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로슈푸코

라 로슈푸코

다른 표기 언어 François VI, duc de La Rochefoucauld
요약 테이블
출생 1613. 9. 15, 파리
사망 1680. 3. 16/17, 파리
국적 프랑스

요약 프롱드의 난 때는 가장 적극적으로 참가하였으며 뒤에는 '잠언'(귀에 거슬리고 역설적인 진실을 경구로 간결하게 표현하는 프랑스 문학형식)의 대표적인 작가가 되었다. 그는 가장 간결하고 재치있게 예절과 행동에 대한 격언들을 지어내는 것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그의 경력에서 언급해둘 필요가 있는 2가지 특징은 용기와 소송으로, 이런 것들은 그의 작품에서 많은 것들을 설명해준다. 전쟁을 겪어본 사람이라야 용기나 비겁에 관한 금언을 서술할 수 있다. 그는 6년 동안 3차례 이상의 교전에서 부상당했다. 1655년까지는 별로 문학활동을 하지 않았다. 동시대인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여인이었던 사블레 부인이나 라파예트 부인과의 우정 때문에 잠시 정치활동에서 벗어나 있는 동안 독서와 지적 대화를 통해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잠언집〉은 생전에 5판이 발행되었으며 매판마다 수정·보완되었다.

프롱드의 난 때는 가장 적극적으로 참가하였으며 뒤에는 '잠언'(箴言 maxime : 귀에 거슬리고 역설적인 진실을 경구로 간결하게 표현하는 프랑스 문학형식)의 대표적인 작가가 되었다.

프랑수아 라 로슈푸코 백작과 그의 부인 가브리엘 뒤 플레시 리앙쿠르 사이에서 태어났다.

1628년 앙드레 드 비본과 결혼하여 4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을 두었다. 1629년 이탈리아에서,1635~36년 네덜란드와 피카르디에서, 다시 1639년에는 플랑드르에서, 스페인과의 전쟁에 참전했다. 라 로슈푸코 부자의 공직 생활은 귀족에 대해 위협과 회유를 번갈아하던 루이 14세 정부의 정책에 좌우되었다. 아버지는 공작으로서 푸아투를 통치했지만, 뒤에 가문의 충성심을 의심받자 지위를 박탈당했다.

라 로슈코푸는 어린 왕의 재상이었던 마자랭 추기경의 승인으로 1646년 푸아투의 통치권을 회복할 수 있었다. 1650년 베르퇴유에 있던 그의 성(城)은 별 경고도 없이 왕권에 의해 파괴당했다. 이러한 사실은 1648~53년의 프롱드의 난이 일어나게 된 주요한 원인, 즉 지방에서 독자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던 귀족들에 대한 군주의 불신과 두려움을 시사해준다.

평생을 통해 여자의 정에 약했던 그는 당시의 어느 누구보다도 많은 공격을 받았다.

1635년 셰브뢰즈 공작 부인의 유혹에 빠져 루이 13세의 재상인 리슐리외 추기경에 대한 음모에 가담했다. 이 모험으로 그는 리슐리외와의 굴욕적인 접견 후 8일 동안 바스티유 감옥에 감금, 2년 동안 베르퇴유로 추방당했다. 그뒤 그는 마자랭을 증오하고, 안 드 부르봉(롱그빌 공작 부인으로 프롱드의 지도자였던 대 콩데의 누이)에게 헌신했는데, 그결과는 훨씬 참담한 것이었다.

〈회고록 Mémoires〉에서 그는 반란(1648~53) 동안 이에 가담한 귀족들이 지리하게 되풀이해 책략을 꾸미고 행동한 과정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콩데 가문에 대한 충성으로 그는 왕의 신임을 얻지 못했으며, 이로 인해 왕정의 개혁을 위한 어떤 정책도 실행하지 못했다. 1651년의 마드리드 조약은 프랑스 귀족에 대한 스페인의 원조 약관으로서 그 초안을 보면 개인적 야심이 왕족과 귀족들의 개혁 의지를 빼앗던 당시에 그가 얼마나 반란에 깊숙이 빠져 있었는지를 알게 해준다.

