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식

김규식

다른 표기 언어 金奎植 동의어 우사, 尤史, 요한, Johann
요약 테이블
출생 1881(고종 18)
사망 1950
국적 한국
우사(尤史)

요약 신한청년당의 대표로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 명의의 탄원서를 제출했고, 임시정부의 초대 외무총장·부주석을 역임했다. 해방 후에는 좌우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했고, 민족의 분단을 막기 위해 남북협상에 참여했다.
미국 북장로파 선교사 H.G. 언더우드의 고아원에서 성장했다. 언더우드 학당을 마치고 서재필이 경영하는 〈독립신문〉에 잠시 근무하다가, 서재필의 권유로 1896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해방후 민족의 단합을 위해 노력했다. 6·25전쟁 때 납북되어 12월 10일 평안북도 만포진 근처에서 죽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수학과 중국망명
  3. 일제하 독립운동
  4. 해방후 정치활동

개요

신한청년당의 대표로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 명의의 탄원서를 제출했고, 임시정부의 초대 외무총장·부주석을 역임했다.

해방 후에는 좌우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했고, 민족의 분단을 막기 위해 남북협상에 참여했다.

수학과 중국망명

본관은 청풍. 아호는 우사(尤史), 교명은 요한(Johann). 아버지는 지성(智性)으로 동래부의 관리로 근무했다.

아버지가 민씨정권의 대일무역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린 것이 빌미가 되어 유배를 당하고, 어머니마저 6세 때 죽었기 때문에 어렵게 자랐다. 서울에 있는 숙부집에 잠시 있다가 미국 북장로파 선교사 H.G. 언더우드의 고아원에서 성장했다. 언더우드 학당을 마치고 서재필이 경영하는 〈독립신문〉에 잠시 근무하다가, 서재필의 권유로 1896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독립신문
독립신문

1897년부터 1903년까지 미국 버지니아 주에 있는 로노크대학교에서 공부했는데, 수학중 학내 웅변 서클에서 미국 및 세계정치 문제를 토론하면서 식견을 넓혔다. 1년 동안 뉴욕에 있다가 1904년 봄 귀국했다.

1905년 8월 미국 포츠머드에서 개최된 강화회의에 참석하고자 중국 상하이[上海]까지 갔으나 실패하고 돌아왔다. 1904~13년까지 언더우드의 비서로 있으면서, YMCA 학생부 간사 및 교사, 경신학교 교사 및 교감, 배재전문학교 영어강사, 연희전문학교 강사를 지냈다. 한편 종교활동에도 힘써 1910년에는 새문안교회 장로가 되었으며, 1911년 12월 경기·충청장로회 서기, 1912년 2월 전국주일학교연합회 집행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

1913년 상하이로 망명하여 신채호·홍명희 등과 친분관계를 맺었다. 1914년 가을부터 약 2년간 화베이[華北]와 몽골 일대에서 장사를 했다.1916년 앤더슨앤드마이어사(Anderson and Meyer Company)에 입사하여 몽골 접경의 장가구(張家口)에서 2년간 근무했으며, 1918년 3월에는 외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지점장으로 부임했다.

일제하 독립운동

제1차 세계대전 직후 1919년 1월 파리에서 전승국들의 전후 국제문제 처리를 위한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되자, 여운형 등과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대표로서 회의에 참석했다.

1919년 3월 파리에 도착하여 일제의 방해책동과 준비부족을 이겨내고 한국대표부를 설치했다.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 명의로 된 탄원서를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하고〈한국민족의 주장〉·〈한국의 독립과 평화〉등의 인쇄물을 출간하여, 각국 대표들에게 일제의 침략상과 한민족의 독립에 대한 당위성을 널리 홍보했다.

일본의 방해와 강대국들의 무관심 때문에 구체적 성과를 거둘 수는 없었으나, 그의 활약으로 한국문제가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때의 활약으로 1923년 로노크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파리 강화회의가 끝난 후 미국으로 건너가 이승만과 함께 1919년 8월말에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를 조직하고 위원장을 지냈다. 1920년 10월 미국을 떠나 상하이로 다시 돌아와 임시정부의 학무총장을 맡으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내의 분열을 해결하는 데 노력했다.

