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욱

김형욱

다른 표기 언어 金炯旭
요약 테이블
출생 황해 신천, 1925
사망 미상
국적 한국

요약 국민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했으나 육사 8기 동기생들과 5·16군사정변의 주역으로 참여한 이후 저돌적이고 공작적 성격으로 한때는 박정희로부터 상당한 신뢰를 받았다. 육사 8기의 김종필 계열이었지만 그룹의 하수인이 되기를 거부하고 박정희와의 직접적인 접촉으로 신뢰관계를 구축했으며, 1963년 7월 제4대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됨으로써 권력의 핵심부에 진입했다.
1963년 10월 15일 치러진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그가 이끄는 중앙정보부는 야당을 분열시켜 야당후보의 난립으로 박정희 후보를 당선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64년 8월 중앙정보부는 인민혁명당사건을 발표하여 도예종을 비롯한 혁신계인사·언론인·교수·학생 등 41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이 사건은 무더기 구속, 김형욱의 압력에 의한 공안검사의 사표, 검찰의 고문 파동 등으로 당시 국회에까지 비화됐다. 1967년 7월 8일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일명 동백림 간첩단 사건)을 발표함으로써 국내외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정부운동에 대해 단호히 탄압했으며, 그 과정에서 야기된 인권탄압 사례는 심각한 국제적 문제로까지 비화되었다. 유신 이후 점차 권부에서 소외당하다가 1974년 미국으로 망명후, 1979년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된 이후 1990년 3월 7일 서울 가정법원 가사심판1부는 그에 대해 실종선고를 내림으로써, 그는 법률상 실종된 지 5년이 지난 1984년 10월 7일자로 사망한 것으로 판결이 내려졌다.

김형욱
김형욱

국민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했으나 육사 8기 동기생들과 5·16군사정변의 주역으로 참여한 이후 저돌적이고 공작적 성격으로 한때는 박정희로부터 상당한 신뢰를 받았다. 육사 8기의 김종필(金鍾泌) 계열이었지만 그룹의 하수인이 되기를 거부하고 박정희와의 직접적인 접촉으로 신뢰관계를 구축했으며, 1963년 7월 제4대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됨으로써 권력의 핵심부에 진입했다.

1963년 10월 15일 치러진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그가 이끄는 중앙정보부는 야당을 분열시켜 야당후보의 난립으로 박정희 후보를 당선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64년 8월 중앙정보부는 인민혁명당사건을 발표하여 도예종을 비롯한 혁신계인사·언론인·교수·학생 등 41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이 사건은 무더기 구속, 김형욱의 압력에 의한 공안검사의 사표, 검찰의 고문 파동 등으로 당시 국회에까지 비화됐다. 또한 한일협정을 둘러싼 6·3사태와 국회비준 파동 때에도 그의 영향력은 크게 작용했다. 6·3사태 무렵 학원 동태를 파악하고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을 움직이며 김종필의 2차 외유를 권유하기도 했다.

인민혁명당 사건은 바로 6·3사태 배후 인물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회고록에 쓰고 있으며, 국회비준과정에서도 야당의원들을 회유·협박하여 대통령 박정희에게 충성을 다했다. 또한 중앙정보부는 1967년 7월 8일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일명 동백림 간첩단 사건)을 발표함으로써 국내외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정부운동에 대해 단호히 탄압했으며, 그 과정에서 야기된 인권탄압 사례는 심각한 국제적 문제로까지 비화되었다.

그러나 유신 이후 권력에서 급격히 소외당하기 시작한 그는 1974년 4월 미국으로 망명하여 박정희 대통령을 비난하는 증언과 회고록 집필로 유신정권에 심각한 타격을 주는 듯했다. 1979년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된 이후 1990년 3월 7일 서울 가정법원 가사심판1부는 그에 대해 실종선고를 내림으로써, 그는 법률상 실종된 지 5년이 지난 1984년 10월 7일자로 사망한 것으로 판결이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