그는 이 조약에 조인했을 뿐 아니라 직접 초안을 기초했다는 설도 있다.

이밖에도 그의 경력에서 언급해둘 필요가 있는 2가지 특징은 용기와 소송으로, 이런 것들은 그의 작품에서 많은 것들을 설명해준다. 전쟁을 겪어본 사람이라야 용기나 비겁에 관한 금언을 서술할 수 있다. 그는 6년 동안 3차례 이상의 교전에서 부상당했다. 얼굴과 목의 상처들로 더이상 전투를 할 수 없었고, 건강은 엉망이 되었으며 마음의 평화는 사라져버렸다.

전쟁으로 재정상의 어려움은 더해졌다. 그의 토지들은 대부분 저당잡혀 있었으며, 대리인의 빈틈없는 배려가 없었다면 1660년부터 유지해왔던 파리 중심부의 저택도 잃어버렸을지 모른다. 안락한 생활을 위해서 뿐 아니라 끊임없는 소송으로 돈이 들어갔다. 주로 다른 귀족 가문들을 상대로 전례나 궁정의식에 관한 문제들로 3년 동안 적어도 5차례 이상 소송을 벌였다.

1655년까지는 별로 문학활동을 하지 않았다.

동시대인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한 여인이었던 사블레 부인이나 라파예트 부인과의 우정 때문에 잠시 정치활동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 같으며, 차츰 왕의 호의를 회복해 1661년말에는 성신 기사단(ordre du Saint-Esprit)에 가입할 수 있었다. 피에르 코르네유의 고전 비극이나 〈작시법 L'Art poétique〉 원칙에 충실한 니콜라 부알로의 교훈시 낭송을 들으며 그는 서클의 다른 남녀들처럼 독서와 지적인 대화로 시간을 보냈다. 이 모임은 한 가지 새로운 게임을 통해 분위기를 돋우었는데, 그것은 가장 간결하고 재치있게 예절과 행동에 대한 격언들을 지어내는 것이었다.

남아 있는 그의 자필 원고들을 보면 그는 분명히 이 게임의 도덕적이고 지적인 주제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 자기의 생각들을 기록하고 설명한 것 같다. 그의 책은 대중의 구미에 맞아 네덜란드에서 그의 글 중 일부가 몰래 불법 출판되어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해야만 했다. 그의 〈잠언집〉은 생전에 5판이 발행되었으며 매판마다 수정·보안되었다.

잠언

잠언
잠언

제1편은 1665년 〈도덕에 대한 성찰과 잠언 Réflexions ou sentences et maximes morales〉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는데 경구만 수록되지는 않았다.

가장 감동적인 항목은 이기심에 관한 묘사로서, 그는 삶의 모든 양태와 인간의 모든 행동 속에서 이기심을 발견했다. 3쪽에 달하는 이 항목은 제1판에만 들어 있고, 그 이후는 작자 스스로가 삭제했다. 자필 원고에는 오랫동안 마음속에 간직해왔던 잠언들도 보이는데, 때로 여러 가지 이본(異本)들에서 일련의 연관된 문장들이 아주 간결하게 다듬어져가는 과정을 볼 수 있다. 또한 일반적인 명제 속에서 프롱드나 정치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이 종종 거친 표현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예컨대 "죄악은 그 수와 성격에 따라 무죄가 되거나 심지어는 미덕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공공연한 강도짓이 교묘하게 이룬 업적이 되기도 하며 한 지방을 부당하게 장악하면 정복이라고 불린다. 미덕처럼 죄악도 자신의 영웅들을 간직하고 있다"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들이 적개심으로 받아들여지거나 혹은 자신의 정치적 태도를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인지 "악도 선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영웅들을 간직하고 있다"(잠언 제185번)처럼 거의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제외하고는 이런 유의 잠언을 쓰지 않았다.

후세의 독자들은 당대의 사람들이 막연하고 모호해 보이는 말들을 통해 그 시대의 역사를 읽고자 했다는 사실을 잊기 쉽다. 프롱드의 난은 그에게는 최악의 경우라도 인간의 동기들을 드러내보이는 그런 역사의 한 순간이었다. 관습적인 도덕심 밑에 깔려 있는 이기주의를 폭로함으로써 그는 냉소가라는 평판을 받았지만, 그의 동시대인들 역시 그만큼 가혹했다.

