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표회의

국민대표회의

다른 표기 언어 國民代表會議

요약 1923년 중국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 대표들의 회의. 1920년대 상해임시정부가 제대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자, 곳곳에서 항일 독립군을 총망라하여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고 독립운동의 새로운 길을 모색할 것을 요구하는 주장이 일어났다. 국민대표회의는 독립운동 단체들의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 독립운동 계획, 나아가서 독립운동의 나아갈 방향 등에 대해 심도 있는 토의를 가졌다는 데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창조파와 개조파의 끊임없이 대립과 운동 노선 차이 등, 서로간의 파벌과 이념의 대립으로 폐회되고 말았다. 그 후 임정은 임정대로 다시 재건되었고, 중국 동북지역의 독립운동계도 일정 기간 진통을 겪다가 1920년대 중반에 신민부, 정의부, 참의부의 3부로 정리되어 재통일되었다.

목차

접기
  1. 배경
  2. 창조파와 개조파의 노선대립
  3. 회의진행
  4. 역사적 의의

배경

상해임시정부(이하 임정으로 함)는 수립과정부터 이미 이념·노선·지연의 차이로 내부 대립의 요인을 갖고 있었다.

외교노선을 견지한 임정은 만주·노령 지역의 무장독립군을 통일적으로 지휘할 수 없었으며, 해외 독립운동의 지도기관으로서의 역할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 이에 임정의 외교노선에 반대하고 무장투쟁 노선을 주장하는 독립운동자들이 점차 베이징을 중심으로 반임정 세력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새로운 차원의 독립운동방략, 방침을 모색하기 위해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요구하였다.

1920년 9월 신채호·박용만·신숙 등을 비롯한 8개 단체 대표들은 베이징에서 북경군사통일회를 조직, 임정을 부인했다(→ 북경군사통일회).

이들은 국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항일 독립운동 단체의 독립군을 총망라하여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고 이 회의에서 장차 전개될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략을 모색할 것을 주장했다. 한편 임정 내부에서도 김창숙·박은식·원세훈 등 15인은 1921년 2월 〈우리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격문을 발표했다.

이 격문에서 임정은 창립 당시부터 잘못되었으며, 수립 이후 무능과 알력으로 국민의 기대에 이바지할 수 없었다고 비판하면서 국민대표회의를 통해 전국민의 의사에 기초한 통일적이고 강력한 정부수립과 민족독립운동의 방략을 수립할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만주지역에서도 1921년 5월 어무 현[額穆縣] 회의에서 김동삼·이탁(李鐸)·여준(呂準) 등이 임정개혁안을 작성, 임정에 통고하였다.

국민대표회의 소집요구에 대해 임정지지 세력들도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1921년 3월 5일 조완구·윤기섭 등 45인은 반임정파의 임정불신임에 대해 반대성명서를 발표했다. 또한 이시영·이동녕·신규식 등은 임정 외곽단체로서 협성회(協誠會)를 조직해 임정유지를 호소했다. 반임정계인 창조파에서도 이에 대항하여 정구단(正救團)을 조직, 이승만의 무책임과 무능을 공격했다. 이에 자극되어 베이징에서는 4월 20일 10개 단체 대표들이 모여 베이징 교외 삼패자화원(三牌子花園)에서 군사통일주비회를 개최, 군사지휘권의 문제 및 이승만의 위임통치문제 등을 논의했다.

이 회의과정에서 이러한 문제는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여 광범위하게 토의할 문제임을 다시 확인했다.

곳곳에서 국민대회의 소집요구가 일어나자, 임정 노동국총판으로 있던 안창호는 5월 상하이 상현당(尙賢堂)에서 행한 대중강연에서 임정은 독립운동계를 지도할 수 없으므로 임정개조와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주장했다. 강연회가 끝난 즉시 상해국민대표회기성회를 조직, 여운형 외 20명을 기성회원으로 선정했다. 또한 안창호는 코민테른 대회에 참가했던 여운형이 상하이로 돌아오자, 5월 21일 프랑스 조계 내에 국민대표준비촉진회를 조직, 국민대표회의 개최일을 6월로 결정했다.

