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 10세

레오 10세

다른 표기 언어 Leo X 동의어 조반니 데 메디치, Giovanni de' Medici
요약 테이블
출생 1475. 12. 11, 피렌체
사망 1521. 12. 1, 로마
국적 바티칸시티

요약 레오 10세는 로마를 유럽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고, 교황권을 유럽의 중요한 정치권력으로 끌어올렸던 인물이다. 르네상스 시대 교황들 가운데 가장 사치스러웠던 것으로 손꼽히는 그는 교황청 재산을 탕진하고, 당시 진전되고 있던 종교개혁에 맞서 통일된 서방 교회를 분열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마르틴 루터를 파문했다. 1513년 2월 21일 율리오 2세가 죽자 후임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율리오 2세가 시작해놓은 성 베드로 대성전 건축에 큰 관심을 보였고, 이 건축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전임 교황 때의 모금방법이었던 대사를 재승인했다. 이에 대해 마르틴 루터는 공개적으로 교황에 반대했고, 1521년 그는 파문을 선포했다. 그는 후대의 역사에 의해 정당성이 입증된 루터파 운동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생애와 성직경력
  3. 교황 선출
  4. 정치권력을 위한 투쟁
  5. 루터와의 갈등

개요

르네상스 시대 교황들 가운데 가장 사치스러웠던 인물로 손꼽힌다.

로마를 유럽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고 교황권을 유럽의 중요한 정치권력으로 끌어올렸다. 교황청 재산을 탕진하고, 당시 진전되고 있던 종교개혁에 맞서 통일된 서방 교회를 분열시키는 데 한몫했으며 1521년에는 마르틴 루터를 파문했다.

초기생애와 성직경력

피렌체 공국의 군주인 로렌초의 둘째아들로 태어난 조반니 데 메디치는 가문의 관습에 따라 날 때부터 종교적인 생활을 해야 했다.

8세의 어린 나이에 삭발례(削髮禮:머리카락을 깎아 신분이 평신도에서 성직자로 바뀌었음을 나타내는 의식)를 받았으며, 5년 뒤 도미니카에 있는 산타마리아 대성당의 부제급 추기경이 되었다. 아버지의 궁정에서 철학자 피코 델라 미란돌라(1463~94)를 비롯한 가정교사들에게서 유럽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젊은 성직자였던 1489~91년 피사대학교에서 신학과 교회법을 공부했다. 1492년 추기경단 일원이 되어 로마에서 일할 곳을 찾으려 애썼으나 같은 해에 아버지가 죽자 피렌체로 돌아가 형 피에로와 함께 살았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 선출 문제로 콘클라베(교황선거 비밀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다시 로마에 왔는데 로마에 가지 않았더라도 1494년 11월 메디치 가문의 다른 친족들과 함께 피렌체 공화국을 배반했다는 혐의로 피렌체에서 유배당했을 것이다.

당시 추기경이었던 메디치는 그뒤 6년 동안 북유럽을 두루 여행하고 1500년 이탈리아로 돌아와 로마에 정착했고, 형 피에로가 죽은 뒤 메디치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 1503년에는 콘클라베의 일원으로 먼저 비오 3세(9월)와 그 다음 율리오 2세(10월)를 선출하는 데 참여했다.

1511년 볼로냐와 로마냐에 대한 교황사절로 임명되어 이듬해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를 다시 장악하는 일을 감독했다. 비록 동생 줄리아노가 피렌체 공화국에서 서열이 제일 높았지만 실제로 다스린 사람은 추기경 조반니였다.

교황 선출

1513년 2월 21일 율리오 2세가 죽자 후임 교황을 선출하기 위해서 추기경회의가 소집되었다.

교황선거 비밀회의는 3월 4일에 열렸는데, 추기경들은 호전적인 전임 교황과는 달리 후임 교황이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기를 바라던 가운데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고 3월 11일에 메디치 가문 출신 추기경을 교황으로 선출했다. 레오 10세라는 칭호를 받은 교황 선출자는 3월 15일에 사제 서품을 받고, 17일에 로마 주교로 축성(祝聖)되었으며, 교황 대관식은 2일 뒤에 거행되었다.

37세의 새 교황은 르네상스 이상의 화신이었다.

