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비히 1세

루트비히 1세

다른 표기 언어 Ludwig I 동의어 경건왕 루트비히, Ludwig der Fromme
요약 테이블
출생 778, 아키텐 푸아티에 부근 샤스뇌유
사망 840. 6. 20, 독일 페터사우에
국적 신성 로마

요약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영). Louis Ⅰ. 별칭은 경건왕 루트비히(Ludwig der Fromme).

프랑크 왕 샤를마뉴의 아들로 813년 공동황제가 되었다가 아버지가 죽고 나서 814년 황제가 되었다(프랑스사). 아들인 로타르·페팽·루트비히·카를에 의해 2차례나 권좌에서 쫓겨났으나 그때마다 복귀했다(830, 834). 그러나 그가 죽을 당시 카롤링거 왕조 치하의 제국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샤를마뉴 대제의 2번째 부인 힐데가르트(Hildegard the Swabian)에게서 난 5번째 아들로, 781~814년에는 주로 고문관들에게 의존하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아키텐을 통치했다.

그는 잘 관리되고 있던 막대한 토지를 상속받았고 다른 적자 형제들이 모두 죽어 왕권을 다투는 다른 경쟁자가 없었으므로 아버지가 죽기 직전인 813년 9월 11일 아헨에서 후계자 겸 공동황제로 책봉되었다. 814년 아헨에서 샤를마뉴가 죽어 제위를 계승했을 때 루트비히는 이미 전투에 상당한 경험을 쌓았으며 나이가 36세였고, 헤스바이에의 이르멘가르트와 결혼해 세 아들 로타르·페팽·루트비히(독일인 루트비히)를 두고 있었다.

루트비히의 첫번째 과제는 샤를마뉴의 유언장에 제시된 조항들을 이행하는 것이었다.

프랑크의 연대기 작가 아인하르트는 루트비히가 이 일을 매우 꼼꼼하게 처리했다고 썼지만 당대의 다른 자료에 나오는 이야기는 이와 또 다르다. 뒤이어 루트비히는 자기 가족들에게 제국의 일부분을 배분해주는 일에 착수했는데, 이 일로부터 평생 동안 그를 괴롭힌 난관과 재난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814년 8월 그는 로타르와 페팽을 각각 바이에른과 아키텐의 명목상 왕으로 봉했다. 또한 샤를마뉴가 813년 자신에게 물려주었던 이탈리아 왕위를 죽은 형 피핀의 아들 베른하르트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817년 베른하르트는 반란을 일으켰고 루트비히는 그를 장님으로 만들어 결과적으로 죽게 했다. 루트비히는 자기 친누이와 이복누이들을 수녀원으로 보냈으며, 그후에도 서출(庶出)인 이복형제 드로고·후고·테오도리히를 수도원에 보냈다.

817년 7월에 열린 아헨 의회에서 그는 페팽의 아키텐 소유권을 승인하고 바이에른을 루트비히에게 주었으며 공동황제 겸 후계자에 로타르를 임명했다. 샤를마뉴가 후계자를 지명한 것은 70대에 접어들어 죽기 몇 달 전이었는 데 비해 루트비히가 22살의 젊은 아들에게 그처럼 이르게 기대감을 안겨준 것은 환난을 자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루트비히는 아이를 더 낳으리라는 생각을 않고 있다가 이르멘가르트 황후가 818년에 죽자 4개월 후 바이에른의 유디트와 결혼해 823년 6월 그녀에게서 아들 카를(대머리왕 카를)을 얻자 829년 그에게 알레만니아를 주었다.

이에 로타르는 두 동생의 지원을 업고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를 폐위했다. 그러나 830년 10월에 열린 네이메헨 의회는 루트비히 1세를 복위시켰으며, 이듬해 2월 아헨 의회에서 제2차 배분이 이루어져 로타르는 이탈리아를 배당받았다. 832년 루트비히는 페팽에게서 아키텐을 빼앗아 카를에게 주었다.

3형제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4세의 지원을 얻어 2번째 반란을 일으켰고 알자스의 지골스하임 부근에서 회의를 열어 또다시 아버지를 폐위했다. 그러나 834년 3월 루트비히는 다시 제위에 복귀했으며 페팽 및 독일인 루트비히와 평화조약을 맺었다. 834년말 로타르는 혼자서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번에는 이탈리아로 밀려나야 했다. 이러한 성과에 힘입어 루트비히는 아헨 의회, 네이메겐 의회에서 더 많은 영토를 아들 카를에게 넘겨주었다(837~838). 3형제는 이 조치를 받아들였으나 감정이 좋지 않았다.

839년 독일인 루트비히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바이에른으로 되쫓겨왔다.

한편 838년 12월 페팽이 죽자 839년 5월 30일 보름스 의회에서 제4차 배분이 이루어져 제국은 로타르와 카를 사이에 양분되었고 독일인 루트비히는 바이에른만을 차지했다. 839년말경 독일인 루트비히는 군대를 이끌고 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반기를 들었다가 또다시 격퇴당했다.

루트비히 1세는 840년 7월 1일자로 보름스 의회를 소집했으나 의회가 열리기 전 잉겔하임 부근에 있는 라인 강의 한 섬 페터사우에에서 죽었다. 당시 그는 62세로서 거의 27년간 통치한 셈이었고, 이복동생 드로고 주교에 의해 메츠에 있는 장크트아르눌프 교회에 묻혔다.

루트비히는 자신이 평화롭게 상속받았던 제국을 내부 혼란에 빠뜨려놓았다.

대외적으로는 그다지 심각한 분쟁에 빠져든 적이 없었고 다만 데인족과 그밖의 종족들이 끊임없이 제국 침략을 감행했을 뿐이었다. 그의 네 아들이 829년부터 끊임없는 분란을 일으켰고, 로타르, 독일인 루트비히, 대머리 왕 카를 사이의 분쟁은 그가 죽은 후에도 수십 년 간 계속되었다. 그러나 많은 면에서 루트비히는 높이 평가할 만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경건왕(敬虔王)이라는 별칭은 아마도 그가 신앙심이 깊고 교회에 대해 관용적이었으며, 교회 일에 많은 관심을 쏟았고 훌륭한 교육을 받았던 데서 유래한 듯하다.

당대의 역사가들은 그에 대해 거의 일치된 판단을 내리고 있다. 리무쟁의 천문학자는 그가 역경에 처했을 때 불굴의 용기를 보여주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트리어 주교 테간은 그의 성격과 재능, 그리스도교적 자비심, 경건함, 사냥솜씨 등에 관해 길게 찬사를 늘어놓고 있다. 에르몰두스 니겔루스의 시는 그에 대한 찬양 일색이다.

아버지 샤를마뉴처럼 경건왕 루트비히도 12세기의 여러 무훈시(武勳詩)에 주인공으로 등장 했는데, 특히 〈기욤의 노래 Chanson de Guillaume〉·〈루트비히의 대관(戴冠) Couronnement de Louis〉·〈님의 손수레 Charroi de Nîmes〉 등이 주목할 만하다.

여기서 그는 상냥하지만 연약하고 우유부단한 통치자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