임정 내의 강경파는 국민대표회의 개최에 대한 반대조치로서 임정 내무령으로서 5월 30일자로 〈불온언동에 대한 주의의 건〉을 발송하여 그들을 비난했다.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계열은 임정을 중심으로 대동단결하는 것만이 정국혼란을 수습하고 조국을 광복할 수 있는 길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대응은 의정원 의원의 연이은 사퇴운동을 야기했을 뿐 결국 난국수습을 위해 국민대표회의를 열어야 한다는 쪽으로 여론이 기울게 되었다. 그결과 상하이와 베이징의 대표자들이 조정·타협하여 1922년 4월 의정원에서도 국민대표회의 소집이 가결되고, 5월 10일 국민대표회의를 추진할 단체로서 국민대표회의주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5월 20일 주비위원회는 '소집선언서'를 발표하고, 9월 1일에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한다는 것을 각지의 독립운동 단체에 통고하고 초청장을 발송했다. 국민대표회주비위원으로 박용만 등 4명을 선출하고, 이를 선언·촉진시키기 위해 신채호가 중심이 되어 〈대동 大同〉이라는 주보를 발행했다.

선언서는 독립운동계를 일전시켜 통일적인 조직으로 독립운동 방략을 수립하고 그 실천으로 조국광복을 기필코 달성하기 위해 독립운동 대표가 한자리에 모여서 논의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주비회의 활동은 김구(金九) 등 임정옹호파의 반대, 대회경비에 따른 자금난 등으로 인해 부진했으며, 특히 워싱턴에서 열린 '태평양회의'와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대회'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기 때문에 회의개최 기간중에는 일시 중단되었다.

그러나 두 국제회의에서 성과를 얻지 못하자, 독립운동은 한국인의 주체적인 역량으로 국내외의 독립운동 단체와 독립군의 대표가 모여 장차 전개될 방침을 결정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이 절실하게 되었다. 이에 국민대표회주비회는 다시 활동을 시작하였다. 각 단·지역 대표는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된 1923년 1월 3일을 전후하여 국내, 상하이, 만주 일대, 베이징, 간도 일대, 노령, 미주 등 120여 개의 단체 및 지역에서 모인 120여 명이었다.

창조파와 개조파의 노선대립

국민대표회 내에서 임정에 대한 입장은 임정을 대신할 새로운 조직을 건설하고자 한 창조파(創造派)와 임정의 잘못된 점만을 고치자는 개조파 및 임정유지를 주장하는 임정옹호파 등 크게 3갈래로 분열되었다.

창조파와 개조파가 임정문제를 둘러싸고 대립하게 된 원인과 배경은 대체로 지역적 기반, 노선과 이념의 차이에서 찾을 수 있다. 창조파는 이승만과 그의 외교노선을 배격하면서 기본적으로 임정의 역할과 위치를 부정하는 입장이었다. 이들은 주로 베이징·노령 지역에 기반을 둔 신숙·문창범·윤해 등이 중심인물이었다.

이에 비해 여운형·김동삼·안창호 등 임정의 정통성을 인정한 개조파의 대부분은 상하이와 만주지역을 기반으로 삼고 있었다.

한편 임정을 그대로 유지하자는 김구·이시영·송병조·윤기섭 등은 미주의 교민단과 동지회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또다른 대립요인은 운동노선의 차이에 있었다. 창조파 인사들은 처음부터 임정에 불참한 경우도 있지만, 임정에 참여는 하였으나 임정이 외교노선을 견지하고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사실이 드러남에 따라 임정 승인을 거부한 인사들도 있었다.

즉 임정의 외교노선을 거부하면서 현실적인 군사방침을 수립하여 대일항전을 실행하고자 한 무장투쟁 노선이었다. 반면에 개조파의 경우는 임정 각원의 개선, 헌법의 개정 등 단지 임정의 제도·운영의 개선만을 바랐던 인사들이 있었던가 하면, 한편으로는 임정이 지향한 노선 자체에 대한 비판적 입장도 있었다.

이들은 임정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데는 일치하였으므로 노선의 일치보다는 임시정부라는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입장이었다.