설명없이 간결한 경구들은 회고록에 들어 있는 비슷한 내용의 글보다 훨씬 냉소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냉소 이상의 것을 전달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상주의에 대한 고백 저변에서 그는 끊임없는 자기보존의 욕구를 지적하고 있다. 그는 순수한 미덕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다. 다음과 같은 경구들은 그러한 시각을 잘 보여준다.

"강물이 바다로 사라지듯 미덕은 이기심 속으로 사라진다." 또는 바다의 이미지를 반복하여, "그런 것이 자기애의 모습이다.

모든 삶이란 끊임없이 계속되는 자기애의 거대한 작동이다. 바다야말로 자기애의 생생한 이미지이다. 끊임없이 파도치는 바다의 밀물과 썰물 속에서 자기애는 자신의 사유와 쉼없는 충동 사이에 계속되는 혼란과도 비슷한 것을 발견한다."

그는 쾌락주의자로 불렸으나 풍부한 상상력을 지닌 통찰력 때문에 어떤 교조에도 얽매이지 않았다. 미셸 드 몽테뉴와 블레즈 파스칼처럼 그도 인간의 주위에는 많은 불가사의가 있어서 인간의 노력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며 그 지식을 비웃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 인간에 대해 그가 알지 못하는 많은 것들이 있으며 사유와 존재, 인간 자신과 인간의 행위 사이에는 간격이 있음을 깨달았다.

"자연은 우리에게 훌륭한 자질들을 부여하나 그것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기회가 필요하다." 어떤 잠언들은 무기력한 힘을 존중하는가 하면 또다른 잠언들은 힘에 대한 거의 니체적인 숭배를 드러내고 있다. 이런 모든 통찰들은 프랑스 고전주의 학파에 공통된 것처럼 보인다. 그는 귀족 신분으로 작가라고 불리는 것을 경멸했지만 이 유파의 뛰어난 일원이었다. 그가 명성을 얻고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영향을 끼친 것도 이러한 통찰 때문이었다.

그의 추종자로는 영국의 웅변가이며 저술가인 체스터필드 경, 소설가이자 시인인 토머스 하디,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 게오르크 크리스토프 리히텐베르크, 프랑스의 작가이며 비평가인 스탕달, 샤를 오귀스탱 생트 뵈브, 앙드레 지드 등이 있다.

그렇지만 그의 영예는 사상가라기보다는 예술가로서의 것이다. 그는 다양하고 교묘한 언어의 배열을 통해 주옥 같은 잠언을 만들어냈다. 잠언의 가치는 반드시 그 진실한 내용에 있지 않으며, 그보다는 오히려 진실의 새로운 측면을 드러내보이는 극적인 언어에 있다.

그는 그 이상의 것을 할 시간이 없다고 서술하고 정의하면서도 단순하고 명확한 이미지를 경탄스럽게 사용한다. 어떤 때는 마지막 한 단어가 그 앞의 말들을 역설적으로 뒤엎는 효과를 나타내기도 한다.

예컨대 "사람들이 아낌없이 베푸는 것은 충고뿐이다"라든가, "혼자서만 현명해지겠다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일이다" 같은 잠언들이 그런 것이다.

그는 1665~78년 〈잠언집〉의 5번의 간행을 위임했으며 마지막 판이 나온 2년 뒤에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여러 해에 걸쳐 상당한 분량의 글을 썼지만 실제로 출판된 것은 〈회고록〉·〈잠언집〉뿐이다. 이들 책 외에 약 150통에 달하는 편지가 수집되었으며, 〈성찰 Réflexions diverses〉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19편의 단문들이 있다. 이밖에도 그가 초안한 조약이나 협정들이 있으나, 〈잠언집〉만이 천재적인 작품으로 그의 전 저작을 대표하고 있다. 그보다 나이어린 동시대인 장 드 라 브뤼에르와 같이 그도 1권의 저자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