그는 로렌초 데 메디치 궁정에서 청년시절을 보내면서 유럽에서 가장 세련된 상류사회의 생활방식과 취향을 체득했기 때문에 군인기질을 지녔던 전임 교황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율리오 2세 밑에서 10년을 지내면서 로마가 갈망하던 평화롭고 조용한 분위기에 매우 잘 어울렸다. 레오는 교회 재정을 비롯해 개인 재산도 사치스럽게 사용했고, 그의 후원으로 로마는 다시 서방세계의 문화중심지가 되었다. 율리오 2세가 시작해놓은 성 베드로 대성전 건축을 가속시켰고, 바티칸 도서관의 장서들을 크게 늘렸으며 예술을 번성시켰다.

교황의 경건성에서도 보르자 교황들(갈리스토 3세와 알렉산데르 6세) 때에 형편없이 떨어졌던 명성을 어느 정도 회복했다.

그는 교황이 되고 처음 5년을 제5차 라테란 공의회에 매여 지냈다. 율리오 2세가 죽기 2년 전에 소집한 이 공의회는 교권을 교황보다는 공의회에 두면서 지난 세기에 일어났던 공의회 운동을 다시 불러일으키고자, 9명의 반대파 추기경들이 피사에 공의회를 소집하려는 노력을 무산시키려고 했다(공의회 수위설). 2번 열린 피사 공의회는 처음에 독일 황제(막시밀리안 1세, 1459~1519)가, 나중에는 프랑스 왕(루이 12세, 1462~1515)이 지지를 철회함에 따라 실패했고, 라테란 공의회가 1512년에 열렸다.

공의회가 열리고 1년이 되기 전 교황이 된 레오 10세는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전야에 있던 교회가 절실히 필요로 한 전면적인 개혁을 주재할 뜻이 전혀 없었다. 참석자들이 적었고, 이탈리아 주교들이 주도한 그 공의회는 당시의 쟁점들을 가지고 토론을 벌였으나 교황으로부터 아무런 지시나 격려가 없었고 약 40년 뒤에 트리엔트 공의회를 소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절박함이나 문제의식도 없었다.

이로써 그 공의회는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격문을 붙일 날이 임박한 상황에서 별다른 조치 없이 해산했다(1517. 3. 16).

정치권력을 위한 투쟁

레오 10세는 그리스도교 교회의 수장이었을 뿐 아니라 교황령의 세속 군주이기도 했으며, 피렌체 공국을 지배하던 메디치 가문의 수장이기도 했다.

그는 이탈리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당시 널리 퍼져 있던 족벌주의(공적과 관계없이 친족에게 관직이나 이권을 부여하는 관습)에 의존했다. 영향력이 큰 피렌체 대주교직에 사촌이자 장차 교황(클레멘스 7세)이 될 지울리오 데 메디치를 임명했고, 동생 줄리아노와 조카 로렌초를 로마 원로원 의원으로 임명했다. 그는 이탈리아 중앙에 왕국을 만들어 군주가 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1516년 줄리아노가 일찍 죽는 바람에 이루지 못했다.

1517년초에 그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은 뒤 7월 1일에 그에 대한 대응으로 31명의 추기경들을 새로 임명했으며, 그로써 추기경단은 교황 지지자 일색이 되었다. 교황 암살미수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추기경 1명(알폰소 페트루키)이 교수형을 당했으며 다른 사람들은 투옥되거나 처형당했다.

레오 10세는 이탈리아를 지배하기 위해 투쟁을 벌이던 중 스페인의 막강한 군대와 프랑스 왕들의 단호한 반발에 부딪쳤다(이탈리아 전쟁). 프랑스의 루이 12세는 밀라노와 나폴리에 대한 소유권 주장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서 1513년에 이탈리아로 진군해 들어왔다.

레오는 마지못해 스페인을 맹주로 삼는 매클린 동맹을 맺었다. 프랑스 군대가 노바라에서 패하자 루이 12세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고 군대를 철수시켰으나 평화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1515년 프랑수아 1세(1494~1547)가 프랑스 왕이 되자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 레오는 스페인, 신성 로마 제국, 영국과 새로 동맹을 맺었으나 마리냐노 전투에서 프랑수아에게 패했다(1515. 9. 14). 교황은 프랑스 왕과 화해하고 볼로냐 협약으로 그것을 뒷받침했다.

1516년 8월 18일에 교황 칙서형식으로 공포된 이 협약은 그후 275년 동안 프랑스의 교회-국가 관계를 결정해주었다. 비록 교황들은 교황청과 그외 몇몇 교구에서 공석중인 성직에 후보자들을 지명할 권한을 그대로 갖긴 했으나, 그외 지역들에서 주교·대수도원장·소수도원장에 대한 지명권은 프랑스 왕들에게로 넘어갔다.