한편 종래 무장독립론을 주장한 이동휘는 개조론의 입장을 취했다. 창조·개조파 간의 이념면에서의 차이는 국민대표회 기간중에는 확연히 드러나지 않았다. 다만 창조파가 개조파와의 노선차이를 의식하면서 창조파만의 정당조직을 계획했던 사실이 있었다.

회의진행

1923년 1월 3일 국민대표회의가 시작되었지만 이 회의는 예비회의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1월 3일까지도 각지의 대표가 모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2월 2일에 이르러 본회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의장인 김동삼이 개회선언을 하였다. 그러나 회의는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조직해야 된다는 창조파의 주장과, 임시정부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실정에 맞게 효과적으로 개편·보완해야 한다는 개조파와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 어려움을 거듭하였다. 3월 13일 임시정부개조안이 상정되면서 양측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으며, 결국 3월 20일부터 휴회로 들어가 정식회의가 열리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타개책으로 양파 간의 막후교섭이 추진되었다. 그리하여 개조파가 제출한 제3안인 '국민대표회의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조직·헌법·제도 및 기타 일체를 실제 운동에 적합하도록 개조할 것을 결의함'을 다른 안건들을 처리한 뒤에 처리하기로 하였다.

이에 4월 11일에 정식회의를 다시 개최하여 여운형 외 3명의 명의로 제출된 '본 국민대표회의는 내외의 각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하여 일대 독립당을 조직하기로 결의한다'는 제안설명을 들었다. 그런데 여운형의 이 제안은 결국 창조파와 개조파의 대립으로 채택되지 못했다.

4월 17일 군사분과위원회의 이청천 외 6명은 군사의안을 제출하였다. 병역의 의무는 만 18세에서 40세까지로 하고, 18세 이상의 여자와 40세 이상의 남자도 지원자로서 병역에 복무케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군대편성은 정규군과 지방군으로 구분하여, 최고단대로 혼성여단을 두고, 각 군대와의 연락을 도모하기 위해 각 군구마다 건제별(建制別)로 편성하며, 군사기관으로는 군무부와 참모부를 둔다고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도파계 사람들이 창조파로 넘어갔고, 5월 15일 '불통일'의 이유로 서로군정서와 한족회가 대표소환을 명함으로써, 만주대표로서 많은 활동을 한 김동삼·김형식·배천택·이진산 등은 국민대표회에서 탈퇴했다.

그후 윤해가 의장, 신숙이 부의장, 오창환이 비서장에 각각 보선되었으나, 5월 16일 개조파의 조상섭(趙尙燮)·조상벽(趙尙壁) 등 42명이 불참을 선언함으로써 회의는 창조파만의 대회가 되었다. 6월 3일 창조파만으로 진행된 회의에서는 국호를 '한'(韓)으로 결정하고 6월 7일 헌법을 통과시켰다.

이에 대해 개조파 위원 57명이 반대성명을 냈으며 임정은 6월 6일 국무령 포고 제3호로 이에 반대했다. 특히 임정 내무총장인 김구는 내무령 제1호로서 국민대표회의의 해산을 명령했다.

이에 창조파는 노령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정부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그해 8월 한정부는 노령으로 옮겨갔으나 레닌 정부의 승인을 얻지 못했다. 그결과 한정부를 따라갔던 창조파 인사들은 1924년 2월말을 전후하여 중국지역의 각 단체에 복귀해 개별운동을 전개했다.

창조파와 개조파 이외에 중도파로서 통일적 대단합을 주장하던 인사가 있었으나, 그 수가 극히 적었고, 회의는 6개월간 개최되었으나 본격적인 안건을 처리하지 못한 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국민대표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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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의의

국민대표회의는 독립운동 단체들의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 독립운동 방략, 나아가서 독립운동의 나아갈 방향 등에 대해 심도있게 토의를 가졌다는 데 그 역사적 의의가 있다.

그러나 결국 국민대표회의는 파벌과 이념 간의 대립으로 폐회되고 말았다. 그후 임정은 임정대로 다시 재건되었고, 중국 동북지역의 독립운동계도 일정 기간 진통을 겪다가 1920년대 중반에 3부(三府:신민부, 정의부, 참의부)로 정리, 재통일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3부통합운동