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인

김동인

다른 표기 언어 金東仁 동의어 가네히가시 후미히토, 金東文仁, 금동, 琴童, 금동인, 琴童仁, 춘사, 春士, 시어딤, 琴童人, 김만덕, 김시어딤, 김동, 金童, 히가시후미히토, 東文仁
요약 테이블
출생 평양, 1900. 10. 2
사망 1951. 1. 5, 서울
국적 한국

요약 소설가. 이광수류의 계몽적 교훈주의에서 벗어나∙ 문학의 예술성과 독자성을 바탕으로 한 본격적인 근대문학의 확립에 크게 이바지했다. 대표작으로 <광염 소나타>, <감자>, <배따라기>가 있다.

초기 근대문학의 확립과정에서 문단을 주도했던 이광수류의 계몽적 교훈주의에서 벗어나, 문학의 예술성과 독자성을 바탕으로 한 본격적인 근대문학의 확립에 크게 이바지했다. 본관은 전주. 호는 금동·금동인·춘사.

평양교회 장로였던 아버지 대윤의 3남 1녀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 옥씨는 후실로 전실에게서 장남 동원이 있었고, 동인·동평·동선은 옥씨 소생이다. 1912년 평양숭덕소학교를 졸업하고, 다음해 기독교학교인 숭실중학교에 들어갔으나 곧 중퇴했다. 1914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학원 중학부에 입학, 학원이 문을 닫자 메이지 학원[明治學院]에 편입해 1916년에 졸업했다. 이때부터 의사나 변호사가 되려던 꿈을 버리고 문학에 열중했다. 1917년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잠시 귀국했다가 이듬해 4월 김혜인(金惠仁)과 결혼했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가와바타 미술학교[川端美術學校]에 들어갔다.

1919년 2월 주요한·전영택 등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순문예동인지 〈창조〉를 창간하고, 데뷔작 〈약한 자의 슬픔〉(1919. 2)을 비롯해 〈배따라기〉(1921. 5) 등을 발표했다. 3·1운동 파문으로 귀국한 뒤, 아우 동평의 부탁으로 격문을 써주었다가 출판법 위반혐의로 6개월 징역을 살았다.

배따라기
배따라기

1921년 경영이 어려워 〈창조〉를 제9호로 폐간한 후, 방탕한 생활을 했다. 1924년에 창작집 〈목숨〉을 자비로 펴냈고, 같은 해 8월 〈창조〉의 후신격이라 할 수 있는 〈영대 靈臺〉를 창간했으나 이듬해 제5호로 폐간했다. 단편 〈감자〉(조선문단, 1925. 1)·〈정희〉(조선문단, 1925. 5·8)·〈시골 황서방〉(개벽, 1925. 6) 등을 발표했다. 1926년 재산을 탕진하고, 평양으로 돌아가 수리사업을 시작했지만 당국이 허가를 내주지 않아 실패, 이때의 차용금으로 전재산을 날렸으며 이로 인해 부인 김혜인이 가출했다.

1928년에는 아우 동평을 도와 영화제작에도 손을 댔으나 역시 실패하여 극도로 궁핍해졌다. 잠시 조선일보사 학예부장을 지낸 뒤, 1930년 김경애(金瓊愛)와 재혼하고, 생활고를 극복하기 위해 신문·잡지에 많은 소설과 사담을 발표했다. 이때 발표한 작품으로 〈광염 소나타〉(중외일보, 1930. 1. 1~10)·〈젊은 그들〉(동아일보, 1930. 9. 2~1931. 11. 10)·〈발가락이 닮았다〉(동광, 1932. 1)·〈붉은 산〉·〈운현궁의 봄〉(조선일보, 1933. 4. 26~1934. 2. 15) 등이 있다.

1935년 12월에는 손수 〈야담〉을 창간했으며 그후 〈광화사 狂畵師〉·〈김연실전〉(문장, 1939. 3)·〈대수양〉(조광, 1941. 2~12) 등을 발표했다. 1942년에는 일본 덴노에 대한 불경죄라는 죄명으로 6개월 동안 복역했다. 빈곤과 불면증, 약물중독으로 고통받다가 1951년 1·4후퇴 때 가족들이 피난간 사이에 죽었다. 1955년 사상계사에서 '동인문학상'을 제정·시행했으나, 1979년부터 조선일보사에서 시상하고 있다.

단편소설의 확립과 서사적 과거시제에 대한 남다른 관심, 액자소설을 많이 쓴 것 등 문학사적 업적이 뛰어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민족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부족한 점은 그의 문학이 갖고 있는 예술적 가치추구의 맹목성과 함께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문학세계

김동인의 작품들은 크게 단편·장편·평론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단편소설로는 자연주의 계열에 속하는 〈감자〉·〈배따라기〉·〈김연실전〉·〈발가락이 닮았다〉 등과, 탐미주의 계열에 속하는 〈광염 소나타〉·〈광화사〉, 민족주의 계열에 속하는 〈붉은 산〉 등이 있다.

〈감자〉는 우리나라 초기의 자연주의 소설의 대표작이라고 평가받는 작품이다. 단편소설은 특유의 직선적이고 간결한 문체로 썼으나, 후기에 쓴 역사소설이나 사담 등을 포함한 장편소설은 상업적·통속적 경향이 짙다.

역사소설로는 흥선대원군을 주제로 한 〈젊은 그들〉·〈운현궁의 봄〉과 수양대군을 주제로 한 〈대수양〉이 있다. 이 작품들은 당시 유행하던 역사소설과는 달리 역사로부터의 교훈보다 인물의 개성을 살리는 데 중점을 두었다.

평론으로 〈제월 씨의 평자적 가치〉(창조, 1920. 5)·〈조선근대소설고〉(조선일보, 1929. 7. 28~8. 16)·〈춘원연구〉(1956) 등이 주목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