교황은 명목상으로는 언제나 왕의 성직자 지명에 대해 거부권을 갖고 있었으나 실제로 평신도 군주의 지명은 곧 임명과 다름없었다.

프랑스에서 왕들이 교회를 통제했다는 사실을 알면 16세기에 일어난 프로테스탄트 운동에 대해서 프랑스 왕들이 왜 무관심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1519년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가 죽자 레오는 정치투쟁에 더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합스부르크가 왕위 계승 후보자 스페인의 카를로스(1500~58)는 1516년에 외조부인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1452~1516)와 외조모 카스티야의 이사벨라 1세(1451~1504)를 계승한 바 있었는데, 이제 합스부르크가의 후보자가 되어 조부 막시밀리안의 뒤를 잇는 강력한 독일 왕의 자리에 오를 것을 꿈꾸었다.

그러나 프랑수아 1세와 작센의 현명왕 프리드리히(1463~1525)는 재빨리 자기들이 왕위 계승 후보자라고 선언하고 나섰다.

레오는 신성 로마 제국이 프랑스나 스페인에 합병될 경우 이탈리아가 승자의 손에 들어가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프리드리히를 지지했다. 그러나 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로 선출되자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레오는 중립을 지키려고 하다가 프랑수아가 다시 이탈리아를 침공하자 새 황제 편에 섰다.

루터와의 갈등

레오 10세는 계속 돈이 드는 사업을 펼쳤기 때문에 항상 새로운 수입원을 만들어야만 했다.

프랑스와 치른 전쟁들, 예술에 대한 아낌없는 후원, 성 베드로 대성전 건축, 그리고 투르크에 대한 십자군원정 계획 등이 교황청의 재정을 압박했다. 1가지 중요한 수입원은 오랫동안 시행해온 대사(교회가 정한 일정한 조건을 충족하는 사람에게 잠벌을 면해주는 것) 선포였다. 율리오 2세 때 성 베드로 대성전 건축을 위한 모금방법으로 대사 선포를 공식화했는데, 이 건축사업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레오는 교황이 된 직후 대사를 재승인했다.

그러나 북유럽에서는 주로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대사가 인기를 끌지 못했다. 따라서 1517년초에 비로소 도미니쿠스 수도회 탁발 수사들이 마인츠와 마크데부르크(독일) 대주교구에서 대사에 대한 설교를 시작하게 되었다. 마르틴 루터는 이러한 설교를 반박하는 95개조 격문을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붙였다.

1518년 루터의 사상이 로마에까지 알려지게 되자 레오는 루터가 소속해 있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총회장에게 말썽거리 수사인 루터를 징계하라고 명령했다.

이 일이 실패하자 레오는 작센의 군주 프리드리히를 통해서 루터의 징계를 다시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519년 여름에 라이프치히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가톨릭 신학자 요한 에크(1486~1543)는 루터가 3가지 이유에서 이단임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게 만들려고 했다. 1520년 6월 15일, 레오는 41가지 이유를 들어 루터를 이단으로 정죄하는 문서를 발행하고, 그에게 60일 이내에 로마의 권위에 굴복하지 않으면 파문당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때 독일에서 영향력있는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던 루터는 공개적으로 교황에 반대했다. 별다른 대안이 없게 된 레오는 1521년 1월 3일 파문을 선포하는 파문 교서(Decet Romanum Pontificem)를 발행했다.

레오 10세는 후대의 역사에 의해 정당성이 입증된 루터파 운동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로마 가톨릭 교회는 영국의 개혁가 존 위클리프(1330경~84), 보헤미아의 개혁가 얀 후스(1372/73경~1415), 르네상스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1466경~1536)의 가르침에도 그당시에는 잘 버티고 있었다.

레오는 루터를 단순히 일부 신자들을 잘못 인도하는 이단자 정도로 보았으며, 때가 되면 참신앙이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욱이 독일의 정치 분위기는 루터와 그의 지지자들을 강력히 규제하기에 유리하지도 못했다. 이로써 새로운 운동은 비교적 교황권의 간섭을 받지 않은 채 북부에서 급속히 퍼져나갔다. 1521년 12월 레오 10세는 이탈리아 내부의 정치적 혼란과 북유럽 전역에 번져가던 종교적 동요를 남겨두고 갑자기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