한편 대한민국임시정부 초창기부터 관심를 보였던 소련 정부가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극동노력자회의를 개최하자, 파리 강회회의를 통해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에 실망했던 그는 여운형 등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표로서 참석했다.

소련에서 돌아온 후 당시 분열되었던 독립운동세력의 통일을 위해 노력하여, 임시정부의 개편을 위한 국민대표회의가 1923년 1월 소집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국민대표회의가 분열만 심화시킨 채 아무런 성과없이 끝나게 되자, 독립투쟁을 위해 이청천 등과 1924년 상하이를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그러나 1925년 일·소밀약이 체결되면서 강제로 상하이로 추방되었다. 그뒤 독립운동 일선에서 잠시 물러나 1927년에는 톈진[天津]으로 옮겨가 베이양대학[北洋大學]에서 4년 동안 영문학을 가르쳤다.

한편 유자명(柳子明) 등이 중국·인도인들과 1927년 2월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를 조직할 때 회장으로 추대되었는데, 실제 참가하여 활동하지는 않았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여 만주국을 세우자 독립활동을 재개하여, 1932년 11월 당시 난징[南京]으로 옮겨가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복귀했다. 한편 1933년부터 난징 중앙정치학원의 교수를 지냈으며, 1935년 6월 김원봉이 중심이 되어 중국 내 각 정치세력들을 망라한 민족혁명당이 결성되자, 이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주석으로 선임됐다.

그러나 민족혁명당이 분열되자 다시 임시정부를 떠나 1936년부터 쓰촨대학[四川大學]에서 영문학을 강의하며 지냈다. 1942년 들어 김구의 한독당과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 사이에 연합전선이 형성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강화되자, 다시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1942년 10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위원 겸 선전부장에 선임되었다. 1944년 2월 임시정부헌법이 개정되어 부주석직이 설치되자 이에 선임되었다.

해방후 정치활동

8·15해방이 되자 임시정부의 선발대로 1945년 11월 23일 귀국했다.

12월말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이 전해지면서 이를 둘러싸고 민족 내의 분열이 심화되자, 민족의 단합을 위해 노력했다. 김구가 반탁운동을 앞세워 우익만의 비상정치회의를 소집하자, 이에 반대하여 임시정부을 탈퇴하면서 좌우 정치세력간의 분열을 막아보려고 했다. 그리고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1946년 3월에 개최되자, 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공을 주장하는 성명을 우익세력 중에서는 가장 먼저 발표했고 민주의원의 대표로 미소공위에 적극 참여했다.

5월 들어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협의대상문제를 둘러싼 미·소의 대립 속에 아무런 성과없이 무기 휴회하자, 여운형과 협력하여 좌우 정치세력들을 규합하기 위한 좌우합작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그러나 좌우합작운동은 이를 과도입법의원(過度立法議員)을 설립하는 방편으로 이용하려는 미군정,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꾀하는 이승만의 저지, 공산당의 편협한 대응으로 별 성과를 얻지 못했다. 좌우합작운동의 결과로 12월 과도입법의원이 설립되자 의장에 선임되었다. 한편 한국문제가 국제연합으로 이관되어 남한 단독정부 수립과 민족분단이 가시화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1947년 10월 중간파 정치세력을 망라하여 민족자주연맹을 결성하고 의장에 취임됐다.

1948년 2월 국제연합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안이 통과되자, 분단을 막고 민족의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남북한 모든 정치세력 간의 협상을 주장하며 김구와 함께 북한 당국에 남북요인회담을 제안했다.

북한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4월에 남북연석회의와 요인회담을 평양에서 개최하자, 4월 21일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김두봉 등과 요인회담을 가졌다. 5월초 서울에 돌아왔고, 남한만의 5·10총선거에 불참했다. 한편 북한측의 제2차 남북협상 제의도 거절하고 사실상 정치활동 일선에서 물러났다.

6·25전쟁 때 납북되어 12월 10일 평안북도 만포진 근처에서 죽었다.

저서로는 〈엘리자베드 시대의 연극입문〉(1940)·〈실용영작법〉(1944)·〈실용영어〉(1945) 등과 시집 〈양자강의 유혹〉(1945)이 있으며, 중국 근대시 〈완용사 婉容詞〉(1943)의 영문번역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