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학

남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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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862년경 이운규(李雲圭)에 의해 창설된 신종교.

창교의 이유나 경위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다.

단 이능화(李能和)의 〈조선도교사〉에 의하면 "서학이 동학에게 망하고, 동학이 북학에게 망하고, 북학이 남학에게 망하고, 남학이 중학에게 망한다"는 비결이 당시에 유행했다고 하는데, 이러한 비결의 유포나 당시의 격변하는 사회상황이 남학 창교의 배경으로 작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운규는 1804년에 태어나 이서구(李書九)의 문인으로 있다가 문과에 급제하여 참판을 지냈다.

그는 각종 도가서(道家書) 및 역학에도 매우 심취하여, 마침내 후천(後天)의 역리(易理)인 정역(正易)의 이치를 규명했다고 한다. 이에 그는 서울을 떠나 충청도 연산으로 옮겨가 제자들을 거느리고 가르침을 베풀었다. 그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으로는 후에 〈정역 正易〉을 저술한 일부(一夫) 김항(金恒)과 그의 아들인 용래(龍來)·용신(龍信), 후에 오방불교(五方佛敎)를 창교한 김치인(金致寅, 또는 光華) 등이 있다. 일부계(一夫系)의 전승에는, 이운규가 어느날 김항·김치인·최제우(崔濟愚)를 불러놓고 "최제우와 김치인은 선도(仙道)와 불도(佛道)를 대표하여 이 세상에 나왔고, 김항은 공자의 도를 이어받아 장차 크게 천시(天時)를 받들 것이다"라고 했다 하여 김항의 위상을 높이고 있으나 이는 일부계의 과장일 가능성이 높다.

이운규는 선후천교역운도(先後天交易運度)에 의해 지상선계(地上仙界)가 열릴 것이라는 가르침을 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의 구체적 내용은 알 수가 없고 단지 김항·김치인의 저술이나 교리에서 그 내용을 단편적으로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이운규의 가르침을 근간으로 한 남학은 크게 2계열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영가무도교(詠歌舞蹈敎)를 창교한 김항의 일부계이며, 다른 하나는 오방불교를 창교한 김치인의 광화계(光華系)였다. 김항은 유교를 중심으로 하여 불교와 선교를 통합하였으며, 김치인은 불교를 중심으로 하여 유교와 선교를 통합하였다고 평가된다.

김항은 36세 때 스승 이운규로부터 '영동천심월'(影動天心月)이라는 오언절구를 전해받고 19년 동안 깊이 연구한 끝에 그 뜻을 깨우쳤다고 한다.

이후 정역팔괘도(正易八卦圖)와 대역서(大易序)를 얻고, 마침내 1885년 〈정역〉을 완성하였다. 〈정역〉은 이운규의 후천개벽사상을 재구성한 것으로 후천역(後天易)이라고 불린다. 이에 의하면 선천운수는 1년이 365일과 1/4로 윤년이 있지만 〈정역〉의 운수는 360일로서 윤달이 없다고 한다. 따라서 후천에는 4계절과 밤낮은 물론 한서(寒暑)의 구분이 없어지며, 사회적으로도 차별이 없는 지상천국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선후천이 바뀔 때 세상에는 삼재팔난(三災八難)이 있으므로 무극대도(無極大道)를 닦아야 한다. 이의 핵심은 음(吟)·아(哦)·이(咿)·어(唹)·우(吁)의 오음주(五吟呪)를 송주하는 것인데, 이 오음을 송주하면 저절로 무도(舞蹈)를 하게 된다고 한다. 남학이 때로 영가무도교(詠歌舞蹈敎)라고 불린 것은 이 때문이었다. 특히 광화계보다 일부계에서 이 영가무도를 기본적인 수련법으로 삼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일부계를 영가무도교라고 부른 것이다. 한편 일부계에서는 영가무도에 정(精)·기(氣)·신(神)의 조화작용이 있다고 믿는다.

"정의 조화는 존심양성(存心養性)으로 만리(萬里)를 관통하게 하니 유교의 진리요, 기의 조화는 수심연성(修心鍊性)으로 수련을 이루니 선교의 진리요, 신의 조화는 명심견성(明心見性)으로 돈오(頓悟)케 하니 불교의 진리"라 하여 유불선 3교가 합일된다고 하였다.

1898년 김항이 죽고 나서 일부계에서는 그 가르침의 성격을 둘러싸고 분열이 일어났다.

즉 10대 제자 중 한 명인 하상역(河相易)이 2대 교주가 되면서 김항을 상제(上帝)로 신격화하여 신앙대상으로 삼는 한편, 윷판의 29점 배열이 곧 〈정역〉의 기본원리라고 주장하자, 이를 반대하는 제자들이 "공맹의 도를 더 진전시킨 정역을 사도(邪道)로 타락시킨다"고 공박한 것이다. 이로써 분립된 양 계파는 이후로도 전승을 달리하였으며, 이중 후자의 입장을 견지한 일파가 김항의 직계를 중심으로 전승되어 근래 정경학회(正經學會)를 구성하여 정경(곧 정역)을 학리적으로 연구하고 있다.한편 김치인은 이운규의 선후천교역운도와 오음주의 가르침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보다 불교적인 입장에서 교단을 창립하였다.

그는 이운규의 아들들과 더불어 전라북도 일원에서 오방불교 또는 광화교라는 이름으로 활발한 포교활동을 벌였다. 오방불교에서는 미륵하생신앙의 영향으로 후천개벽을 용화세계의 도래로 보고, 김치인이 바로 미륵불의 강림이라고 믿었다. 또 그는 유교의 인의도덕과 불교의 자비선행 및 선도의 주축수련(呪祝修練)의 병행으로 새로운 후천세계, 즉 용화세계를 맞이할 수 있다고 주장하여 일부계보다 훨씬 많은 신도를 끌어모았다.

그는 자신의 교단을 남학이라고도 불렀는데,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때 5만 명에 달하는 남학군을 조직하고 남학운동을 하려 했으나 사전에 관군의 습격을 받아 김치인을 비롯한 간부들이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김치인 사후, 교단은 금강불교·광화불교 등으로 분열되었다. 이후 광화계 신종교는 전라북도 일원에서 활동하였으나 일제의 탄압과 8·15해방 후의 격변 속에서 교세가 급격히 위축되어 오늘날에는 거의 소멸되었다.

조선말 봉건제 해체기에 형성되어 민족적 위기에 적극 대응한 종교로는 당연히 동학을 꼽게 되지만, 후천개벽사상을 정치하게 가다듬어 동학을 포함한 이후의 많은 신종교의 사상적 근거를 마련한 것은 남학의 최대 업적이라고 할 만하다.

특히 〈정역〉을 저술한 김항의 사상가로서의 면모는 특기할 만하다.→ 김항, 이운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