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항
다른 표기 언어 金恒 동의어 도심, 道心, 일부, 一夫출생 | 1826년, 충남 논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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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98년 |
국적 | 조선, 한국 |
요약 조선 후기 역학(易學)의 대가이자 남학계의 신종교인 영가무도교(詠歌舞蹈敎)의 창시자.
자는 도심, 호는 일부(一夫). 30세 이전에는 주로 문장과 예학에 힘을 쏟다가 한때 인근 마을인 띠올[芽村]에 내려온 연담 이운규(李雲圭)의 영향을 받았다. 이운규는 김항이 36세 되던 해 〈영동천심월 影動天心月〉이라는 오언절구를 주고는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이후 김항은 〈서전 書傳〉과 〈주역〉의 탐독 및 영가(詠歌)와 무도를 통한 정신의 계발 등에 정진한 끝에 1879년 진리를 찾게 되었다. 〈정역팔괘도 正易八卦圖〉와 〈대역서 大易序〉를 얻고, 마침내 1885년에 조선 후기 후천개벽사상을 집대성한 〈정역 正易〉을 저술하였다.
무라야마[村山智順]의 〈조선의 유사종교〉에서는 김항이 1879년 유교계통의 대종교라는 유사종교를 세웠다고 하나 뚜렷한 교단을 조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인근의 유생들이 김항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집단이 형성되었다. 김항은 정역을 통해 후천역(後天易)을 가르쳤을 뿐 아니라 정기신(精氣神)의 조화를 통해 유불선(儒佛仙) 합일의 도를 이루도록 오음주(五吟呪)를 외며 무도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영가무도교라는 명칭은 이 때문에 생긴 것이다. 또 그는 선후천(先後天)이 교역할 때 큰 재난이 오기 때문에 무극대도를 닦아야 한다고 했는데, 오음송주(五吟誦呪)가 그 주요한 방법이었다.
그의 문하에는 10대 제자가 있었는데, 그중 하상역(河相易)이 김항이 죽은 뒤 2대 교주가 되었다. 그러나 하상역이 김항을 신비화하고 신앙대상으로 삼자, 김항의 직계를 포함한 유교적 성향의 제자들이 이에 반발하여 분립하였다.→ 남학, 정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