기에 작곡된 대부분의 작품들은 원숙기에 들어선 구스타프 말러의 맹렬한 역동성을 보여주고 있다.

보다 초기의 특성을 지닌 교향곡 4번만이 유일하게 예외에 속한다. 6악장으로 이루어진(결국 두 악장이 삭제됨) 이 작품에 포함된 피날레 악장은 원래 교향곡 3번의 한 악장으로 구상된 것으로, 그리스도교의 천국에 대한 순박한 촌부의 생각을 나타낸 소프라노를 위한 〈이상한 뿔피리를 가진 아이〉로 장식되어 있다. 또한 이 곡은 분명한 표제와 합창없이 일반적인 교향곡에 가까운 면모를 가지고 있고, 그런 점에 있어서 중기의 3대 교향곡인 5번·6번·7번 교향곡에 영향을 주고 있다.

이 교향곡들은 하드에지 추상화와 같은 선명한 색채감과 기하학적 도형미, 대위법적 명료성을 갖는 악기편성법을 보여주는 순수 관현악적인 작품이며 모두 표제의 사용을 피하고 있다. 그러나 각각의 작품은 정신적인 갈등을 구현시키면서 종결부에 그 갈등의 해결을 이룩하고 있다. 5번과 7번 교향곡은(두 작품은 모두 5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음), 비록 빛이 사후세계를 밝혀주는 것이 아니라 세속에서의 삶을 유쾌하게 하는 것이지만, 암흑에서 광명으로 나아간다.

이 두 작품 사이에 구스타프 말러 자신이 〈비극적 교향곡 Tragic Symphony〉이라고 한 4악장으로 된 교향곡 6번 A단조가 있는데 어렵게 암흑에서 벗어나서는 다시 완전한 밤으로 돌아간다. 이 세 교향곡 이후 말러는 교향곡의 한 악장 전체나 일정부분에 자신의 가곡을 도입하는 것을 중단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이상한 뿔피리를 가진 아이〉나 프리드리히 뤼케르트의 시에 곡을 붙인 연가곡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 Kindertotenlieder〉 등을 새로운 곡에 미묘하게 암시했다.

이 시기의 마지막에 구스타프 말러는 8명의 독창자와 2개의 합창단, 관현악을 위한 기념비적 작품인 교향곡 8번 Eb장조를 작곡했다.

구스타프 말러 자신이 붙인 것은 아니지만 이 작품이 필요로 하는 많은 인원 때문에 이 교향곡은 〈천인의 교향곡 Symphony of a Thousand〉으로 불리고 있다. 이 작품은 후기작품 중 초기의 광범위한 형이상학적 기법으로 전환해서 이것을 양식적으로 완성한 독자적인 작품이다. 이 곡은 합창과 관현악이 지속적으로 함께 등장하는 최초의 교향곡이다. 종교적 관점에서 보나 휴머니즘의 관점에서 보나 이 작품은 인류의 염원에 대한 웅대한 표명이며 밝은 세상을 위한 외침이라 할 수 있다.

보통 교향곡의 1악장에 해당하는 전체 2부분 가운데 첫번째 부분은 중세 가톨릭 교회의 오순절 찬미가인 〈생명의 창조주이시여 어서 오소서 Veni Creator Spiritus〉에 곡을 붙인 것이며 전통적인 교향곡의 3악장 형식을 합쳐놓은 것과 같은 2번째 부분은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신비스런 마지막 장면(파우스트의 속죄 장면)을 가사로 채택했다.

이 작품 이후로 원숙기의 절정에 오른 구스타프 말러의 자신감은 차츰 상실되었는데 6번 교향곡인 〈비극적 교향곡〉을 작곡하면서 이미 예감했던 재난들이 〈천인의 교향곡〉 이후 계속 뒤따랐기 때문이다. 〈천인의 교향곡〉에는 처음으로 말러의 성격에 내재한 미신적 요소가 드러나 있다. 피날레에는 "운명은 영웅에게 3번의 타격을 가하는데 그중 마지막 타격에 영웅은 나무가 베어지듯이 몰락하고 만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커다란 해머로 3번 내려치는 부분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이중 마지막 타격은 악보에서 빼버렸다.

후에 구스타프 말러는 이것을 1907년 자신에게 닥친 3번의 충격에 대한 전조로 생각했는데 그중 마지막 것은 바로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빈 오페라가 말러의 사직을 요구했고 3세된 딸 마리아가 죽었으며 의사가 그의 치명적인 심장질환을 진단했던 것이다.

