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흐무드

마흐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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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971
사망 1030. 4. 30(?), 가즈나
국적 가즈나

요약 가즈나 왕국의 술탄(998~1030 재위).
정식 이름은 Yamin al-Daula Abu'l-Qasim Maḥmūd ibn Seb대체이미지ktigin.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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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생애
  3. 의의

개요

현재의 아프가니스탄과 이란 북동지역에 걸쳐 있던 가즈나 왕국을 정복해 인도 북서지역과 이란의 대부분을 포함하는 정도로까지 넓혔으며, 수도 가즈나를 바그다드에 필적하는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가즈나 왕조, 이란사).

생애

투르크계 노예였다가 977년 가즈나의 지배자가 된 세뷔크티진의 아들로 998년 27세로 왕위에 올랐을 때 이미 뛰어난 행정능력과 정치수완을 보여주었다.

당시 가즈나는 작은 왕국이었다. 젊고 야심에 찬 마흐무드는 대군주가 되기를 열망해 20회 이상의 성공적인 원정을 통해 결국 카슈미르와 펀자브 및 이란의 대부분을 포함하는 광대한 제국의 기초를 다지는 부를 축적했다. 집권초 2년간은 가즈나에서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했다. 비록 독립국의 지배자이긴 했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바그다드의 아바스 왕조 칼리프에게 명목상의 충성을 표시했고, 칼리프는 그 대가로 자신이 점유하고 있는 지역의 합법적 지배자로서 마흐무드를 공인하고 정복에 나서는 그를 고무했다.

마흐무드는 1년에 1번씩 인도를 침입할 것을 맹세했고 사실상 그러한 원정을 17차례 행했다고 한다.

최초의 대전투는 1001년에 시작되었으며 마지막은 1026년에 끝났다. 첫 원정은 펀자브와 인도 북동지역을 목표로 했으며, 맨 마지막 원정은 구자라트 남부 해안의 솜나트에 이르렀다. 북인도에서 그의 주요한 적수는 펀자브 지배자였던 자이팔이었다. 1001년 그가 1만 5,000명의 기병대로 인도에 진군했을 때 자이팔은 1만 2,000명의 기병대와 3만 명의 보병, 그리고 300마리의 코끼리로 맞섰다. 페샤와르 근처 전투에서 인도인들은 비록 숫자와 장비면에서 우세했지만 이슬람 기병대의 맹공으로 1만 5,000명의 사망자를 내고 후퇴했다.

자이팔은 친족과 장교 15명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가 결국은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패배를 견딜 수 없어서 아들 아난드팔에게 양위한 후 화장용 장작더미에 올라가 그 불길 속에서 죽었다.

아난드팔이 인도의 다른 왕들에게 도움을 호소하자 몇몇은 몸소 찾아왔고 다른 왕들은 군대를 보내왔다. 인도 여인들은 군자금을 대기 위해 보석을 팔았다. 1008년 마침내 마흐무드는 이렇게 형성된 강력한 군사를 맞게 되었고 양측 군대는 운드와 페샤와르 사이에서 40일간 대치했다.

드디어 그는 인도측이 공격을 해오도록 유인하는 데 성공했다. 사나운 원시부족인 코카르 군대 3만 명이 술탄군의 양 측면을 맹렬히 공격하자 술탄의 군대는 퇴각을 명령하려 했다. 이 결정적인 순간에 아난드팔의 코끼리가 허둥대며 달아났다. 인도군은 자신들의 지도자가 도망치는 줄로 믿고 사상자로 뒤덮인 전투장에서 달아났다. 이 승리로 마흐무드는 인도 중심부까지 손쉽게 진격할 수 있었다.

펀자브를 합병해 엄청난 전리품을 갖고 돌아온 후 술탄은 가즈나를 예술과 문화의 중지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학자들을 후원하고 대학을 세웠으며 공원을 조성하고 모스크, 궁전, 대형 숙박시설을 건립했다. 마흐무드가 보인 모범을 귀족들과 궁중 조신들이 뒤따르자 가즈나는 곧 중앙 아시아에서 가장 뛰어난 문화 중심지로 탈바꿈했다. 1024년 술탄은 아라비아 해를 따라 카티아와르의 남쪽 해안에 이르는 유명한 마지막 원정에 착수해 솜나트 시와 그 시의 유명한 힌두교 사원을 약탈했다.

1026년 고향으로 돌아온 뒤 여생을 자신의 제국을 위협하는 중앙 아시아 부족들과의 전투로 보냈다.

의의

마흐무드는 이슬람의 깃발을 인도 중심부에 꽂은 최초의 인물이었다.

몇몇 이슬람 작가는 그를 자기 신앙의 위대한 옹호자이자 신의 영감을 받은 초능력적 지도자로 보았다. 반면 대부분의 인도 역사가들은 그의 군사적 약탈을 부각시켜 "탐욕스런 침입자이자 흉포한 약탈자"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양측이 모두 옳지는 않다. 인도 원정중 그는 주로 인도 사원의 엄청난 재물에 관심을 가졌다. 비록 열렬한 이슬람교의 옹호자이기는 했지만 인도인들을 함부로 다루지 않았고 또 그들에게 이슬람교를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는 이슬람교도의 반대를 무릅쓰고 중앙 아시아에서 현지 힌두교도들을 기용하는 데 성공해 힌두교도가 지휘하는 거대한 힌두 분견대를 두기도 했다.

이슬람교로 개종해야 술탄 군대에서 복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술탄은 위대한 전사였지만 예술과 문학의 후원자로서도 뛰어났다. 그의 관대함과 장려정책에 이끌려 뛰어난 많은 학자들이 가즈나에 정착했는데, 그중에는 수학자·철학자·천문학자이며 산스크리트 학자이기도 한 알 비루니와 위대한 서사시 〈Shāh-nāmeh〉의 저자인 페르시아인 페르도우시가 있었다.

마흐무드의 북인도 정복은 인도 아대륙과 이슬람 세계 간의 무역과 사상의 교류를 촉진시켰다. 그것은 인도의 문화를 외부에 유포하는 데에도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또한 마흐무드의 정복으로 이집트·그리스·로마·시리아 등 고대 민족들의 문화를 동화시키고 발전시켜온 이슬람 문화가 인도로 전해지는 통로가 열렸으며 많은 이슬람 학자·저자·역사가·시인들이 인도에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