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나투스파

도나투스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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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북아프리카에 있었던 그리스도교 단체.

312년 카르타고의 주교로 카이실리아누스를 선출함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문제 때문에 가톨릭 교회에서 갈라져 나온 교파로 그 이름은 지도자 도나투스(355경 사망)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역사적으로는 소아시아의 몬타누스파와 노바티아누스파 운동 및 이집트의 멜리티우스파가 생겨난 초대 그리스도교의 전통에 속한다. 교회 문제에 대한 국가의 간섭을 반대했고, 키르쿰켈리오파라 부르는 농민 전사(戰士)들이 있어서 종말론적인 희망과 결합된 사회혁명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철저히 종교적이었던 이들의 목표는 참회의 삶과 거기 뒤따르는 순교였다. 도나투스파 교회는 차례로 북아프리카를 통치했던 로마·반달족·콘스탄티노폴리스의 계속되는 압제에도 불구하고, 북아프리카에서 그리스도교가 사라진 중세 초반까지 존속했다.

이 종파가 떨어져 나오게 된 궁극적인 원인은 교리와 사회적인 문제였다.

3세기 아프리카 교회에 널리 보급된 전통에서는 교회를 선택받은 자들의 단체로 간주했다. 이러한 견해는 키프리아누스의 지지를 받고 초기 논쟁에 대응하면서 발전했는데, 그결과 성직자 활동의 타당성은 성직자 안에 성령이 함께 하는가에 달려 있으며, 은혜 가운데 있지 않은 성직자는 합당한 성찬식을 거행할 수 없다는 믿음이 생겨났다. 동시에 부와 죄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생겨나서 맘몬(부의 신)과 로마는 둘 다 똑같이 피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카이실리아누스는 311년에 주교로 선출되었으나 배교(背敎)를 했던 주교(303년부터 시작된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성서 사본을 넘겨준 주교)에게서 주교서품을 받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았다. 카르타고 주교 서품권을 40년간이나 가지고 있었던 누미디아의 수석주교인 세쿤두스(Secundus of Tigisi)는 70명의 주교들과 함께 카르타고에 와서 카이실리아누스의 선출이 무효임을 공의회에서 선언했다.

그리하여 공의회는 낭독자 마조리누스를 카이실리아누스 자리에 앉혔다(성사).

새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이 다툼을 중재하도록 명령했다. 로마 주교 밀티아데의 주재로 이탈리아와 갈리아 주교들로 구성된 위원회는 313년 10월 2일 카이실리아누스가 모든 비난에 대해 결백함을 발견했다. 그간 마조리누스 자리를 도나투스가 대신해 있었고, 그는 밀티아데의 판정에 반대했다.

콘스탄티누스 (Constantinus)
콘스탄티누스 (Constantinus)

314년 8월 1일 콘스탄티누스는 아를에 제국 서부지역 주교들이 모이는 공의회를 소집했다. 카이실리아누스는 여기서 다시 지지를 얻었으며, 비록 배교자 주교가 내린 주교서품이라 하더라도 그 서품식 자체는 무효가 아니라는 교회법에 의해 그의 지위는 더 공고해졌다. 도나투스와 그의 지지자들이 더 항소를 했지만, 콘스탄티누스는 316년 11월 카이실리아누스에게 유리한 최종 판결을 내렸다.

분열은 계속되었고 317~321년에 걸친 박해가 실패로 돌아가자, 콘스탄티누스는 321년 5월 마지못해 도나투스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락했다.

도나투스파 운동은 몇 년 동안 세력을 확장했으나 347년 8월 황제 콘스탄스 1세는 도나투스를 비롯한 여러 지도자들을 갈리아로 추방했고, 도나투스는 355년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361년 배교자 율리아누스가 황제가 되었을 때, 추방되었던 도나투스 추종자들이 아프리카로 돌아와 그후 30년 동안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그리스도교파가 되었다. 그러나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가 이끄는 반대파들이 세력을 얻어 411년에는 아우구스티노의 친구이자 황제의 호민관이었던 마르켈리누스가 주재하는 회의가 카르타고에서 열렸다.

이 공의회에서는 도나투스파에게 불리한 결정을 내렸다. 412년과 414년에는 도나투스파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속인과 교인으로서의 권리를 법률적으로 엄격하게 부인했다. 그러나 도나투스파는 세상으로부터의 적대를 순리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도나투스파는 7세기까지 존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