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사태

6·3사태

다른 표기 언어 六三事態

요약 1964년 6월 3일 학생들의 한일회담반대운동이 절정에 이르자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여 이를 무력으로 진압한 사건.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과 함께 신속하게 타결을 서둔 한일국교정상화회담이 1964년 3월부터 본격화되자 학생을 중심으로 한 반대세력의 저항이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3월 24일 서울대학교 집회에서 학생들은 '제국주의자 및 민족반역자 화형집행식'이라는 이름으로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일본 총리와 이완용의 허수아비 화형식을 거행한 뒤 '민족반역적 한일회담의 즉각 중지'를 요구하며 가두시위에 돌입했다.

이를 시발로 서울·부산·대구 등 3개 도시의 학생들이 가두로 진출하여 대대적인 항의시위를 전개했으며, 500여 명의 고교생들은 미국대사관 앞에서 연좌농성을 벌였다. 5월 20일 서울대학교에서 대학생연합은 '황소식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갖고 한일회담과 5·16군사혁명을 맹렬히 성토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여 100여 명이 부상하고 200여 명이 연행되었다.

전국 주요도시에서 학생시위가 계속되면서 6월 3일에는 1만여 명의 학생과 시민이 경찰저지선을 뚫고 광화문까지 진출, 파출소가 방화되고 청와대 외곽의 방위선을 돌파하기에 이르렀다. 시위대는 정부에 근본적인 문제점을 제기하며 정권퇴진까지 요구했다. 이러한 정권존립의 위기에서 경찰력만으로는 이를 막을 수 없게 되자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대책을 모색하기 위한 회합을 계속한 후 오후 9시 50분 서울시 전역에 8시부터 소급 실시되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6월 4일 자정부터 육군 4개 사단이 서울에 진주했고, 계엄사령부는 포고령 1·2호로써 옥내외 집회·시위 금지, 언론·출판·보도의 사전검열, 모든 학교의 휴교, 밤 9시부터 아침 4시까지의 통금연장, 영장 없이 압수·수색·체포·구금 등을 선포했다. 계엄군의 진주로 시위가 무력진압된 이날부터 7월 29일 계엄이 해제되기까지 55일 동안 학생 168명, 민간인 173명, 언론인 7명이 구속되었다고 공식발표되었고, 박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을 탄압하는 강력한 검거선풍이 불자 정국은 전에 없이 얼어붙어 여야대립은 첨예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