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 벌레라

드 벌레라

다른 표기 언어 Eamon De Val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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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82. 10. 14, 미국 뉴욕 뉴욕 시
사망 1975. 8. 29, 아일랜드 더블린
국적 아일랜드

요약 아일랜드의 정치가.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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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정치가로서의 성장
  4. 평가

개요

1913년부터 독립투쟁에 적극 참여하여 1918년 신페인당의 총재가 되었고 1924년 피어나팔당을 설립했다.

아일랜드 자유국은 그의 노력에 힘입어 1937년 독립을 성취했고 주권국가 아일랜드(에이레)로 탄생했다. 국립아일랜드대학교의 총장을 지내는 등 학문적 공헌을 인정받기도 했다.

초기생애

미국에서 태어난 드 벌레라는 유아기에 부모를 잃고 아일랜드 리머릭 군의 외가에 보내져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리머릭의 공립학교와 더블린에 있는 블랙록대학에서 공부한 뒤 로열대학교에 진학했다. 졸업 후 수학교사가 되었고 아일랜드어 부활운동을 열렬히 지지했다. 1913년에는 반독립파에 대항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직된 아일랜드 의용군에 가담했다. 1916년 더블린에서 '부활절 봉기'를 주도하여 주요건물을 접수하고 끝가지 항전하다가 체포되었으나 미국 태생이라는 이유로 처형은 면하고 강제노역형을 선고받았다.

1917년 다시 체포되었으며 이듬해 5월 영국으로 강제이송되었다.

아일랜드인들은 반영(反英) 봉기의 생존자인 드 벌레라를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했고 신페인(Sinn Féin:아일랜드어로 '우리 스스로'라는 뜻)당의 총재로 선출했다. 1918년 12월의 선거에서 신페인당은 전국 3/4의 선거구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1919년 2월 드 벌레라는 링컨 교도소를 극적으로 탈출, 독립자금모금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드 벌레라는 정전협정(1921)으로 영국군의 탄압이 종식되기 직전 귀국했고 자치협상을 위한 전권대사로 임명되어 런던에 파견되었다. 그는 자유국 성립에 관한 영국-아일랜드 조약에 반대했는데 북아일랜드(얼스터)가 자치령에서 배제되고 영국 왕실에 대한 충성의 서약이 전제되었기 때문이었다.

정치가로서의 성장

조약이 근소한 표차로 국민의회(달 어린)의 비준을 얻자 드 벌레라는 공화파의 조약거부 주장에 동조했고 아일랜드는 내란으로 빠져들었다.

윌리엄 토머스 코즈그레이브 내각에 의해 투옥되었다가 1924년에야 풀려난 그는 공화당을 설립하여 장외투쟁을 시작했으나 1927년이 되자 당원들을 설득했고 피어나팔(Fianna Fáil:아일랜드어로 '아일랜드의 전사'라는 뜻)당을 창설하여 의회에 복귀했다. 그는 의회에서 충성의 서약, 영국 총독, 상원(세이나드)을 폐지할 것과 토지대상금(土地代償金)의 지불거부를 역설했다.

코즈그레이브 내각은 1932년의 선거에서 피어나팔당에 패배했다. 내각의 수반이 된 드 벌레라는 즉시 영국과의 관계단절에 착수했고 토지대상금의 지불보류를 주장하여 '경제전쟁'을 야기했다. 양국이 서로 보복조치를 취해가는 과정에서 아일랜드는 보호관세를 통하여 산업을 육성하는 등 자급자족 정책을 시행하게 되었다. 1937년 자유국은 영국 왕실에 대한 자발적인 충성을 인정하면서 주권독립국가 에이레로 새롭게 출범했다.

드 벌레라의 위신은 국제연맹이사회(1932) 및 총회 의장(1938)에 취임함으로써 크게 신장되었다.

1938년 제2차 세계대전이 임박하자,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 총리는 양국의 양해 아래 경제전쟁을 끝낼 것을 제안하고 아일랜드 내 코브·베러헤이븐·락스윌리 기지로부터 해군을 철수시켰다. 드 벌레라 총리는 아일랜드가 대전에서 중립을 지킬 것이며 공격에 대항하여 보복공세를 취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에이레는 전쟁으로부터 야기되는 여러 손실을 피한 상태에서 잠정적으로 번영을 이룰 수 있었고 드 벌레라는 차기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다.

1948년 피어나팔당의 오랜 집권은 반동을 초래했고 소수당 세력을 규합한 존 A. 코스텔로가 연립내각을 구성했지만 정국불안정으로 3년이 채 못되어 붕괴되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코스텔로 내각이 사퇴하고 드 벌레라가 재집권한 것은 아일랜드의 정체를 공화국으로 바꾸어 놓는 법제정 이후의 일이었는데 그는 이러한 입법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1954년 코스텔로의 제2차 연립내각이 구성되었다. 이제는 물가상승과 계속되는 국외이민 그리고 낙후된 농업이 양세력 모두의 해결과제로 부상했다.

연립내각이란 어차피 미약하고 불안정한 처방이므로 강력한 단일정당 내각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한 드 벌레라는 1957년 3월의 선거에서 절대다수 득표에 성공했다. 1959년 드 벌레라는 총리직과 당총재직을 버리고 대통령에 입후보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같은 해 6월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1966년 재선되었다. 1973년 은퇴하여 더블린 근교의 요양원에서 지내다가 2년 뒤에 죽었다.

평가

드 벌레라의 정치활동은 아일랜드의 문화적·민족적 각성기에 이루어졌다.

그는 반식민주의 지도자, 국가체제 정비자, 아일랜드 해방의 상징으로서 독립 이후 반세기 동안 에이레를 통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