말기 작품들

1907년을 기점으로 구스타프 말러의 말기가 시작되었고 47세의 말러는 다시 여기저기를 옮겨다녀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공연을 감독하고 뉴욕의 필하모닉 소사이어티의 지휘자가 되는 등 미국에서 지휘자로서의 명성을 새롭게 쌓아야 했다. 매년 여름 오스트리아의 시골로 돌아가 작곡했으나 1911년 결국 빈으로 돌아와 죽었다.

말기의 3대 작품은 〈대지의 노래 Das Lied von der Erde〉, 교향곡 9번, 완성되지 못하고(비록 사후에 연주용 완성판이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전체에 걸친 포괄적인 스케치만 되어 있는 교향곡 10번 F#장조인데 구스타프 말러는 이것들이 연주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이 가운데 구스타프 말러의 미신에 대한 성향이 다시 나타난 〈대지의 노래〉는 독일어로 번역된 중국시에 곡을 붙인 연가곡으로 시작하며 '테너, 바리톤(혹은 콘트랄토), 관현악을 위한 교향곡'이 되었다. 그러나 말러는 베토벤과 브루크너의 경우처럼 9번째 교향곡은 그 작곡자의 마지막 교향곡이 된다는 두려움 때문에 이 작품을 '교향곡 9번'이라고 부르려 하지 않았다. 그후 교향곡 9번의 작곡을 시작했을 때 말러는 반농담조로 이 작품이 '실제로는 10번째' 교향곡이므로 위험은 지나갔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교향곡은 결국, 구스타프 말러의 마지막 교향곡이 되었으며 그가 죽었을 때, 교향곡 10번은 스케치로만 남았다.

구스타프 말러의 가장 심오한 개인적 업적인 말기의 3대 작품들은 중기의 3대 작품들보다도 훨씬 더 과거로부터의 확실한 단절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작품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현대인의 근본적인 문제인 죽음의 실재성(그의 경우 죽음의 문제가 가상의 사건으로 인식됨에 따라 그 대립으로 설정했던 종교적 신앙이 파괴되었음)과 대화를 나누려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먼저 〈대지의 노래〉는 2부분으로 된 오라토리오 교향곡인 교향곡 8번과는 달리 6개 악장으로 된 연가곡 교향곡으로 냉소·탐욕·슬픔을 차례로 나타내는 베일에 가려진 시적 언어를 통해 인간 만사의 덧없음과 인간이 죽어서 볼 수는 없지만 계속되는 대지의 아름다움에 의해 받게 되는 슬픈 위안을 표현하고 있다.

4악장으로 구성된 순전한 관현악적 작품인 교향곡 9번에서 죽음에의 직면은 개인적인 고뇌가 되는데, 특히 마지막 악장인 〈론도-벌레스크 Rondo-Burleske〉는 구스타프 말러의 가장 현대적이고 예언적인 악장으로 공포와 쓰라림을 불러일으키면서 가슴 아픈 체념의 절정을 이룬다.

파국을 암시하기 위해 장황하게 길게 끄는 예외적인 방법으로 음악 짜임새를 해체하는 이 작품의 피날레는 오랫동안 인간 존재에 대한 구스타프 말러 최후의 언급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교향곡 10번에 대한 이해가 더해감에 따라 말러가 이 곡에서 보다 긍정적인 태도를 가졌음이 드러나고 있다. 이 작품의 다섯 악장들은 앞선 두 작품에서와 같은 갈등을 다루고 있지만 피날레 끝 부분의 체념은 무척 평온하고 긍정적이라는 해석이 새롭게 일고 있다.

평가

현대 비평가들은 20세기에 들어와 일어난 음악의 대변화에 끼친 구스타프 말러의 지대한 영향을 인정하고 있다.

구스타프 말러의 작품에는 20세기의 급진적 기법에 영향을 주기에 충분한 요인들이 발견된다. 이러한 요인들 가운데는 '경과적 조성'(처음 조성과는 다른 조성으로 작품을 끝마침)과 조성의 해체(반음계적 진행이나 그 조에 속하지 않은 화성의 사용을 통해 조성에 대한 느낌을 모호하게 함), 전체 관현악의 영역 안에서 독주 악기 그룹에 의한 대위법적 짜임새로의 이탈, 단순한 주제의 재현보다는 지속적으로 주제를 다양하게 변화시키는 원리, 대중 양식과 일상생활에서의 자연 음향(새소리, 나팔 신호)에 대한 풍자적 인용, 리스트의 '순환' 기법(한 악장의 주제를 같은 작품의 다른 악장에서도 사용함)에서 응용한 교향곡의 새로운 형식적 통합 방법 등을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